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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힘찬 Aug 19. 2017

일본을 몰랐던 한국인, 한국을 몰랐던 일본인의 고백

#01 대한민국 청년들의 성공스토리


“쪽발이 새끼야!”


10대 때 고향인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처음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 왔을 때 애들의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호기심이 가득해 일본 생활에 관한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는 반면, 무의식 속에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인식은 얼마 가지 않아 ‘불신’ ‘적대감’으로 표출되었다.


다행히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주고 잘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반을 대표하는 반장과 몇몇 아이들은 ‘독도 문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다양한 역사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도 모자라 “우리나라가 좋아, 일본이 좋아?”라는 식의 낚시성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 당시 솔직히 일본이 더욱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본에 살았을 때는 스스로 일본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12살까지 일본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건강 문제로 갑자기 한국행이 결정된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두 분의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어머니는 나를 돌볼 틈도 없이 일을 하러 다니셨고, 나는 혼자 있거나 보육원에 맡겨지면서 자랐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도 모자랄 시기에 나는 밤마다 혼자서 잠을 청해야 했고 공허함, 외로움이 익숙한 아이로 자랐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애써 장난을 치고 밝은 척하며 지냈지만 어머니는 생계에 대한 압박감과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나까지 챙길 여유가 없으셨다. 


그런 탓에 어머니와의 사이는 자연스레 멀어지고, 날이 갈수록 서운함이 커져 스스로 어머니와의 거리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친구들에게 나의 존재를 그저 ‘인정’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소한 것에도 쉽게 서운해 하고 작은 일에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 감성적인 성격 탓에 눈물도 많았다. 사람에 대한 닫힌 마음을 연다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찌질이’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나 같은 친구를 가까이 둔 내 일본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나는 진짜 ‘우정’을 느꼈다.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다. 이제 곧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정말 답답했다. 나는 일본에서도 어머니 직장 문제로 매년 이사를 하는 바람에 친구와 친해지려 할 때마다 헤어짐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봐 마음이 더 울적했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정착하려는데, 낯선 나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 당시 내게는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방학 동안 나는 계속 집에만 있었다. ‘결국 떠날 건데 친구들을 뭐하러 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많이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나는 친구들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오가타! 왜 전화해도 안 받아! 걱정했잖아! 너랑 놀려고 애들 다 데리고 왔어. 같이 놀러가자!”

“싫어. 곧 한국으로 떠날 건데 내가 왜? 너희들끼리 놀아.”

“네가 한국으로 떠나는 거랑 우리랑 노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네가 떠나기 전에 우리끼리 편지카드도 만들었고, 줄 선물도 있어! 빨리 가자!”

“왜 그렇게 나를 챙겨주고 신경 써 주는 건데? 나는 툭하면 화내고 서운해 하고 그랬는데…… 짜증나지 않아?”

“역시 바보 맞네.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냐?” 

“응?”

“우린 친구잖아!”

‘우린 친구’라는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12살이 되어서야 나는 처음으로 ‘인정’ 받았다.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려 주고 기다리며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뜨거운 눈물만이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나는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들을 쌓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렇게 한국 땅을 밟았다. 이렇게 나는 한층 성장한 상태로 친구들과 이별을 했다. 일본이 좋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이후로 나는 매일 한일 문제에 시달렸고, 전교생이 나를 ‘일본인’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일본에서 살았을 때는 한국처럼 역사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 사이의 역사 관계를 하나도 몰랐다. 아이들이 역사적인 문제로 질문을 할 때면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소문은 돌고 돌아서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일본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함께 지내는 친구들은 잘 사귀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를 적대시하는 친구들은 나를 “쪽발이”라고 불렀다. 이런 환경 탓에 내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그저 하루하루가 무사히 끝나길 바랐다. 내 스스로가 바뀔 생각은 안 하고 ‘지금의 내 환경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왜 그들로 인해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하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이름도 있어.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나갈 사람이야!’ 그 뒤로는 당당하게 “나는 쪽발이가 아냐. 한국인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출처 : 추성훈 선수 UFC 대회


재일교포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셔독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두 나라를 모두 사랑한다. 한국과 일본 팬들이 같이 응원해준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쁜 일이다.” 


그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에 나보다 국적에 대한 시비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는 UFC 데뷔를 앞두고 자신의 속내를 밝힌 적도 있다. “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인 또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나 또한 그렇고 한 나라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말이다. 


추성훈 씨는 어떻게 보면 나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었고, 사실상 더욱 크게 비난받을 위치가 아닌가. 일본 혹은 한국, 어떤 선택이든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다. 허나 그는 두 어깨에 각각 한국, 일본의 국기를 툭툭 치며 자신 있게 경기에 나선다. 오히려 두 나라의 정신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면서 남들과는 다른 두 배의 정신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것이다. 나는 추성훈 씨를 보면서 ‘선택에는 외길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삶과 운명이 있다. 그리고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마음속 깊숙이 이런 생각이 잠재되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살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어떤 틀 안에 가둬두고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앞으로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피하거나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확률이 높다. 대부분 그러한 결정으로 얻게 되는 결과물은 고통과 상처뿐이다. 


겁먹지 말고 ‘정면 돌파’하라. 추성훈 씨는 재일교포의 운명을 짊어졌음에도 경기장에서는 어깨의 두 나라의 깃발을 내세웠고, 나는 스스로 ‘한국인’이라 외쳤다. 


일본의 피가 섞인 재일교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주관을 뚜렷하게 함으로서 ‘정면 돌파’를 시도하니 그저 장애물을 피하기만 했던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재일교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위기라는 단어 자체가 위험이라는 말과 기회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위기가 오는 순간에는 누구나 당황할 수 있고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위기를 통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 20대들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어린 나이 때부터 숱한 경쟁을 하며 생겨난 타인과의 비교, 스스로의 한계치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정해버리는 ‘수저’ 이론, 조상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냈던 대한민국을 부르는 호칭 ‘헬조선’까지…….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움츠린 어깨를 당당히 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현재 20대는 모두 지옥과도 같은 10대 입시 경쟁 속을 파헤치고 올라온 멋진 청춘들이다. 우리는 더욱 과감하게 나아가야 하고, 개인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들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그동안 정해놓았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어릴 적 내 친구들이 나를 붙잡아준 것처럼, 나는 대한민국의 20대 청춘들의 손을 붙잡아 주고, 함께 성장하고 

싶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 있듯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나의 ‘부족함’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때는 내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믿는다. 이것만 기억하자. 우리는 모두 ‘헬조선’을 위대한 대한민국으로 바꾸어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한민국의 20대 청년’들이다. 내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리가 함께 멋지게 만들어 나가자.                                                           


https://www.instagram.com/ogata_mar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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