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의 패션

40년 인생에 드디어 깨달았다

by 세레꼬레

어제 장안의 화제가 되고있는 더현대서울(여의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퇴사를 하고 나서 주로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흐트러지지는 말자는 생각에

오전9시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는 나름 편한 면바지와 맨투맨티셔츠 등 비즈니스캐주얼에서

좀더 캐주얼이 강조된 차림으로 내 방 책상앞에 앉아있곤한다.

하지만 어제는 여의도까지 가는 길도 멀고, 그 사람많은 백화점에서 또 돌아다니려면 뭔가

편한 옷차림이 좋을것 같다는 생각에, 아예 인터넷으로 산 저가의 추리닝 바지를 입고

워커 부츠와 트렌치코트를 입고선 지하철역 거울에서 옷차림을 한번 훑어보았는데

순간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평일 낮에 추리닝을 입은' 나를 보면서 불현듯 어릴때 가졌던 의문이 교차되었다.


아빠는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한 금수저 왕자님이신데 어릴땐 그런걸 몰랐기때문에

초등학교 1,2학년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때에도 추리닝을 입고 계신 아빠를 보면서

우리 아빠는 양복을 왜 안입지? 드라마 봐도 아빠들은 넥타이 매고 집을 나서던데 이런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늘 추리닝을 입고 계셔서 어릴때 어디 놀러간 사진을 봐도

추리닝을 입은 아빠 모습은 여기저기에 많을뿐더러 어릴때 아빠를 생각하면,

아빠의 전용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회색 추리닝 상하의 세트가 절로 생각이 난다.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때쯤 아빠를 따라서 공항에 갔다. 살던곳에서 꽤나 멀었던 서울에,

아빠와 함께 가는 행사였기때문에 무척이나 설렜던 그런 기억.

당시에는 비행기 타고 이동하는게 약간은 특별했었다. 누구나 탈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보편적이지도 않았고 주로 업무차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런 1989년.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탈 때 뭔가 차려입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어릴때 백화점도 나름 특별한 곳이여서 사람들이 백화점 갈때 차려입었던 것처럼.

어린이 마음에 공항 간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이고 비행기 타는게 신났었는데

아빠는 그 때에도 추리닝에 외투만 입으시곤 내 손을 잡고 비행기에 들어가기전 줄을 서 있었고

그러다가 또 아빠의 대학동창을 만나서 인사를 하는데 그 대학동창 아저씨 뒤로 알수 없는

후광이 비춰져서 저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냐 했더니 국회의원 친구라고 얘기하시는데...

그때에도 어쨌든 중요한건 그 추리닝. 이 장면이 왜 또렷이 기억나냐면, 어린 마음에

국회의원은 뉴스에만 나오는 사람이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못 했고

아빠가 국회의원 친구가 있을거라고도 전혀 생각을 못 했고

하필 그 국회의원을 만날때 아빠의 차림이 추리닝이였다는게 핵심이다.


나이를 40쯤 먹고 나서야 아빠가 자유로이 살 수 있었고 아무때나 추리닝을 입고 움직일 수

있었던 그 그간에는 돈을 버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돈이 채워지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 시스템의 주인이 아빠였기 때문이라는걸 알고 있다. 물론 그 시스템은 할아버지의 유산이지만.


너무나 자유롭게 쓰는 시간과 내키는대로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하는 삶을 사신 아빠인데

어릴때엔 다른 아빠들과 너무 달라서 그게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고

왜 우리 아빠는 회사를 안 가고 또 전혀 안 꾸미고 안 돌아다니는지 의문스러웠던것 같다.


다시 어제로 돌아와서,

지하철역 거울에서 발견한 "평일 추리닝을 입은 나"는 여러가지 기억을 한번에 불러일으키는

성찰의 한 장면이였다.

또한 지금 가장 핫하게 회자되는 곳에 가면서도 추리닝을 입은 나를 보면서

진정한 금수저의 패션은 명품으로 치장된 트렌디한 패션이 아니라

편한대로 입을 수 있는 추리닝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내가 추리닝을 입어도 아무도 나에게 지적할 수 없고(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추리닝을 입고도 백화점 명품매장에 저벅저벅 들어가서 가방이나 시계를 보여달라고 할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금수저의 라이프인것을 어제 불현듯 깨달았다.


그리고 회사 다닐때엔 한번도 내가 평일 낮에 추리닝을 입고 돌아다닐거라고 상상 못했었는데

어제 새삼 내 안에 흐르는 아빠의 피를 확인했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아빠는 금수저셨고 나는 그렇진 않다는 거.


요즘은 조거팬츠라는둥 트레이닝 팬츠라는 둥 여러가지 말을 써서 추리닝을 표현하곤 하지만

어쨌든 금수저 패션의 최고봉은 추리닝인것 같다.

더 이상 그 자유로움을 설명할 수 있는 패션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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