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때때로 마스크가 필요하다.
평일 오전 10시.
성수동 대림창고.
창고를 개조해서 그런지 외관은 낡았지만 내관은 빈티지 감성으로 가득 채워진 곳.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는 다름 앞에 셔츠 단추를 3개 정도 풀어헤친 짐승 하나가 앉아있다.
바로 난로 옆에 앉아서인지 땀이 나는 다름.
여자는 따뜻해야한다며 굳이 여기 앉힌 짐승.
구대표 “여기가 원래 정미소였는데,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며진 이후로 사람들이 엄청 나게 많아요. 주말에는 입장료도 받는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다니까요.”
남다름 “네. 그렇군요.”
다름은 성수동 토박이다.
대림창고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봐왔던 그녀지만 굳이 티내지 않는다.
대화가 길어지길 바라지 않으므로.
공민우가 인테그럴을 추천할 줄 몰랐다.
다른 곳을 알려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니면 다름이 알지 못하는 인테그럴의 강점이 있을수도있다.
그정도로 다름은 공민우의 안목을 신뢰했다.
남다름 “오늘 좀 바빠서. 본론 먼저 말씀드릴게요.”
구대표 “아, 대충 알고 있습니다.”
뭐지. 이사람.
저번에 다름이 육아휴직쓰고 온것도 알고 있고.
남다름 “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구대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 네트워크가 있다고.”
남다름 “아..네.. 그래도 제가 당사자니 다시 한번 설명드리면, 여성타깃 신제품을 개발하려고 하는데 여성소비자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서요. 연령대별로 어떤 건강니즈를 가지고 있는지....”
구대표 “이천만원입니다.”
다름은 귀를 의심했다.
다짜고짜 돈이라니.
남다름 “네? 이천만원이요?”
구대표 “네. 아, 남대리님이 또 이쪽을 잘 모르시나본데, 보통 소비자 조사에서 정량과 정성조사를 합니다. 정량은 표본 이천명 정도는 해줘야하는데 그 사람들 끌어들이는데 광고비를 많이 써야해요.그리고 정성조사, 즉 FGI아시죠? 그거 할 때 아줌마들 밥도 먹여야되고 커피도 사줘야되고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데요. 허허허.”
아줌마... 아줌마라니.
FGI 인터뷰이들을 아줌마라고 표현한다라.
다름은 머리가 띵해졌다.
이런 아저씨에게 맡겨야한다니.
남다름 “이건 만약인데,,, 조사가 좀 충분치 못한다고 생각되면 그땐...”
구대표 “같은 건수로 추가조사하시면 30%정도 더 비용이 듭니다.”
남다름 “아,,, 비용 이야기가 아니고요. 조사내용이 충분치 못해서 쓸수 없는 자료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되는건지 궁금한데...”
구대표 “쓸 수 없는 자료?”
인상을 팍쓰며 다름을 노려보는 구대표.
순간 겁이 났지만 다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양 손가락을 깍지끼며 다름에게 다가오는 구대표.
구대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세하웰니스가 입찰받은 업체라 당분간은 인테그럴을 써야한다.
하지만 예외없는 원칙은 없는 법.
다름도 구대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다름 “그건 두고 봐야죠.”
잠시 침묵이 흐르다 웃음을 터트리는 구대표.
구대표 “아하하하. 이거 이거 많이 들어봤지만 아주 야무진 여성분이네요. 아주 좋습니다.”
어이가 없는 다름. 니가 뭔데 날 판단해.
다름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는 구대표.
구대표 “이번에 신규거래업체에서 받은 샘플인데 써보세요. 아주 좋습니다.”
다름은 쇼핑백을 조심히 열어봤다.
‘미세먼지용 마스크.’
남다름 “감...감사합니다. 요즘 인기 많겠네요.”
구대표 “그쵸. 때때로 우린, 마스크를 써야할 때가 있으니까요.”
눈썹을 들썩이며 마스크를 쓰는 시늉을 하는 구대표.
마임을 하는 그의 모습이 역겨워 커피를 마시는 척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다름.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입은 블라우스에 음영이 져있다.
난로 때문인지 앞에 앉은 아저씨때문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녀.
진이 빠져있다.
*
쇼핑백을 들고 회사로 복귀하고 있는 다름.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름 앞을 막아선다.
김민규 “어다름씨!”
다름은 놀란 나머지 바닥에 쇼핑백을 떨어뜨렸다.
구대표가 준 마스크가 분수처럼 흩어졌다.
김민규 “괜찮으세요? 제가 놀래켰나봐요.”
남다름 “아...아녜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주워 쇼핑백에 다시 담아주는 민규.
젖은 블라우스를 민규가 알아볼까봐 황급히 손에 들고있던 자켓을 걸치는 다름.
