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엄마, 우리집 망했어요?
개포동 어느 오래된 아파트.
엄마로 보이는 여자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
짐을 풀던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와 조심히 입을 연다.
아이 “엄마...”
엄마 “응?”
아이 “우리집 망했어요?”
엄마 “무슨 말이야?”
아이 “집이 갑자기 좁아져서요.”
갑자기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엄마.
엄마 “하은아. 우리 잘 되서 이집에 온 거야.”
아이 “이렇게 오래된 아파트에요?”
엄마 “응. 서울에서는 이런 아파트가 진짜 부자들이 사는 곳이야.”
아이 “말도 안돼요. 문이 삐그덕 거리는데...”
아이를 귀엽게 쳐다보던 엄마가 갑자기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다.
엄마 “하은아. 정신 바짝 차려야돼. 이제 넓은 집도, 내니도, 청소아주머니도, 강아지가 뛰놀던 마당은 없어.”
아이가 갸우뚱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한숨쉬듯 한 단어를 내뱉는 여자.
엄마 “아빠도.”
*
영업기획부 풍경.
신명나게 타이핑을 치는 공민우가 보인다.
룰루랄라하던 공민우, 모니터 속에서 어떤 곳을 클릭한다.
파일이 열리고, 표정이 굳는 그.
영업기획부 전원 “헐!”
*
마케팅인사이트부 풍경.
최대리 “헐! 전미영 법인장 발령났네!”
변과장 “뭐? 전법인장 발령?”
이과장 “미국법인장 전미영?”
부산한 분위기 속에 나직한 목소리.
김과장 “2013년에 나갔으니 들어올 때가 됐지.”
전미영 법인장은 김과장과 동기다.
동기인데 누구는 법인장이고 누구는 과장인 상황.
최대리 “법인장님 영업기획부 부장으로 오는거 알고 계셨어요?”
김과장 “알고 있었지. 나랑 미영이는 특별하잖아.”
이과장 “과장,차장 제일 일찍 달더니 이제 전부장이네! 대단하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한마디하는 김과장.
김과장 “동시에 전부인이기도 하고.”
변과장 “전부인? 그게 무슨 말이야?”
김과장 “전부인 몰라? 앞 전, 前부인.”
*
계단앞에 서있는 다름과 아름.
아름의 말에 벙쪄있는 다름.
다름 “당했대? 당했어가 아니고?”
아름 “응. 내가 성추행을 당했대.”
다름 “그럼 너는 피해자가 아니라는거야?”
아름 “그날 똑똑히 기억해. 저녁에 동엽씨 만나기로 해서 술을 안먹었거든. 마케팅본부장님 옆에 내내 있었지만 전혀 그런거 없었어. 심지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역시 다름이 생각한 대로였다.
마케팅본부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다름 “그런데 누가...신고한거지?”
아름 “모르겠어. 목격자들이 신고했다는데.”
다름 “사실 나도 감사실 다녀왔거든. 목격자들이 내가 니 옆에 있었대서 참고인격으로 조사받았어.”
아름 “어머? 그래?”
다름 “응. 그런데 무슨 성범죄 조사가 피해자부터 조사를 안하고 목격인부터 조사를 하지.”
아름 “그러게 좀 이상하다.”
두사람이 턱을 괴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계단복도 사이에 있는 문을 쾅 열고 나타난다.
다름아름 “아 깜짝이야!”
세나 “어머,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여기서 뭐하세요?”
그 사건이후 처음 얼굴을 마주보는 세나와 다름.
다름은 예전에 자신이 지켜주려 했던 세나가 이제 달리보인다.
연기까지 하며 경우의 뒤를 캐고 있던 세나.
야무진 건 좋지만 가까이하긴 좀 무섭다고나 할까.
다름 “아... 아무것도...”
아름 “글쎄. 내가 성희롱 피해자래!”
해맑은 아름이 자초지종을 세나에게 설명해준다.
세나 “어머, 그래요?”
아름 “응응. 정말 별일이지?”
세나 “마케팅본부장님은 말도 안되네요. 우리 본부장님이면 몰라도.”
아름 “너네 본부장? 영업본부장님?”
세나 “아.. 말실수했나? 우리 본부장님은 좀...그래요. 요즘엔 적응 됐지만.”
다름 “그게 무슨말이야?”
신입사원 때 세하그룹 임원에게 성희롱을 당했던 세나가 생각난 다름.
세나가 단단하게 된것도 어쩌면 계속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서 일까.
세나 “아. 좀 영업본부장님이 수위가 높아요. 신고할 정도는 아닌데. 좀. 그래요. 하핫.”
다름 “세나야.”
세나가 안쓰러워진 다름.
같은 본부였으면 조금이라도 지켜줬을 텐데.
남초조직이라 우산이 되어줄 사람이 없다.
다름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해. 도와줄게.”
세나 “선배님.. 감사해요.”
아름 “뭐야. 갑자기 너무 훈훈하네? 세나야. 나한테도 말해!”
다름 “너나 잘 챙겨. 기지배.”
꺄르르 웃는 세사람.
