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손은 엄지척 마음은 중지척
“이동 발령이 났다고요? 그것도 오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첫날. 다름은 자신의 부서가 바뀐걸 알았다.
원래 영업본부 소속이던 그녀는 회사에서 무덤으로 불리는 마케팅본부 인사이트부로 발령나있었다.
“아, 말도 안돼. 거기 평균나이 45세 이상일텐데.”
젊고 능력있는 사원으로 분류되던 그녀가 50대에 가까운 아저씨들만 모여있는 곳으로 가게됐다.
복직 일주일을 앞두고 미리 인사를 왔을 때만해도 그녀의 책상은 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책상자리에는 큰 복사기가 놓여져있다.
그녀의 짐은 복사기 옆에 조용히 구겨져있었다.
카트 위에 컴퓨터와 자료를 한가득 싣고 발령부서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다름.
<마케팅본부 인사이트부> 팻말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다름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부서 앞에 당도한 그녀는 컵라면 같기도 하고 진한 향수같기도 한 정체모를 냄새를 느꼈다.
이과장 “오우~오우~ 남대리. 잘해보자.”
변과장 “오랜만이야. 애기많이 컸어?”
남다름 “아...네.........윽.....”
다름에게 다가오며 악수를 청하는 두 과장들. 이과장의 입에서는 믹스커피와 담배쩐내가 환상적 콜라보를 뽐내고 있었고, 변과장의 명품 스웨터에서는 독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다름은 한손으로 코를 막고 한손으로는 그들과 악수했다. 두 과장들과 악수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눈앞이 샛노래진 다름.
진짜로 정신이 혼미해진건지 헷갈리는데 그녀 눈 앞에 노란 피케셔츠를 입은 곰같은 김과장이 서있다.
김과장 “남대리 왔어? 환영한다.”
남다름 “아.. 안녕하세....."
입으로 인사를 하면서 눈으로는 그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다름.
187cm의 큰키와 헬스로 다져진 우락부락한 몸. 신체조건은 좋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회사에서 유명한 패션테러리스트다.
그의 패션의 포인트는 피케셔츠 깃을 세워주는 것이다. 깃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자아도 무너진다.
컬러조합은 항상 상극의 보색조합이다. 오늘은 노란 피케셔츠와 연두색 면바지를 입고 왔다.
현미녹차처럼.
과장들과 인사를 마치고 빈자리를 찾아 앉는 다름. ‘아이고’하고 한숨을 쉰다.
그때, 다름의 한숨소리를 듣고 의자를 끌며 다가온 심만경 대리.
심대리 “오, 남대리 영어 잘하네?”
남다름 “네?”
심대리 “I go, 라고 했잖아. 하하하.”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다름. 예상치 못한 아재개그 공격에 방어력을 상실했다.
나이 40이 넘었는데도 만년대리인 심만경 대리와 최의성 대리도 이부서 소속이었다.
마부장 "오우~ 남대리 왔구나. 환영해!"
미소와 함께 두팔 벌리며 다름에게 다가오는 마윤식 부장. 서울대 출신 엘리트지만 회사 내 서울대생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서울대생이 왜 저러냐고.
그래도 본인의 상사가 될 사람이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다름.
순간 그녀의 눈에 마부장 피부에서 벗겨진 버짐가루가 포착된다.
눈가루가 점점 다름에게 다가오며 함박눈이 되가던 찰나, 어디선가 들리는 구원의 목소리.
"인사이트부 전원 본부장님 방으로 들어오세요!"
*
넓은 테이블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마케팅본부장. 백두산 호랑이도 그의 옆을 지나가면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
그의 이마에는 내천(川)이, 코밑에는 팔(八)자가 장가계 대협곡처럼 파여있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본부장은 엄청나게 화가 나있다.
다름은 본부장에게 복직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부서원들과 함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본부장 "준비를 대체 어떻게 하는거야?!"
부장 "그게 저...."
본부장 "일많고 사람없다고 징징대서 시장조사랑 대외행사만 맡겼는데도 이모양이야?"
마케팅본부에 업무가 떨어지면 서로서로 일을 안받기 위해 부장들은 눈치싸움을 한다.
그때 인사이트부 부장이 단골로 하는 말은 '부서에 사람이 없어서'다.
부서에 6명이나 있는데, 부장 조차도 자기 부서원을 사람취급 안하는 꼴.
본부장 "중요한 손님이라고 몇번 이야기 했지?"
부장 "네...몇십억 주문 받을수도 있다고......."
본부장 "그런데 이런거 하나 신경안써?!!"
