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세상에 이런일이
삼성역 글라스타워 뒤에 있는 허름한 상가건물.
3층에 위치한 한의원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아아악!”
남다름 “아파!!! 너무 아파!”
남보다 “좀 참아. 이 기지배야.”
기보배가 활을 당기듯 침을 뒤로 뺐다가 다름의 정수리에 명중시키는 남보다 선생. 다름의 친언니.
남보다 뛰어난 침술로 명성이 자자하다. 환자들 사이에서 ‘갓보다’로 불린다.
남다름 “악.(침맞는 소리) 엄마 고생하는건 아는데, 너무 쌀쌀맞아.”
남보다 “그래? 나랑 통화할 땐 안 그러던데.”
남다름 “집도착해서 엄마한테 인사하려는데 바로 도망가듯 가버리더라.”
다름이 퇴근하고 오면 뒤도 안돌아보고 집에 돌아가기 바쁜 친정엄마.
돌봐주는 건 고맙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드는건 어쩔수 없다.
남보다 “엄마가 민준이 하원 몇시에 시키지?”
남다름 “3~4시쯤?”
남보다 “뭐? 어린이집 7시까지 하는 거 아냐?”
남다름 “원래는 그래야하는데, 그 시간되면 남은 애가 없어.”
남보다 “전업주부가 많은건가?”
남다름 “그런건 아닌데. 워킹맘이던 전업이던 자기애만 남아있는걸 걱정하다보니 그리된거지. 서로 피해주는 상황이야.”
복직 전 구청에 볼일이 있어 5시쯤 민준이를 데려간 적이 있던 다름.
혼자 덩그러니 어린이집에 남아있던 민준이를 보고 그 이후 무조건 3시에 하원시킨다.
남보다 “너가 본보기로 민준이 7시까지 둬봐.”
남다름 “어후 어떻게 그래. 선생님들이 민준이한테 해꼬지하면 어떡해.”
남보다 “에라이. 이러면 애를 어떻게 키우냐?.”
남다름 “몰라. 언니 결혼 절대 하지마. 물론 못하는 거지만.”
“아아아아아악!”
대침이 다름의 허리를 관통했다.
***
연말연휴 다름의 집.
세사람이 살기에 적당히 작은 아파트.
민준이 낮잠자는 사이
함께 TV를 보면서 빨래를 개고 있는 다름과 남편.
같이 <세상에 이런일이>을 보고 있다.
남편 “헐! 아내를 원숭이로 착각해서 총을 쐈다고?”
다름 “어머. 말레이시아에서 생긴 일이네.”
남편 “마누라랑 원숭이를 헷갈리는 게 말이 돼?”
다름 “서로 얼굴을 자주 못 봤나보지.”
다름의 말에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이 두 사람도 주중에 거의 얼굴을 못 본다.
한국에 살아서 다행인건지.
남편 “다른 거 보자. 공부할 겸 법률TV보자.”
다름 “어? 저분은?”
법률TV에 나오는 송민교 변호사.
6개월 전 차경우와 결혼한 미녀변호사다.
남편 “이야. 송민교 나오네. 나랑 학교 다닐 때 장난 아니었지. 송민교는 치마입고 수업 들어오면 무조건 A+줬어.”
다름 “어후. 어떻게 치마입었다고 A+을 받아.”
남편 “진짜야. 학생, 교수, 교직원을 불문하고 쟤랑 잘해보려 난리였어.”
다름 “자기도 그중에 하나야?”
옆을 보니 이미 없는 남편.
개어진 빨래를 정리하는 척 방으로 숨어버린다.
다름 “아직 눈치는 살아있네.”
***
성수동에 있는 '인테그럴' 회의실 안.
이 회사는 마케팅리서치를 전문적으로 한다.
“안녕하세요!”
인테그럴의 구대표와의 첫만남.
김과장 “오우~구대표. 이제 나에게서 벗어나겠어. 인수인계 하러왔어.”
구대표 “아이고. 김과장님 왜 그러세요. 벗어나긴요. 제가 은혜를 많이 입었죠.”
김과장 “은혜는 무슨 크하하하.”
남다름 “안녕하세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안경 속에 축 쳐진 눈이 다름을 그윽하게 본다.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이지만 눈빛만은 날카롭다.
구대표 “아이고. 새로오셨다는 분이군요.”
남다름 “네. 남다름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사회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업체가 작성한 보고서를 훑어보는 다름.
김과장은 회의실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중.
다름이 보고서를 다 읽는데는 5분 남짓 걸렸다.
남다름 “음... 다 아는 내용이네요.”
구대표 “네?”
남다름 “세하웰니스 대표제품 <가득찬 세상>은 ‘남성탈모’시장점유율 1위지만 높은 가격대로 인해 중산층 이상 고객만 접근가능하다는 점이 위협요소다...... 이건 늘 보던 내용같은데...”
