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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May 22. 2024

어머니를 추모하며

인도네시아에 온 지 한 달쯤 되자 동생이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는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오신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1층의 가장 넓은 방을 드렸다. 당시 78세의 어머니는 집이 좋다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집 근처에는 풀장이 있어서 아내와 나는 종종 어머니를 모시고 수영을 하러 갔다. 어떤 때에는 배드민턴도 하였다.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석 달쯤 되자 어머니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혼자서 마음대로 다닐 수 없으니 이곳이 감옥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그립다고도 했다. 친구들에게 국제 전화로 통화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자카르타에 있는 한인교회 노인대학에도 보내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국에서 혼자 사시는 것보다는 여기가 나을 텐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곳으로 오시기 전에도 염려했던 일이었다. 어르신들이 자식 따라 외국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형제 중에서 유독 장남만 찾는 분이었기에 인도네시아로 모신 것이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인도네시아어도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힘드셨던지 곧 그만두시고 말았다. 의욕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이후에는 종종 우울해하셨다. 공연히 아내를 의심하고 미워했다. 심지어는 아내 편만 든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이러한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할 수 없이 서울에 사는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 

어머니는 청주에 살고 싶다고 해서 동생을 통해 집을 구해드렸다. 매일 아침 안부 전화를 드리고 방학 때마다 찾아뵙고 인사드렸으나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다가 4년 후인 2013년에 어머니를 다시 인도네시아로 모시고 왔다. 도저히 혼자 계셔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권하여 모시고 온 것이다. 이후 어머니는 한국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작정을 하고 오셨는지, 처음과는 달리 불평 없이 잘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다. 주무시다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근처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그 병원에서는 혈압이 너무 높아서 위험하니까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자카르타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자카르타에서 가장 좋다는 병원이라고 해서 갔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병원 의사는 혈압이 높으니까 MRI로 뇌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 후에는 머리에 혹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 같으니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자고 하였다. 수술비가 1억 루피아라고 했다. 나는 머리에 혹이 있는 것이 다리가 아픈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혹시 허리가 아파서 다리가 아픈 것 아니냐고도 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허리 수술하는 데 수술비가 5천만 루피아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병원을 불신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며칠 후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갔다. 서울대 병원 응급실은 만원이었다. 위급해 보이는 환자들도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기다리다가 아침에 겨우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았더니 허리 MRI 검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MRI 검사는 6개월 후에 가능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척추 전문 병원으로 갔다. 거기에서도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그런데 결론은 노환이라고 했다. 연세가 많아서 수술할 수 없으니 아플 때마다 약을 드시라고 했다. 어머니가 다니던 충북대 병원 주치의는 머리에 있는 혹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수술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국에 온 것이 후회될 정도로 허탈했다. 이후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 오신 후 아프시다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7년 어느 날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음식을 잘 드시지 못했다. 이후에는 약도 잘 삼키지 못했다. 며칠 후에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반둥에 있는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는 어머니에게 요도염, 당뇨, 고혈압이 있다고 했다. 그날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2주간 치료하더니 모든 것이 정상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눈을 잘 뜨지 못하고 주무시기만 했다. 2주 사이에 살이 많이 빠지셨다. 병원에서 당뇨 환자들이 먹는 우윳가루만 드시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의논 끝에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시고 가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어머니가 아사하실 것 같았다. 한국 병원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환자를 위한 영양 음식을 주는데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랴부랴 준비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수카르노하타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항공사 측에서는 휠체어에서 눈을 감고 계시는 어머니가 비행기 안에서 돌아가실까 봐 염려되었는지 탑승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카르타에 파견 나와 있는 항공사 부사장에게 사정했다. 병원에서 준 진단서를 보여주면서 의사 선생님이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으며 만일 어머니가 비행기 안에서 돌아가시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아내는 만약 어머니가 비행기를 못 타서 돌아가시게 되면 고소하겠다고도 했다. 그랬더니 부사장은 고민 끝에 탑승을 허락해 주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미리 불러놓은 구급차를 타고 예약해 놓은 공주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어머니는 탈진해서 그런지 매우 위중해 보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계시게 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1년 후 어머니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걷지는 못하셨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지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우리는 이후 어머니를 공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모셨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요양원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이후 잘 지내셨다. 2021년에는 구순 잔치를 요양원에서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우리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어서 요양원에 부탁드리고 준비한 구순 축하 동영상과 함께 선물을 보냈다. 요양원에서도 축하 행사 내용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주셨다. 기뻐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아쉽지만 감사했다.

그런데 2022년 8월 2일 오전 8시 41분에 어머니가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지난 6월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뵈었을 때는 웃기도 하시고 말씀도 잘 하셨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몸이 아프시다고 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심장비대, 뇌경색, 폐종양 등의 증세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이튿날부터는 말씀도 하시고 해서 조만간 퇴원할 수 있겠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가 귀국할 때까지는 살아 계시리라 믿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날 밤부터 증세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당일 항공권을 구입한 후 공항으로 갔다. 다음은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쓴 글의 일부 내용이다.  

신의주에서 태어나 12살 때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부산에 왔다가 삼팔선이 막히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촌 집에서 지내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였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34살의 나이에 혼자서 어린 3형제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장남인 나만을 의지하시던 어머니. 그래서 연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에까지 오셔서 같이 생활하셨던 어머니. 나와 배드민턴을 하면 100회 이상 쉬지 않고 공을 치시던 어머니. 80 중반의 나이에 나에게서 수영을 배우신 어머니. 3년 전 몸이 안 좋으셔서 한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이제 이승에서는 뵐 수 없는 어머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임종 시 곁을 지키지 못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에는 한국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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