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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Mar 10. 2021

너무하네 진짜

너무해도 너무한 일상

오늘 하루, 실화입니까?

손톱먹고 다른사람 되고 싶은 하루



오늘 하루, 실화냐



퍽, 소리에 잠이 깬다. 왼쪽 얼굴이 얼얼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작고 단단한 발바닥이 포개져 있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시계를 보니 7시 30분. 지각이다. 단전에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소리 지른다. “여보, 아들아 일어나!” 두 생명체는 응답이 없다. 응답없는 이들을 위해 커텐을 거세게 걷는다. 그제야 짜증을 내며 뒤척이는 생명체들.


큰 생명체를 화장실로 밀어넣고 작은 생명체를 안고 소파로 간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부둥거리며 유치원에 가야하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한다.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도 있고 새로운 것도 배우고 우리 00가 매우 똑똑해져. 사탕도 주고 비타민도 주잖아. 온갖 감언이설에도 절대 유치원에 안가겠다는 아이. 결국 최후통첩을 한다. 너 유치원 안가면 해달란거 아무것도 안해줘!


울상인 아이를 식탁위에 앉히고 사과를 깎고 빵을 자른다. 사과는 동그란 쟁반에, 빵은 나무도마 위에 잘라내니 아메리칸 스타일 브렉퍼스트는 커녕 조촐한 느낌만 난다. 빵을 보더니 잼을 발라달라는 아이. 펴발라줄 시간은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숟가락으로 움푹 퍼서 빵 옆에 덜어낸다.


"카톡"

나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한 부장은 항상 업무 카톡을 이 시간쯤 보내는데, 어김없이 카톡이 울려 확인하는 사이 아이가 포크로 장난치다가 갈아입힌 옷을 잼범벅으로 만든다. 순간 동공이 확장되고 콧구멍이 벌렁거리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시간만 늦어질 뿐. '이건 빵 부스러기 하나 흘린 것과 같은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듯 가볍게 건조대에서 새 옷을 걷어온다. 옷 갈아입기 싫다며 칭얼대는 애를 달래며 옷을 겨우 입혀놓으니 남편이 씻고 나온다. 샴푸요정처럼 수건으로 여유롭게 머리를 터는 남편이 식탁을 보며 울상이다. ‘내건 왜 없어?’ 아이에게 참을 인을 오백번 새겼던 인내는 남편의 한마디에 바로 폭발하고 만다, ‘같이 좀 먹어!’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는 애를 어거지로 유치원에 밀어넣고 남편과 함께 출근길에 오른다. 잠깐 숨 좀 돌리려고 인스타그램을에 접속하는데  남편이 조수석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준다. (이건 부부끼리만 알수 있는 분위기) 오케이 접수했음. 인스타그램을 끄고 포털 뉴스사이트에 들어가서 오늘의 뉴스를 몇 개 읊어준다. 집값폭등, 공무원비리, 해외 우익 망언 등등 거지같은 뉴스들을 굳이 입으로 옮겨주고나면 남편이 회사앞에 내려준다.


8시 56분. 엘리베이터가 안온다. 9시부터 본부장회의인데. 발을 동동 구르고 버튼을 계속 눌러도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겨우 탔더니 내 목적지 앞 모든 층에 정차한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닫힘버튼을 누른다. 도착시간 8시 59분. 휴 세이프.


"남대리, 왔어? 가자!"

거울 한번 볼 시간없이 회의실로 빨려들어간다. 결말없는 마라톤 회의 끝에 자리로 돌아오니 10시 40분. 메신저에는 불이 나있다. 업무요청하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 시답잖은 농담하는 사람. 가장 반가운 건 동기에게서 온 연락. ‘오늘 점심 기억하지?’      


좋아하는 동료들과 5분같은 1시간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니 예고없이 업체가 갑자기 방문한단다. 지난번에 업무가 지연된걸 굳이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안오셔도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고 해도 너무 죄송했다며 굳이 오시겠단다. 거의 다 왔다는데 안보면 무례인 것 같아 부장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부장은 시선을 피하며 혼자 다녀오라고 한다. 자기는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무슨 회의인지 뻔히 아는데 뭐? 휴. 하긴 나라도 가기 싫으니까. 심정을 모르는게 아니니 가장 효율적으로 혼자간다. 아, 그래도 서운하네 뭔가.


회사 1층 카페에 가니 움직이기만 해도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업체 부장이 앉아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정말 잠깐만 뵙고 가봐야해요’라고 말을 했음에도 그의 읍소와 어필은 끝나지 않았다. '아 왜 이렇게 말이많아 증말!'하고 테이블을 치며 일어나기 직전, 어떤 은혜로운 분이 업체부장에게 다급한 전화를 걸어와 속성으로 헤어진다. 잠시 숨을 돌리고 커피 한잔 하며 업무를 챙기고 있는데 귀여운 후배 한명이 올라와 보고서를 코칭해달라고 한다.  '나때는 말이야, 이렇게 알려주는 선배가 없었어'하고 거들먹거리니 약간 기분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왜때문에 아주 잠시 후배의 경멸하는 눈빛을 본 것 같다. 주요 일들을 쳐내고 언젠가 하긴 해야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밀린 잡무)를 리스트업 하고 있는데 이번엔 실장이 소집한다.


