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선배를 위하여

선배님 건강하시죠?

by 세레꼬레

주식을 할 때엔 늘 지나간 기회를 생각해보곤 한다.

아 그때 왜 난 그걸 지나쳤을까 분명 내 앞에 아른거렸던 기회가 있었는데 날려버린, 혹은 보지 못했던

기회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할 때가 종종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봄.

난 당시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갑작스레 맞이한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 예상 못한 커리어인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공장을 엄마와 함께 운영하다가 패션 커리어를 위해 공장을 내팽개치고

다시 서울로 와서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머리 아팠던 2010년에서 2011년이었는데 세줄로 요약이

된다는 게 서글프다.


수입편집샵 MD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나를 써주는 곳은 없었고, 간신히 S무역에 주니어 MD 포지션으로

들어가지만 그 S무역은 뭐랄까 인권이 없는 정말이지 이상한 곳이었어서 3개월 만에 나오게 되고,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지원 원서를 내지만 별로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우연찮게 인터뷰를 진행하고서 합격이 된 곳은 청담동에 있던 S편집샵인데 연봉은 뭐 밝히기가 뭐할 만큼

턱없이 낮았고 내가 메인 MD도 아니었지만 그냥 노는 것보다는 뭐라도 일하는 게 낫고,

어쨌든 규모가 작아도 수입 편집을 하는 곳이니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2012년 1월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패션 관련 편집샵이지만 자체 브랜드로 주얼리도 키우는 곳이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S편집샵에서도 나름 배우는 게 있었다. 그게 다 경험이 되니까.

원래 주얼리에 관심 없었는데

그곳에서 주얼리의 기초적인 부분은 어깨너머 조금 배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쨌든 S편집샵의 젊은 사장님과 메인 MD였던 패션센스 넘치던 S대리와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직급의 S사원

이렇게 단출한 구성이지만 나름 재미있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편집샵에서의 기억이 있다.

비록 점심도 사무실에서 주로 배달시켜 먹고(배달의 민족이 없던 시절이지만, 그 동네는 배달이 발달되어있음) 가끔 편집샵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만나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아, 실물이 낫군! 평가도 하고,

퇴근하고 압구정 로데오에서 타로점도 보던 그 시절.


샵에서의 업무가 조금 익숙해지던 즈음에 아마도 2월 혹은 3월쯤부터 난 당시 살았던 분당 수내역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편집샵은 오전 10시 반에 문을 열어서 10시~10시 15분에 보통 출근을 하는

스케줄이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한두 시간 비니까 그 시간에 의미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5일이었나 3일이었나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약 50분 진행하는 영어 프리토킹 수업을 등록하게 된 것이다. 미국인 선생님이 있고 학생이 5-6명으로 구성되어 수업 때마다 선생님의

프린트(주제가 달라짐)를 받아서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나름 즐거웠고, 나로서는 이태리에서 고생하며 체득한 영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없는 월급에서 쪼개서 투자하는 영어수업이어서 굉장히 성실히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S편집샵에 있지만 꼭 원래 꿈꿨던 SI(신세계인터내셔널)에 경력직 MD로 들어가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그러려면 영어는 필수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야심 차게 학원에 꼬박 출석한 것이다.


어학원 클래스의 특성상, 계속 다니다 보면 그 클래스 사람들하고 어느덧 친해지고 토론 수업을 하다 보면

개개인의 생각이나 경험도 얘기하게 되면서 내적 친밀감도 자연스레 형성되어서 그때 그 수업 구성원들과

수업 끝난 8시 50분부터 약 9시 30분 정도까지 커피 한잔을 하게 되었다.


나는 30대 초반, 그리고 40대 가정주부 2명,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인, 30대 중후반의 남자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 혼자 그 클래스에서 유일하게 남성이었는데 꽤나 여성스러운 면도 있었는지 주부 누님들과도 잘 지내고 영어도 곧잘 하고 잘 웃는 타입이었다. 나는 당시 남자 친구는 없었고, 가끔 만나서 맥주 한잔 하는 동기 혹은 후배들은 있었는데 그때엔 연애보다 커리어에 더 관심이 있던 시기라서 사실 그 선배는 말 그대로

선배로 인식했었고, 남자로 고려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가끔 그 주부 누님들을 제외하고 그 선배랑 둘이서 커피를 먹은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선배도 분당 수내동에 혼자 살고 있었고, 네이버에 다니는 직원이었고(당시 다니고 있었는지

잠깐 휴직이었는지 그만둔 건지 명확 치는 않음), 대학교도 같은 대학이었는데 나는 건축전공이었고 그분은

영문과 전공이었다. 나보다 5-6살 많은 선배였던 거라서 그냥 선배로 부르기로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선배는 나를 약간의 썸녀로 생각했던 것 같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난 건축과가 공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생활 내내 공대 여학우로서, 많은 남자 선배, 동기, 후배와

더불어 생활했었기 때문에 '남자'라는 인식보다는 그냥 친구 같은 느낌으로 그 선배를 대했었다.