당황한 듯한 구대표. 안경을 고쳐쓴다.
남다름 “마지막 제안에 ‘유창기획’에 광고를 대행하라는 추천까지 있네요?”
구대표 “업계 경험상 이런 타깃의 광고를 잘하는 업체를 추천 해드리는거죠.”
남다름 “음... 거기 광고 잘 못 만드는 것 같던데. 그리고 이전과 같은 보고서를 받아볼거면 저희가 굳이 돈들여서 조사한 보람이...... 아, 제가 따지는 건 아니고요. 저희 본부장님이 워낙 디테일하신 분이라 이렇게 물어보실 것 같아서요. 이것 말고 새로운 내용은 없나요?”
계속 웃는 인상이던 구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다름도 구대표의 표정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마케팅본부장을 실망시키고 싶지않았다.
구대표 “그럼 대리님이 한번 의견을 내보세요. 세하웰니스는 어린 대리들 목소리가 크던데.”
다름은 피부로 느꼈다.
‘이놈이 나를 디스하고 있구나.’
더 이상 대화가 수월하지 않을걸 느낀 다름.
남다름 “일단 여기까지 하고요. 조사 끝내셨다니 견적서 보여주시죠.”
다시 밝은 표정으로 서류를 내미는 구대표.
이번엔 서류를 받아든 다름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구대표 “잘 못된 게 있나요?”
남다름 "음... 이런 견적서는 처음 보네요. 조사에 대한 세부내역도 없고 단가도 없고 총 금액만 있는데.“
구대표 “아하하하. 남대리님. 복직하시고 약간 감이 떨어지셨나 봐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구대표.
다름은 어안이 벙벙하다.
자신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 구대표.
남다름 “저희 초면 아닌가요?”
구대표 “제가 세하랑 오래 거래해서 정보통이 좀 있습니다.”
은근히 무시하고 협박하는 듯한 구대표.
숨겨놓은 승부근성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다름.
***
회사로 복귀하는 길.
기분이 찜찜한 다름.
남다름 “과장님. 원래 견적서에 총액만 있어요?”
김과장 “견적서에 총액만 적혀있어?”
전 담당자가 이런 사람이라는 게 이럴 때 너무 슬프다.
남다름 “네. 총액만 달랑 써져있는데 어떤 식으로 조사를 했는지 단가가 얼만지 하나도 없어서요. 이 허술한 조사 보고서에 돈을 줘야하는 거에요?”
김과장 “에이. 깊게 생각하지마. 알려할수록 머리만 아파. 우리랑 저 업체랑 거래 10년 넘게했고 그동안 수십명이 담당했었어.”
알려고 할수록 머리가 아픈 게 일인 건 맞다.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다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데 두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린다.
“세하그룹의 미래, 세하웰니스! 서울본사 오늘 신년회합니다.”
***
세하웰니스 신년회. 꽤 비싸보이는 일식집이다.
2018년 세하그룹의 미래로 선정되어 신년회 비용도 넉넉히 지원되는 중.
초반에 밥값을 충분히 주고 나중에 밥값 못하면 때리는 전략.
바글바글한 식당 안에는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자는 가뭄에 콩나듯 있지만 확실히 눈에 띈다.
영업본부장 주변에 앉아있는 공민우, 차경우, 이세나.
뭐가 저렇게 즐거운지 깔깔대고 있다.
마부장 “재문이! 다름이! 어서와!”
만취한 마부장이 식당에 방금 들어온 김과장과 다름을 불렀다.
영업 쪽에 슬그머니 앉고 싶었지만 어쩔수 없이 부서쪽으로 가는 다름.
마부장 “어땠어? 구대표 말 잘 들어?”
김과장 “아유. 아주 잘 듣죠. 제가 따끔하게 한마디 해놨어요. 다름이가 정리만 하면됩니다.”
회의하는 내내 밖에서 노닥거린 주제에.
다름은 소주잔에 술을 붓는다.
이과장 “다름이 너무 초반부터 달리는 거 아냐?”
최대리 “둘째 가졌으면 어떡할라 그래.”
‘둘째’라는 단어에 멈칫한 다름.
그때 고성을 지르는 마부장.
마부장 “야~!재수없는 소리하지마. 내가 다름이 얼마나 힘들게 데려왔는데!”
이건 무슨 소리임.
다름이 눈을 크게 뜨고 마부장을 노려봤다.
마부장 “영업에서 다름이를 안받는다고 해서 내가 잽싸게 데려왔어. 전략이나 연구기획실에서 다름이 달라고 난리였다고. 그래서 내가! 행패 좀 부렸어!!”
‘당신의 만행으로 내 인생이 지금 지옥행인데,’
다름은 중얼거렸다.
