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목적이 이끄는 삶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감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다름.
감사실을 방문한 건 4년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감사과장이 앉아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기계적인 사람.
감사과장 "앉으세요."
남다름 "네...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감사과장 "성희롱 사건입니다."
남다름 "성희롱이요?"
기억력을 풀가동시키는 다름.
성희롱에 관련된 일이 있었는지 돌아본다.
보통 성희롱은 나이든 사람이 어린사람에게 하는 일이 많은데.
최근에 다름이 만난 어린 사람....
‘어다름씨?’
웃는 민규가 떠오른다.
‘윽!’하며 얼굴을 감싸쥐는 다름.
‘젊은 총각한테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나도 모르게 손을 스쳤나? 눈빛이 음흉했나?’
성희롱의 기준은 상대방이 성적수치감을 느꼈는지 여부다.
‘민규씨가 신고했나?’
별별 생각이 드는 그녀.
남다름 "어..."
감사과장 "짐작 가는 사건이 있으시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감사과장.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에 반짝이는 이마.
취조실에 있는 형광등 같다.
남다름 "아...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감사과장 "목격자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남다름 "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린 다름.
민규와 야외카페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감사과장 "앉으세요. 언제부터 알던 사이죠?"
남다름 "아... 안지 얼마 안됐는데..."
감사과장 "11년도 입사... 동기 아닌가요?"
다름은 대상이 틀렸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입사동기라면 민규가 아니었다.
남다름 "누구...말씀하시는 건지?"
감사과장 "지금 한아름씨 말하는 건데, 아니에요?"
남다름 "아름이요? 아름이가 왜요?"
감사과장 "며칠 전 회식하셨죠. 그때 마케팅본부장이 한아름씨 몸에 터치하거나 성적 농담하는 걸 봤나요?"
어린 남자와 늙은 여자가 아니라 어린 여자와 늙은 남자였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다름.
그런데 마본과 아름이라니.
남다름 "그날 같은 테이블에는 있었는데, 특별한 행동은 기억이 안나는데요."
감사과장 "남다름씨가 한아름씨와 가장 가까이 있었다고, 잘 알거라고 하시던데."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다름. 남친의 취업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모습밖에 기억이 안나는데.
남다름 "얼마 전인데, 특별한 건 기억이 안나네요."
감사과장 "술자리라 시끌벅적해서 잘 안보이거나 안들렸을 수도 있죠. 혹시 기억나는 거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남다름 "네..."
마음약한 아름이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다름.
이제부터라도 꽃길만 걷길 바랬는데 맘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감사과장 "그런데, 아까는 무슨말씀 하신거에요?"
남다름 "네?"
감사과장 "안지 얼마 안된... 그런말씀 하신 거 같은데..."
남다름 "아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과장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는 것 아시죠? 항상 유의하십시오."
"항상 유의하십시오."
감사과장이 항상 하는 말이다.
세하그룹 뇌물사건 이전부터 세하그룹은 감사실을 독립기관으로 운영해왔다.
임원이든 대단한 뒷배경을 가진 직원이든 감사실에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다. 아무리 대단한 윗사람을 모시고 있어도 한번 잡히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정말로 항상 유의해야하는 곳.
감사실 문을 닫고 나오는 다름.
괜히 찝찝하다.
‘바스락’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무엇인가 잡힌다.
"아, 맞다!"
*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날, 세하그룹 옥상정원.
날씨와 상반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공민우 "다름, 이리와. 감사실은 왜 불렀대?."
남다름 "아, 별거 아녜요. 어떻게 된거야?"
팔짱을 끼고 뾰루퉁한 표정으로 있는 세나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경우.
차경우 "몇 번을 말하니. 아니라고!"
이세나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거에요?"
남다름 "무슨 일이야. 차근차근 말해봐."
사이가 좋더니 갑자기 견원지간이 된 두사람.
이세나 "선배님. 제가 아까 드린 봉투 열어보세요."
감사실에 불려가기 전 세나가 필사적으로 전달해주려던 봉투.
다름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묵직한 봉투.