내가 아는 수많은 남자 선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는데 몇 년 후에야 아 그때!라고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약간 본인의 매력 어필을 하는 식으로서 네이버라는 회사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었고,

본인이 일본어를 잘해서 네이버 재팬의 초기 멤버로서 일본에서 라인 메신저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멤버라는 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는데 난 그의 능력에 대해서

전혀 개념이 없었고, 당시만 해도 여전히 디자인 러버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선배가 본인의 일본 무용담을 얘기해도 난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아 그러셨군요'라고만 응수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어쩌면 소개팅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혹자는 이 선배의 능력에 대해 칭찬할 수도.


한 번은 정말이지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이었는데 문을 활짝 다 열어서 비가 쏟아지는 광경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런 테이블이 있던 이자카야에서 이 선배와 함께 맥주에 꼬치구이를 먹었던 기억도 있다.

너무나 썸녀 썸남 같은 시간이었는데 당시에도 난 여전히 이 분을 선배라고만 생각을 해서, 속으로

아 이 순간에 남자 친구와 있었으면 좋았겠네! 이런 생각도 했던 기억이 있다. 장면은 꽤나 로맨틱했는데

함께한 대상에 대해서 전혀 로맨스가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내가 회사를 옮기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학원도 못 다니게 되었다.

새로 옮긴 회사는 9시 출근이었기 때문에 이 영어학원 클래스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서 사실 아쉬웠다.


어쨌든 이 선배님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는데.

이 글의 주제인 지나가버린 기회에 대해서 하나 말해두고 싶은 건.

그 로맨틱했던 여름밤의 이자카야에서였는지 아니면 자주 갔었던 평일 오전 스타벅스 수내역점에서였는지

네이버 공채 1기라던 이 분이 자신의 네이버 동기 후배들이 '카카오'로 이적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지난 기억이어서 그 당시였는지 아니면 2012년 혹은 2013년이었는지 약간 헷갈리지만

(왜냐하면 이 선배와 2013년 정도까지는 카톡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카카오 메신저에 대해서 정말이지 별생각 없었던 나는.

"네? 네이버에서 카카오톡으로 옮긴다고요? 포털사이트인데 갑자기 뜬금없는 메신저 회사로요?"

약간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었다.

네이버가 더 큰 회사인 것 같고 당시 카카오는 신생 회사였고 메신저 하나 들고 나온 회사였는데


선배는 인재들을 카카오가 쓸어간다면서 네이버의 앞날이 걱정된다며 얘기했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후에 미국으로 갔다(그 후에 연락이 끊겼다).


난 카카오든 네이버이든 눈에 안 들어오던 시절이었고, 나에겐 제일모직의 꼬르소 꼬모나

신세계인터내셔널의 분더샵만 최고였던 시절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선배의 말을 지나쳤었다.


2012년 가을 새로운 회사에서 아직 적응이 안 되어 서먹하던 시절에

외근을 하러 나가다가 잠깐 강남역 스타벅스 건물에 들렀는데(삼성타운 근처에 단독 건물로

스타벅스가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우연히 그곳에서

이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이 선배는 자신의 지인인 OO형과 커피 한잔 중이었는데

3분에서 5분 정도 나랑 대화를 하게 되었다. 엄청 반가워하면서,

"아 회사가 이 근처랬지? 너무 반갑다. 어디 가는 길이야?"

라고 묻고는 나를 그 OO형에게 소개해주었다.(본인 후배라는 식으로 나를 얘기했었다)

내가 시간이 있었더라면 자연스레 합석을 해도 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당시 홍대에 시장조사를

갔어야 했고, 다음에 연락하자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어쨌든 그때 그 스타벅스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을 마지막으로 이 선배와는 연락이 끊겼다.

학원에서 알게 된 만남치고는 그래도 꽤 가까웠었는데 요즘 말로 이런 걸 '시절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친구를 원했고 그는 약간의 연애를 원했던 것 같아서 더 지속되기는

어려운 관계였지만 그래도 편집샵 다닐 때 그때의 오전의 커피와 대화는 즐거웠어서

지금은 고마운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힌트를 엄청 많이 주었는데 난 '카카오'라는 회사를 눈여겨보지 않은 것을

가끔 지금도 생각하고 한다. 그리고 네이버의 라인이 일본에서 엄청 성공을 했는데

어쩌면 네이버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던것도 약간 아쉽다. 그때엔 주식을 안하던 시절이지만,

주식을 시작하고서 그때의 대화를 떠올려봐도 힌트는 얻었을텐데 말이지.

당장 투자를 안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기에, 내 카카오톡 목록에는 여전히 선배가 있지만

지금은 없는 선배라고 부르고 싶다.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열정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