지난번 전략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업데이트 해야하는데, 기획부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며 담당도 아닌 우리 부장과 나를 부른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두서없이 펼쳐놓는다. 부장과 함께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데 도무지 속도를 따라갈수 없다. 이건 저희 R&R이 아니라서 기획부 담당자 돌아오면 인계하겠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할 줄 알았던 부장은 ‘언제까지 할까요?’라고 공손히 여쭙는다. 실장은 자신은 상당히 자애로운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해도 되는데 빨리해’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거의 퇴근시간.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것 같아 난감한 표정으로 부장을 쳐다보니 비폭력주의를 주창하는 간디처럼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일 이야기 하자’하며 나가버린다. 신발 한쪽을 떨어트리면 신발 한쪽도 마저 벗어놓고 간디를 (외모적으로) 닮은 그는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다. 그냥 갈까하다 타고난 노예근성 때문에 어느정도 자료를 찾아놓고 퇴근 준비를 한다. 내일은 열라게 보고서만 쓰겠네. 그래도 퇴근이니 다 잊자!하고 레드썬을 외친다. 그 때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 나 회식간다!”

뭐? 갑자기? 하고 되물으니 임원이 먹자해서 할수 없단다. 친목모임이면 가만 안두려했지만 남편도 사회생활하는 직장인이니 넘어간다. 다만 나중에 친목모임으로 들통나게 되면 진짜 유명을 달리하는 수가 있다. 지난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멜론차트를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혼자 퇴근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


하지만 그 조차 잠시. 집에 오자마자 시터는 우사인볼트가 바통터치하듯 빛의속도로 사라진다. 엄마를 반가워하는 아이를 보며 시름이 사라지는 건 잠시, 대강 샤워하고 나와서 빨리 자주면 좋으련만 아이가 오늘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놀이를 하고 싶단다. 잠시 갈등하다 결국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루종일 엄마아빠랑 떨어져있는 아이가 안쓰러운 마음에 젖먹던 힘까지 끄집어내서 같이 욕조에 들어가 물놀이를 해준다.


"오늘 뭐하고 놀았어?"하고 아이에게 물으니 조잘조잘 말해준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회사에서 뭐했어?" 손끝으로 튕기던 물방울이 눈에 들어갔나. 눈에서 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아이에겐 당차고 강한 엄마이고 싶은 맘에 아이언맨에 빙의한다. 글쎄, 엄마 회사에 타노스랑 치타우리들이 있는데 말이야. 타노스가 엄마를 너~무 괴롭혀서 엄마가 혼쭐을 내줬어. 엄마가 어떻게 혼쭐을 내줬어? 어떻게 하긴, 내 보고서를 받아라 휙휙~ 이렇게 했지. 총알을 날리는 시늉을 하는 엄마가 슈퍼히어로처럼 멋져보이는지 아니면 그냥 맞춰주는 건지 아이는 어쨌든 즐거워한다. 비록 현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꺄르르 웃는 아이를 보니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래 이 미소 보려고 널 낳았지. 사랑스러운 것.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루틴이 있어 1권만 들고오랬더니 작은 손으로 두꺼운 3권을 들고온다. 누가 살짝 밀면 기절할 것 같은 컨디션이지만 책을 읽어주는 건 무조건 좋은거니까 읽어달라할 때 많이 읽어주자는 생각에 다시 힘을 낸다. 방에 들어가 불을 끄니 이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빨간모자,토끼와 거북이,금도끼은도끼 등등 그동안 해줬던 이야기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그래, 내 새끼의 창의력을 위해서 새로운 이야기 해주겠어. 포털에 전래동화를 검색해서 도깨비감투와 손톱을 먹은 쥐 이야기를 들려준다. 손톱을 먹은 쥐가 가짜사람이 되어 진짜 행세를 하자 고양이를 풀어 가짜를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다. 야호! 육퇴!!


올레를 외치며 조심히 일어나 방문을 여는데 바깥에서 쿵!하는 소리가 난다. 쿵소리에 아이가 잠깐 뒤척인다. 하루의 노력이 이렇게 물거품이 될까 싶어 심장을 부여잡는데 다행이 아이는 깨지 않았다. 안방문을 닫고 나오니 거실에 한 생명체가 대자로 뻗어있다.


여보, 여보 일어나. 몸을 흔들어보지만 미동이 없다. 설마 죽었나?하는 생각에 뺨을 한번 때려본다. 미동도 없다. 몸을 더 세게 흔들다가 온 힘을 다해 팔 한쪽을 붙잡고 생선 뒤집듯 몸을 돌리니 그제야 “크으으응...”하는 신음소리 겸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아, 이 인간이 정말...      


저녁 11시. 분명 거실에서 넷플릭스 한편 때리고 자려고 했다. 거실은 술에 떡이 된 남편이 점령했고 갈곳은 부엌 식탁 뿐. 재테크에 폭망한 상태라 부동산 책이라도 보려고 하다가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해야하는 내가 싫어서 일단 흰 종이에 오늘 있었던 일을 마구 적어봤다.      


누군가의 손톱을 먹고 잠깐 다른 삶을 살수 있다면. 잠깐이라는 전제하에 갔다오면 안 될까. 진짜 나로서의 삶은 너무 너무 고단하니까.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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