이세나 "저희 거래처중에 슈퍼로 유통하는 중간업체가 있어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져서 직원들 다 나가고 장사장님이 어렵게 운영하시는데, 오늘 장사장님이 경우선배한테 봉투를 건네주시는걸 봤어요. 뒷돈 받으시는 거 같아요."
차경우 "아니야! 대체 왜 내말은 하나도 믿지 않는거야?"
이세나 "선배님 말을 어떻게 믿어요?"
차경우 "...."
다름은 이 상황이 너무 낯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고 못사는 연인같던 두 사람인데. 갑자기 파국이 된 이유가 뭘까.
손에 들려있던 봉투을 내려다보는 다름.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 있던 내용물을 꺼낸다.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다름과 민우.
남다름 "이건..."
공민우 "차경우...너..."
봉투에 들어있던건 돈이 아니었다.
남다름 "혼인...증명서?"
또 온갖 잡생각이 들려는 찰나,
경우가 치고 들어온다.
차경우 "하... 정말 이런 거까지 알려져야하나. 장사장님 오랜 미혼생활을 청산하시고 베트남 여자 분이랑 결혼하시는데, 증인을 서달라고 하셔서 해드렸어. 혼인증명서 발급 잘됐다고 인사하러 오신 거였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사단이야?"
남다름 "뭐? 그게 무슨말이야?"
공민우 "장사장님 나이 50되도록 싱글이셨잖아. 베트남분이랑 결혼하는거야?"
차경우 "네. 너무 외로우시다고. 남은여생은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음 한다고... 그런데 국제결혼 절차가 복잡한가봐요. 어쨌든 증인이 필요하대서 해드렸습니다. 저도 회사 오래 다닐거니까 그런거 하나씩 해드리면 나중에 좋은일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긴. 신입사원때부터 세하그룹 임원이 되는게 꿈이라는 경우.
그런 사람이 거래처에 푼돈을 받아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되는 일을 할리가 없다.
남다름 "그런데 세나는 왜..."
공민우 "세나는 아직 오해 안 풀린 거 같은데?"
세나를 동시에 쳐다보는 다름과 민우.
여전히 팔짱을 끼고 경우를 노려보는 세나.
이세나 "저는 경우선배 말 못믿겠어요. 얼마 전에 우연히 경우선배 메일을 봤는데...."
*
몇주 전, 차경우가 전화를 하며 자리를 뜬 사이, 가위를 찾다가 경우의 모니터를 본 세나.
"이번에 OEM업체를 바꿀거에요. 평가서 미리 보내드릴테니 준비 잘하세요."
그 아래 문장을 보고 놀란 세나.
"삼촌을 존경하는 경우 드림."
*
이세나 "잘 돌아가고 있는 업체를 바꾸고 자기 삼촌회사를 끼우려고 한거죠."
남다름 "차경우, 정말이야?"
고개를 숙이는 경우.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연다.
차경우 "그래. 맞긴 맞아. 그런데 오해야. 다름이 너도 알겠지만 우리 OEM 업체들 제조단가가 너무 높잖아.
그런데 명절 때 삼촌에게 이런 이야기했더니 삼촌네 회사는 더 낮은 단가에서 제조가 가능하다는거야. 그래서 괜찮겠다싶었던 거야. 무조건 끌어들인게 아니라고."
이세나 "지금 회사 돈으로 가족사업 하시려는 거 아니에요? 제가 메일 본거 알고 당황하시던데."
차경우 "너 말이 심하다?"
이세나 “제가 선배님 성격은 좀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도덕성은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경우 “내 성격이 뭐 어때서?”
이세나 “물어봐도 잘 알려주지도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친절해지시고.”
경우의 치부를 알게된 세나.
입막음 하기 위해 세나에게 친절했던 경우.
그동안 갑자기 친해졌다싶었던게 이런 이유였다.
점점 격해지는 두 사람.
남다름 "잠시만 잠시만, 진정해봐. 차경우, 목적이 뭐였는데."
차경우 "나의 목적?"
