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2022)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도시 이름이다. 항구가 있고, 조선업에 유리한 위치에 있어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건조된 곳이기도 하다. 어떤 도시를 소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 예술가들의 도시 파리 같이. 하지만 그곳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도 그 도시가 같은 설명으로 다가올까? <벨파스트>의 감독 케네스 브레너는 벨파스트 출신이다. <벨파스트>는 벨파스트의 종교 갈등이 심화되어 극심한 분쟁에 이르렀던 1960년대의 벨파스트를 그린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다. <벨파스트>는 감독 케네스 브레너의 고향을 그린다.
영화가 흑백으로 되어있고,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고향 도시를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와 닮은 점이 많다. 입체적으로 담긴 벨파스트 길거리의 정겨운 소음들은 <로마>의 그것만큼 치밀하지는 않더라도 역시 그 도시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 힘이 있다. <벨파스트>가 <로마>의 아류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벨파스트>는 감독의 유년기를 유년의 시선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분명히 <로마>와 구분된다. <벨파스트>가 담고 있는 가족의 풍경은 <로마>가 그리는 외로움보다는 조금 더 정겹고 따뜻한 느낌이다.
함께 본 친구는 버디의 아버지가 너무 핫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남겼는데, 제이미 도넌이 연기한 잘생기고 멋진 아버지는 아마도 어린 버디의 시선이 아버지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너무나 이상적인 버디의 조부모 역시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유머와 지혜를 겸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는 영화를 내내 따뜻한 분위기로 감싼다. 어쩌면 이상화되었을 벨파스트를 그리는 것은 이 영화가 '벨파스트'가 아니라 '고향'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역사적인 분쟁 사건의 한 복판을 다루는 모습은 <조조 래빗>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 아버지가 폭력 사태에 휘말린 버디를 구하고 우리 가족을 건드리지 말라고 선언하며 총을 쳐내는 일촉즉발의 상황은 사건의 엄중함에 비해 가벼운 긴장감을 동반한다. 딱 그만큼의 가벼운 긴장감이 <벨파스트>가 가진 무게감이다. <벨파스트>는 역사적 사건의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벨파스트>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가장해 어떤 한쪽이 옳다는 것처럼 편을 들지 않는다. 균형감을 가진 시선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편을 가르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가톨릭을 믿으면 고통받는다는 이야기를 형제와 주고받은 버디는 다음날 교회에 가서 목사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본다. 뭐 하나가 옳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렇게 편을 가르고 서로를 배척하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이고 우스꽝스러운 일임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다. 애초에 버디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버디의 유일한 관심사는 버디가 학교 친구인 캐서린과 결혼할 수 있을지 같은 소박한 꿈뿐이다. 버디의 집은 개신교지만 캐서린의 집은 가톨릭교도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영화는 내내 흑백으로 화면이 덮여있지만 이따금씩 영화나 연극이 화면에 등장할 때만큼은 컬러가 된다. 예술가 케네스 브레너를 키운 자양분을 형광펜 쳐놓은 듯 강조하는 모습일까? 아무렴 고향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고, 종종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위험한 시기에 버디에게 영화와 연극의 세계는 생생한 컬러로 다가왔을 것이다. 버디에게 벨파스트는 어떤 곳이었을까? 따뜻한 조부모의 보살핌과, 모두가 한 가족인 것 같은 동네 사람들, 종교가 달라도 아무렴 어떤가, 버디가 좋아하는 캐서린이 있는 곳. 타이타닉이 건조된 도시라거나 극심한 분쟁이 있는 도시라던가 하는 건 버디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잠시 그곳을 떠나더라도 그 모든 추억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날아드는 화염병보다는 아빠와 엄마가 함께 춤을 추는 도시로 기억될. <벨파스트>는 당신에게도 고향의 존재를 되묻는 영화다. 당신의 고향 도시에 붙일 당신만의 수식어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