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비효율적인 건
'이 시간'입니다.
지금은 부서 회의 중이다. 나는 손에 펜을 쥔 채 눈을 감고 있다.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니 마치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이 회의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화인 [만종]에서 경건히 서있는 아낙네처럼 기도를 하고 있다. 끝을 모르는 이 삼천포 투어가 빨리 종료되길.
부서 회의 시간에 눈을 감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분이면 충분한 회의가 자유자재 삼천포 투어를 하며 30분, 1시간씩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난 눈을 감았다. 처음 눈을 감았을 때 '자는 거야?'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니요, 집중해서 들을려고요.'라고 답했다. 선배들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가 대하는 일본 바이어 중 의견을 말하다가 눈을 감는 분들이 있어서 그분들을 방패 삼아 어물쩍 넘어갔다.
눈을 감은 진짜 이유는 참여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시야를 차단하고 싶을 뿐. 업무와 관련해서 상황을 공유하고 필요한 말만 한다면 회의는 5-10분 내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한 명씩 돌아가서 말하다 보면 꼭 침입자가 생기고 침입자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꼭 배설해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가장 강력한 침입자는 선배도 후배도 아니고 Boss다. 업무상황을 공유하면 그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 업무에 대한 잔소리 + 잡썰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잔소리는 그래도 들을만하다. 고쳐야 할 점일 수도 있으니. 그런데 잡썰은 정말 듣기 힘들다. 분명 회계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끝에서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튀어나온다. 이러다 보니 내 차례가 끝나면 바로 눈을 감는다. '그렇지?' 하는 소리에만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도 내 차례를 끝내고 눈을 감았다. 예상대로 회의는 잔소리 공격, 오지랖 폭격을 지나 신세한탄 자폭까지 치달았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지만 삼천포 투어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쟁 중 일기를 쓰는 이순신 장군의 심정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Boss의 한마디가 내 평정심을 깼다. 접착제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던 눈꺼풀도 확 열렸다.
"지금 가장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게 뭐지?"
'지금 이 회의요!'라고 누가 소리쳤다. 하, 드디어 누군가 용기를 내어버렸구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전히 평온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 누구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난 소리다. 어떤 소리보다 강렬한 외침이지만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 공허한 외침....
"합시다. 스크럼."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애자일 방법론의 필수 요소로, 우리 회사 같은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다. 데일리 스크럼의 대원칙은 이렇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 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
서로의 작업 상황을 최소 단위로 공유하면서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다. 애자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스크럼이라면 이 모든 과정이 길어도 십오 분 이내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 조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십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이십 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삼십 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 장류진,『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작가가 IT업계에서 7년간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효율을 강조하는 애자일 스크럼도 아침 조회가 되어버린다. 이런 걸 보면 나만 당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조직이든 '효율성'을 강조하는데, 모든 조직의 아침 회의는 비슷한 풍경이다.
문득 궁금하다. 회의시간에 업무 이야기만 하는 회사가 지구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잡썰은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을 이용하시면 안 되는 건지. 꼭 일장연설하듯 사람들 모아놓고 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하면 재밌는지 정말... 궁금하다. 왜냐면 난 정말 재미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