남다름 "응. 삼촌회사 돈 벌게 해줄거 아니면, 너의 목적이 뭐야."
입신양명을 꿈꾸는 경우가 목적없이 무언가를 할 리가 없다.
차경우 “하... 솔직히 말해?”
남다름 “지금 솔직히 말 안하면 내가 방금 갔다온 곳에 너도 갈거야.”
감사실 갔다온거 알지? 라는 눈빛을 보내는 다름.
잠시 망설이던 경우입에서 뜻밖에 단어가 튀어나온다.
"포상과 승진."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틈을 깨고 이어가는 경우.
차경우 "올해부터 특별승진 제도 생겼어. 대리승진이 늦어서 과장승진은 좀 늦겠지만 실적이 있으면 특진대상이 된다고 해서.
단가 낮춰서 영업이익 올라가게 하면, 포상도 받고 포상이 크면 특진해줄거 아냐."
"푸하하하핫"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다름.
멍하니 다름을 쳐다보는 세 사람.
남다름 "고작... 그거였어?"
차경우 "고작이라고? 회사원에게 포상과 승진아니면 목적이 뭐가 더있어?"
남다름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승진이 뭐라고."
차경우 "넌 모르겠지."
눈을 치켜뜨는 경우.
남다름 "뭘 몰라."
차경우 "승진누락자의 슬픔을."
모회사 소속으로 동기중 가장 먼저 승진한 다름.
처음부터 자회사에 발령나 겨우 승진한 경우.
승진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공민우가 입을 연다.
공민우 "애들아. 이제 그만하자. 오해는 풀린 거 같은데."
이세나 "오해가 풀렸어요? 아직 아닌거 같은데요."
공민우 "지금 경우의 혐의는 삼촌회사를 끌어 들일려고 했다는 거잖아. 그런데 회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그동안 자기 가족들이랑 이 회사랑 엮어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줄 알아? 내부 프로세스상 업체 하나 선정하려면 제조,영업,연구원,전략실 최종적으로 감사실허락까지 받아야해. 감사실에서 그 회사가 경우네 삼촌거라는걸 모를것 같아? 다 알아. 경우네 삼촌네가 얼마나 실력이 좋으신지 모르지만, 실력이 있고 회사의 이익을 보장해준다면 회사입장에서도 고마운거지."
힘없이 앉아있는 경우를 일으켜 세우는 민우.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간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공민우.
공민우 "너네들 참 정의롭다. 퇴근이나 해. 오늘도 워라밸!"
축 쳐진 경우를 토닥이며 걸어가는 민우.
그 두 사람을 힘없이 보는 세나와 다름.
이세나 "뭐야. 정말... 그럼 오해인건가..."
조용히 세나에게 다가가는 다름.
남다름 "세나야. 그런데... "
이세나 "선배님 왜요?"
남다름 "아니... 나는 너네가 사이가 좋길래 막.. 사귀는줄 알았잖아. 후훗."
인상을 팍 쓰는 세나.
이세나 "어머 선배님! 제가 뭐가 좋다고 저런 유부남에 아저씨를..."
남다름 "아니 사실 저번 회식 때 너가 경우한테 붙어있는걸 봤거든..."
이세나 "회식때요? 아,,, 자꾸 의심가는 행동을 하길래 누구랑 통화하는지 좀 지켜봤어요."
남다름 "약간 스킨십 하는거 같아서 나 놀랐거든."
이세나 "스킨십이요? 음... 좀 제가 의욕이 앞서서 그랬었나봐요."
세나는 생각보다 불도저 같은 여자였다.
한번 의심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끝을 봐야하는.
씩씩한 아가씨가 다시 입을 연다.
이세나 "선배님, 요즘 여자들도 20대 좋아해요. "
남다름 "아하하.... 그렇지?"
‘나도 그래’라고 대답할뻔한 다름.
어색한 미소를 띄고있는데 문자가 울린다.
"띵동"
민준이 어린이집에서 온 문자다.
원장 "민준어머니~ 민준이가 좀 상처가 났어요. 집에가면 살펴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