문제는 이거였다. 중국의 큰손 대리상이 (주)세하웰니스의 맥주효모제품에 관심을 갖고, 먼저 회사쪽에 접촉을 해왔다.
중국 대리상은 선진화된 (주)세하웰니스의 공장과 서울 삼성역의 랜드마크인 (주)세하그룹의 내부를 견학하고 싶어했다.
워낙 중요한 손님이라 평소 인사이트부 업무에 관심이 없던 본부장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손님이 방문하기 전날, 본사건물 1층 회전문이 고장난 것이다.
출입문하나 고장난게 별일 아닐수도 있지만 대기업이 문하나 관리를 못한다는 건 신뢰도에 큰 타격이 올수있다.
항상 유비무환을 강조하는 본부장 성향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부장 "심대리! 회전문 업체에 전화해!”
심대리가 고개를 들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계속되는 본부장의 불호령은 마른하늘에 몰아치는 날벼락처럼 공간과 아재들의 마음을 조각조각 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부장과 아재과장들, 그리고 오늘 첫 출근한 다름은 몸둘바를 몰랐다.
5분 정도 지났을때 본부장실 문을 열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심대리.
본부장 "그래. 몇시에 온대?”
심대리 “아. 금방 온답니다. 곧 점심시간이니까요.”
회전문 수리하는 업체가 바로 온다니 다행히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다.
오늘 내로만 해결되면 되니까 모두들 긴장했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밝은 표정으로 공간을 얼어붙게 만드는 심대리의 한마디.
심대리 “본부장님. 기분 좋은 일 있으십니까?”
본부장 "무슨 소리야?"
심대리 “회 전문업체에 연락하라고 하셔서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서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심대리를 바라봤다.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눈치없는 심대리는 요즘 제철 방어가 얼마나 맛있는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멈춘 시공간 사이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본부장의 손에서 떠난 결재판뿐.
*
‘치익’
옥상정원에 앉아 밀키스캔 뚜껑을 시원하게 따서 벌컥벌컥 마시는 다름.
덤앤더머보다 더 멍청한 아재들과 일하게 된 현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시야에 젊은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게 보이고, 이제 자신이 젊은직원이 아닌 낡은직원으로 분류된 현실을 자각한다.
그때 젊은 그룹에서 한 여자직원이 다름에게 달려온다. 영업본부 동료였던 이세나.
이세나 “선배님!! 오셨어요!”
남다름 “세나야! 반갑다.”
얼싸안고 서로를 두드리는 두 사람.
둘만의 사연이 있었다.
*
2년전 신입사원 연수 중 멘토자격으로 연수원을 방문한 남다름.
그때 다름은 모회사인 (주)세하그룹 소속이었다. 입사동기 중 성적 1등을 차지했던 그녀는 그룹사 전체 Top부서인 미래전략실로 배정이 되었다.
일 잘하고 똑부러진 젊은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총애를 받았고, 미래인재 육성사원으로 선정되어 신입사원 멘토링에 참여했다.
모든 교육을 마친 후, 임원 및 멘토들과 모여 신입사원들과 간담회를 나누는 시간.
그때 다름의 테이블에는 모회사 임원과 다름, 세나를 포함한 신입사원들이 앉아있었다.
불편한 담소가 오고가던 중 60대에 가까운 임원이 테이블에서 유일한 여자 신입인 세나에게 밀착하며 입을 열었다.
임원 “세나씨, 남자친구 있나?”
이세나 “네? 없습니다.”
임원 “에이. 예쁜사람이 왜 남친이 없겠어.”
조용히 듣고 있던 다름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핸드폰을 꺼내 조심히 녹음버튼을 눌렀다.
임원 “우리회사 여직원들이 인상이 너무 쎄. 옆에 이 언니 봐봐. 어이. 좀 웃어봐.”
남다름 “하하. 이사님 많이 취하신거 같습니다.”
임원 “아냐, 안취했어. 세나씨. 여직원들이 왜 이렇게 인상이 쎈 줄 알아? 다 욕구불만이야.”
다름의 얼굴이 점점 홍당무가 되고 있었다.
임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세나만 그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임원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욕구를 잘 해소해야 돼. 남자친구 만들어서. 알지?”
이세나 “무슨 말씀인지 잘...”
임원 “(능글맞게 웃으면서) 후훗. 내가 알려줘?”
세나의 몸에 손을 대려는 임원. 다름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남다름 “저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름. 모두가 자기를 쳐다보는 걸 느꼈다.
녹취본을 들고 경찰서에 갈 것인가 그냥 앉을 것인가 고민하던 다름.
순진하게 자기를 쳐다보는 세나를 보며 그녀를 때묻게 하고싶지 않았다.