*
마음이 따뜻해진 채로 자리로 돌아온 다름.
깨끗한 모니터를 보고 무언가 깨닫는다.
다름 “아 맞다! 나 IT부서 가던 중이었지. 애들이랑 수다 떨다가 잊어버렸네.”
전화기를 들어 IT부서로 전화를 거는 다름.
다름 “네. 남다름 대립니다. 자료복구 요청을 좀 하려고요. 네 제가 올라가던 중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가는 것보다 오셔서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네. 부탁드립니다.”
미스터리한 기분을 다시 찾은 다름.
다름의 자료는 누가 날려버린 걸까.
누군가 다름이 인테그럴 자료를 접속한 걸 인트라넷에서 찾아냈을 수도 있다.
다름 “하긴...다들 바쁜데 누가 나처럼 찾아보겠어.”
IT부 “안녕하십니까!”
구세주가 다름의 자리에 앉아있고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름.
IT부 “이거. 자료는 다 살아있네요.”
다름 “그래요?”
IT부 “네네. 자료를 다 지운다음에 휴지통까지 비운 것 같습니다. 그정도는 복구가 쉬워요. 자, 다 됐습니다.”
다름 “누군가 제 PC에 원격으로 접속한건가요?”
IT부 “음.. 원격으로 접속한 흔적은 없는데요.”
다름 “그럼 직접 자리에서 지웠다는 거에요?”
식은땀이 흐르는 다름.
검은그림자는 가까이 있는 것일까.
다름이 인테그럴 자료에 접속하는걸 볼수 있는 사람이라면...
IT부서 직원이 떠난 후에도 한참동안 자리에 앉지 못하는 다름.
그때 누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름에게 다가온다.
심대리 “저기... 남대리...”
남다름 “네?”
심대리 “사실...내가 아까 남대리가 자료 정리하는 게 신기해서 자리 비웠을 때 잠깐 남대리 자리에 앉았었거든... 그런데...”
다름이 본부장에게 불려간 사이, 심대리는 다름의 자리에 앉았고 바탕화면을 전체 드래그해서 Ctrl+D를 눌렀다.
바탕화면이 파일 하나 없이 깨끗해지자 당황한 심대리는 휴지통을 찾아갔고 자료를 복구하다가 실수로 전체를 또 지워버린 것이다.
남다름 “뭐에요? 심대리님 짓이에요?”
심대리 “응... 미안해...”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하는 심대리.
열이 받는 다름. 한숨을 깊게 쉰다.
심대리 “그래도 다행이다. 다시 살려서.”
검은 그림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이지 못한 존재였다는걸 깨달은 다름.
갑자기 두렵던 마음이 사라진다.
남다름 “다행... 다행이죠. 하하하.”
*
세하그룹 옥상정원.
다름은 마음이 답답할 때 항상 이곳을 찾는다.
비록 건물 숲으로 가득한 강남한복판이지만 옥상정원에 올라오면 잠시나마 리프레시가 된다.
콜라캔을 시원하게 따서 벌컥벌컥 마시는 다름.
낯익은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있는게 보인다.
남다름 “민우선배! 뭐해요.”
공민우 “아, 다름이구나.”
남다름 “답지않게 울적해보이는데요?”
공민우 “망했어.”
남다름 “네?”
공민우 “우리부장. 전미영 법인장이래.”
남다름 “전 법인장님이요? 세하웰니스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그분?”
공민우 “맞아. 당분간 또 야근모드겠구만. 그 사람 일에 미친 사람이야.”
다름도 말로만 들었던 사람.
최연소로 세하그룹에 입사해서 대리,과장,차장까지 다는데 불과 10년이 걸리지 않았다는 그녀.
세하웰니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리인 영업기획부장 자리까지 꿰찼다.
남다름 “궁금하네요. 어떤분인지.”
공민우 “너랑 좀 비슷해.”
남다름 “저요?”
공민우 “응. 집요하고, 꼼꼼하고, 인간성 좋고.”
남다름 “풉. 마지막말 진심인가요?”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음료를 들이키는 두 사람.
잠시 하늘을 감상하다 다름에게 말을 거는 민우.
공민우 “그런데, 너의 고민은 뭐야?”
남다름 “고민이요?”
공민우 “365일 다이어트모드인 너가 콜라라니.”
남다름 “선배 눈썰미 좋다. 고민이 있긴 있죠.”
고민에 대해 털어놓는 다름.
마케팅본부장님이 내준 숙제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다.
공민우 “하면 되잖아?”
남다름 “하면 되는데. 잘하고 싶어서요.”
공민우 “세하웰니스에서 여성타깃 제품이라. 흥미로운데.”
남다름 “여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요?”
공민우 “너가 여잔데 왜 나한테 묻니.”
남다름 “아, 그러네요.”
다름도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
한두알 먹었더니 살이 확 빠지던가 확 예뻐지는게 아니라면 굳이 몇만원을 내고 건강식품을 사먹을 이유가 없다.
남다름 “답답하네요.”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짓는 민우.
공민우 “그래!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