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재독 철학가 한병철 님은 [피로사회]에서 현시대는 ‘신경증의 시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세균도 바이러스도 아닌, 우울증, ADHD, 소진증후군 등 정신과적 질환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우울증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020년 조사한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10명 중 4명이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치료를 받는 비율은 외국의 5%밖에 안된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을 마주하지 못하고 살았거나, 알고 있음에도 그저 ‘괜찮은 척’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척’ 살아가는 삶과 괜찮은 삶은 다릅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절대 죽지 않는다. 산채로 묻혀서 나중에 더 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프로이트의 말입니다. 감정은 그렇습니다. 괜찮은 척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일로 툭 하고 터져 나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렇게 감정은 감정의 주인이 알아봐 주고 달래주지 않으면 그렇게 폭주하게 됩니다.
흙탕물을 퍼서 올려보면 어떤가요? 뿌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안 보인다고 더 막 흔들면 어떻게 될까요? 더 뿌예져서 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흙탕물을 그대로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가라앉은 것은 가라앉고 떠오른 것은 떠오르면서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평소 우리의 마음은 살피지 않기 때문에 흙탕물과 같습니다. 흙탕물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 강점과 약점은 물론이고 아이, 배우자 모두의 강점, 약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만 남아 짜증과 화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짜증과 화는 마음을 들고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더 뿌옇게 만듭니다. 나를 제대로 보려면 그 흙탕물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래서 강점 strength와 만나기 전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감정 emotion입니다.
감정은 여러 자극이 들어오는 사는 중에는 인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습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루에 잠깐 5분씩이라도 자기의 마음을 들어다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자기 계발서에서 명상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러 육아서에서 아이들에게 반응을 하기 위해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다 그와 같습니다. 멈춰서 정성껏 들어다 보지 않으면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자꾸 들여다보고 말을 걸어주면 비로소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빼꼼 얼굴을 내밉니다.
신경의학과 전문의인 W. 휴. 미실다인 W.Hugh Missildine박사는 개인에게는 자아 두 개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부모의 생각, 감정, 행동, 태도 등을 유사하게 닮은 내면 부모 inner parent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한 자아의 내적 반응으로 형성된 내면 아이 inner child입니다. 어른 속에 존재하는 아이가 바로 내면 아이입니다. 내면 아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한 개인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내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나에게 붙어 지내는 나의 어린 시절입니다.
누구나 내면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밝고 천진난만한 내면 아이는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항상 갈구하는 내면 아이는 그것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늘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맵니다. 또 하나 내면 아이는 예고 없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잊고 살다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이유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맞닿뜨리는 상황이 내 안에서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면 원치 않은 육아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도 내 안의 감정 해결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좀 굼뜬 아이였습니다. 빠릿빠릿한 편도 아니어서 가끔은 못된 아이들이 표적이 되기도 했죠. 저희 어머니는 아마도 그런 제가 답답하기도, 걱정도 되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저에게 빠릿빠릿하게 행동하기를 주문하셨습니다. 전 굼뜬 내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치고 싶었지만 눈치 있고 약삭빠른 행동을 하려 하니 잘 되지도 않고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긴장 상태로 지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렇게 도드라지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낳자 내면 부모와 내면 아이가 고개를 듭니다. 아이 역시 저를 닮아 굼뜬 아이였습니다. 얘는 고집까지 엄청 센 굼뜬 아이였습니다. 더 강적을 만난 거죠. 아이의 굼뜬 행동에 반사적으로 내면 부모가 반응을 합니다. 얼른 앞으로 가서 받아. 앞쪽으로 앉아야지.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이런 말들로 주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서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챙기지 못하는 아이가 내심 속상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버팁니다. 오히려 타당한 이유로 저를 설득시켜버립니다.
유치원 버스를 탈 때도 남들보다 항상 늦게 제일 뒷자리에 타곤 했습니다. 셔틀버스에서 아이가 내리지 못하고 사망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해 여름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앞쪽으로 타라고 말을 합니다. 아이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원래대로 뒷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아이에게 왜 뒤로 가서 앉았냐고 물어봅니다.
“내가 앞자리에 먼저 앉아버리면 다른 친구가 힘들게 뒤로 가서 앉아야 하잖아. 먼저 탄 사람이 뒷자리부터 타야 다른 친구들이 타기 편하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대하는 소아치과의사라는 사람이 내 아이만 우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저보다 더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고요. 아이를 봅니다. 아이의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는 느리고 굼뜨지만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해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답답하지 않습니다. 답답했던 것은, 손해 볼까 걱정한 것은 엄마의 시선이었던 것입니다. 제 내면의 어린아이를 봅니다. 그 어린아이도 천천히 하고 싶었습니다. 그 아이도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코칭의 기법 중 “자기 바라보기 self distancing”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상태의 자기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을 문제나 상황과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소위 메타 뷰 view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문제를 바라보면 그때 비로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면 그 문제를 떠나보내거나 앞으로 나아갈 힘도 생깁니다. 내면 아이가 드디어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수양의 과정과 같습니다. 육아를 하지 않으면 몰랐을 나의 상처, 기억, 경험들이 불쑥불쑥 올라옵니다. 올라온다는 것은 알아봐 달라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것을 누르거나 외면하면 어디선가 터집니다. 그 어디서 가 우리 아이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있고 너 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부모가 우선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한 부모 안에서 행복한 아이가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