남다름 “노래..... 한자리 하겠습니다. 아하하하”
홍진영의 ‘엄지척’을 열청하는 다름.
오늘보다 내일을 약속하고 싶어요
꿈과 희망이 있어서 좋아요
평생토록 나만을 지켜준다 말해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엄지 엄지 척 엄지 엄지 척
자상하고 다정다감해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쳐요
임원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유난히 임원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속마음은 다른 손가락을 들고 싶었지만 정년퇴직이 목표인 다름은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임원은 다름이 노래를 열창하는 내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기회를 날렸으니.
그 일이 있은 후 다음주에 다름은 결혼했다.
신혼여행에 갔다 오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자회사 (주)세하웰니스로 전보됨을 알게 됐다.
연수를 마친 신입사원 세나도 (주)세하웰니스로 발령났다.
다름은 자신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모회사에서 밀려 자회사로 왔다고 생각하지만, 세나는 다름이 본인을 구해주려다 좌천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
이세나 “선배님. 진짜 보고싶었어요.”
남다름 “TV에서 걸그룹 보일때 니생각 나더라. 예쁜 우리 세나.”
세나는 특출나게 예쁜 외모는 아니지만 피부가 뽀얗고 메밀묵처럼 단단했다. 육아휴직 중에도 틈틈이 연락하고 아기용품도 선물해준 착한 후배.
남다름 “차경우가 잘해줘? 너의 사수라며.”
이세나 “경우선배는 뭐. 알아서 잘하셔서. 제가 잘 따라가야죠.”
세나가 좋은 선배를 만나길 바랬던 다름. 자신의 입사동기 차경우가 사수인걸 알게됐다. 실력있는 차경우지만 속을 알수없는 인간이라 세나가 걱정되는 다름.
남다름 “어려운 일 있음 이야기해. 그런데 내가 이런말 할 처지는 아니다. 나 우리회사의 무덤, 인사이트부로 발령났어.”
이세나 “맞아요. 오늘 아침에 발령뜬거 봤어요. 선배가 왜 그런부서에 간거에요?”
남다름 “몰라. 명분이 없겠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
이세나 “근데 지금 영업본부 분위기가 좀 이상해요. 본부장이 의전이나 아부를 좋아해서 다들 일은 제대로 안하고 본부장 꽁무니만 따라다녀요.”
남다름 “그래? 원래 안 그랬는데...”
이세나 “선배님. 저희 조만간 밥먹어요! 제가 상담 드릴것도 있구...”
남다름 “그래그래. 오늘은 복직 첫날이라 부서랑 점심 먹어야할 것 같아. 담에 봐^^”
*
12시 10분. 부서 아재들과 밥을 먹는데 불과 10분 걸렸다.
예전에는 남자직원들과 밥먹는 속도가 맞추기 힘들었는데 애엄마 내공이 생겨서인지 5분만에 밥먹는건 일도 아니었다.
남다름 “커피는 제가 살게요. 스타벅스 가시죠.”
마부장 “아니야. 내가 스타벅스에 준하는 맛있는 커피를 알고 있지.”
남다름 “근처에 좋은 카페 생겼나요?”
마부장 “아니, 믹타벅스라고. 식후에는 믹스가 최고야.”
다름은 복직 첫날이니 조용히 따라가기로 한다. 실은 진한 아메리카노가 땡겼는데.
아재들을 따라 사무실 건물로 다시 들어가는데 노란 학교버스가 다름의 눈에 들어왔다.
노란 교복을 입은 한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고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반겨준다.
아이는 아주머니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가방만 건네주고 먼저 가버린다.
그런 아이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는 아주머니.
누구나 알수 있다.
아주머니는 엄마가 아니라는 것.
남다름 “우리 민준이는 잘 있나.”
*
어린이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있는 아기들의 모습.
젊은 엄마들 사이에 모피코트를 걸친 멋쟁이 할머니가 보인다.
음악에 맞춰 모두가 함께 율동하는데 주변 엄마들보다 한 박자씩 늦은 할머니의 모습.
*
오후 업무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는 다름.
아직 업무가 정해지지 않아서 컴퓨터 안에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는 파일을 정리한다.
그때 울리는 전화벨소리.
“따르릉~ 따르릉~~따르릉~~~”
복직첫날이라 업무관련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어려워 다름은 전화를 받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있는 아재들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벨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아직 돌아오지 않는 부장님 자리.
다름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든다.
남다름 "네. 영업....아니 인사이트부 남다름입..."
정체불명의여자 “여보세요? 너 누구야?"
남다름 "네? 저는..."
정체불명의여자 “뭐하는 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