마부장 “둘째는 가지면 안돼! 컥... 나처럼 돼!! 막 사람이 얽매여!! 이것봐 또 와이프가 전화해!!”
울리는 전화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주정 부리는 마부장.
그 모습을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아재들 사이에 굳은 한 사람.
남다름 “걱정마세요. 전혀 생각없으니.”
소주를 원샷하는 다름. 술이 쓰다.
이렇게 가족계획까지 신경써주는 회사.
고마워 눈물이 날지경.
시야를 돌리니 인사부 아름이가 눈에 들어온다.
마케팅본부장 옆에 불편하게 앉아있는 한아름.
회식하면 꼭 제일 예쁜 여직원을 어른들 옆에 앉혀놓는다.
격 떨어지는 회식문화를 대한민국 대기업이 선도하는 중.
착하고 밝은 아름이지만 조금 불편해 보인다.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부장이나 나이 많은 과장들이다.
소주잔을 들고 아름 옆으로 가는 다름.
남다름 “아름아.”
한아름 “어! 언니 왔어?”
둘이 잠시 담소를 나누는 사이, 한아름의 핸드폰이 울린다.
메시지를 읽은 아름의 표정이 밝아지고, 기쁜목소리로 외친다.
한아름 “언니! 대박. 동엽씨 공기업 붙었대.”
남다름 “정말? 너무 축하해!!”
아름을 얼싸안는 다름. 얼마나 고생한지 아니까.
한아름 “아, 드디어 나도 웨딩드레스 입는건가. 언니 나 너무 떨려.”
남다름 “축하해 진짜. 너 너무 예쁘겠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갑자기 다름과 아름 앞에 나타난 남자.
차경우다. 동기지만 친숙함이 좀 떨어지는 야망남.
차경우 “왜 이렇게 기분들이 좋아?”
남다름 “경우야. 오랜만. 신혼은 어때.”
차경우 “신혼? 서로 얼굴 잘 못보고 살아.”
갑자기 <세상에 이런일이>의 말레이시아 부부가 생각난 다름.
그 사건을 말해주려다말고 경우의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
남다름 “주말에 TV보는데 민교씨 나오더라.”
한아름 “미인이시잖아. 경우오빠 잘해야겠어.”
남다름 “그래. 너 맨날 야근하더라. 일찍 좀 가.”
괜히 매일 야근하는 남편이 생각나서 더 강한 어조로 말하는 다름.
대강 대답하고 건배제의하는 경우. 분위기가 차차 무르익을 무렵.
공민우 “여러분! 119운동 아시죠? 회식은 최소 1일 전에 공지, 1차만 하고, 9시전에 파한다! 회식 마무리하겠습니다!”
볼멘소리와 함성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
“2차 갈사람 갑시다!”
마케팅본부장, 영업본부장이 떠나고 나서 무리별로 헤어지는 사람들.
다름은 종종 걸음으로 삼성역을 향해 달려간다.
엄마를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을 아기를 위해.
경보로 걸어가는 다름옆에 따라붙는 한사람.
공민우 “야. 같이가자.”
남다름 “맞다. 선배도 2호선 패밀리죠.”
연초부터 한파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걸어가는 두 사람.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다름에게 툭 질문을 던지는 공민우.
공민우 “서운해?”
남다름 “네? 뭐가요.”
공민우 “영업으로 복귀 못한 거.”
서운하지만 다름이 할수 있는 건 없었다.
조직에서 개인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 조직이니까.
남다름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까, 잊혀진 게 당연한 거겠죠.”
공민우 “오~ 남다름. 변했다? 예전 같으면 열 내며 화냈을 것 같은데.”
남다름 “30대라서 에너지가 부족하네요.”
공민우와 같이 일하던 시절 다름은 열정적이었다.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것 같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버림받았다는 생각 뿐이다.
남다름 "아 뭔가, 남자한테 차인기분이에요."
공민우 "왜 이래. 안 차여본 사람처럼."
남다름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가려고 예쁘게 차려입고 갔는데, 그 사람은 날 기다리지 않았던거지."
깨닫지 못했지만 회사에 열정을 쏟았던만큼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공민우 "좀만 기다려. 어차피 조직개편 할거야. 그때까지 좀 참고 있어. 워라밸 잘하고."
남다름 "네... 감사해요."
지하철 역사를 들어가며 지갑을 꺼내려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는 다름.
남다름 “선배 먼저 가세요. 저 술집에 지갑을 놓고 온거 같아요.”
다급하게 술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다름.
다행히 지갑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장면.
취한 남자의 어깨에 여자가 수줍게 기대고 있다.
남자의 손을 만지고 있는 한 여자.
여자와 눈이 마주치려는 찰나,
뒤돌아서는 다름.
심장이 쿵쾅거린다.
나지막히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남다름 “세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