김민규 “전에 말씀드린 신입사원 강의 기억나시죠? 내일 아침 9시까지 세하그룹 교육센터로 오시면 되요. 강의 마치시고 신입사원들과 함께 점심드시면 됩니다. 제가 어다름씨 부장님께는 세하그룹 홍보실 발신으로 업무메시지 보내놓았습니다.”
남다름 “아... 네... 그런데 내일이 며칠이죠?”
김민규 “내일은 2월 14일이죠.”
남다름 “2월 14일..... 아! 맞다.”
내일은 시어머니 생신이었다.
새벽7시에 시댁으로 가서 상을 차린 뒤에 출근해야하는데 온몸에 갈비와 전냄새를 뒤집어 쓰고 강의를 하긴 부담스러웠다.
남다름 “혹시 시간을 오후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김민규 “오전에 급한 볼일 있으신가요?”
남다름 “그런 건 아닌데, 좀 개인사정이 있어서요.”
김민규 “음... 오후는 외부견학이 있어서 오전 10시면 괜찮으실까요?”
회사에 와서 재빨리 샤워를 마치면 가능할 수도 있다.
남다름 “네. 10시면 될 것 같아요.”
*
“안녕하세요. 전미영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듯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양쪽으로 갈라진다.
나이40을 넘었지만 20대보다 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날씬한 몸매.
살짝 미소지을 때마다 한지를 구겨놓은 것같은 주름이 매력적인 여자.
겉모습만 봐도 아우라가 풍기는 세하웰니스 독보적 캐릭터.
영업기획부 팻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어색한 웃음을 짓는 팀원들.
가장 어색한 표정을 짓는 사람, 공민우.
*
여자화장실.
나시만 입은 채 블라우스를 말리고 있는 한 여자.
남다름 “웬수같은 아저씨. 진짜 언젠가 내가 한방 먹이고 만다.”
손으로 블라우스를 펄럭이며 말리고 있는 다름.
그때 갑자기 누군가 화장실 문을 거세게 열고 들어온다.
스트라이프 슈트에 팔을 걷어올린 단발머리 여자.
다름이 처음 보는 얼굴. 어떨 결에 목례한다.
여자 “드라이기 써요.”
손바닥으로 바람을 만들며 옷을 말리는 다름에게 말을 건네는 여자.
남다름 “아... 그럼 되겠네요.”
여자 “커피라도 엎질렀나요?”
남다름 “아,,, 그런건 아니고요.”
그때 다름의 눈에 여자의 사원증이 들어온다.
남다름 “헉! 혹시... 전미영 법인장님?”
전미영 “날 알아요?”
남다름 “그럼요. 그럼요! 여사원들의 롤모델이잖아요. 직접 만나뵙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전미영 “영광은 무슨.”
시크한 말투와 가는 팔목.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넋 놓고 그녀만 바라보는 다름.
손을 다 씻고 나가는 전미영 부장, 뒤 돌아서며 다름에게 한마디 한다.
전미영 “내가 더 영광이네. 회장님 살리신 분.”
*
오후 3시, 마케팅 인사이트부 회의 중.
심대리 복귀로 오랜만에 전원이 모였다.
최대리 “전미영 부장님 보셨어요?”
변과장 “봤지. 나이도 안먹어. 그분은.”
이과장 “마녀잖아. 직원들 피를 먹고사는.”
김과장 “마녀라니!”
발끈하는 김과장. 유난히 전미영 법인장 이야기가 나오면 발끈한다.
이과장 “이거이거. 너무 옛사랑 두둔하는 거 아냐?”
최대리 “옛사랑이요? 설마... 두분이?”
김과장 “무슨 말을 하는거야!”
또 발끈하는 김과장.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 잠시 주춤하는 김과장.
심대리 사건으로 인해 한번 더 ‘직장질서 위반’으로 징계를 받으면 그땐 감봉에 처해진다.
요즘 조용히 살고 있는 김과장의 콧털을 계속 건드는 아재들.
변과장 “사귄건 아니고. 좋아했죠. 그쵸?”
김과장 “그만해라. 다 죽여버리기 전에.”
이과장 “아이고. 김과장. 무서워.”
얼굴이 벌개진 채로 주먹을 꽉 쥐는 김과장.
분위기를 다잡는 다름.
남다름 “음음!!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시고. 주간보고 써야하니 이번주에 하셨던 일들 브리핑해주세요. 그런데 부장님은 어디가셨어요?”
한창 떠들고 난 후 자리에 없는걸 알게 된 부장.
변과장 “부장님, 요즘 기분 안 좋으신 거 같아.”
남다름 “왜요? 집안일이 있으신가?”
사무실로 매일 전화하는 사모님이 생각난다.
변과장 “그런건 아니고. 회장님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첫째아드님에게 승계를 하려고 하는데 좀 위협요인이 있나봐.”
남다름 “회장승계가 일개 자회사 부장한테까지 미치지 않을텐데...”
세하그룹 미래전략실에 있었던 다름이 잘 안다.
자회사 부장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변과장 “소문인데, 젊은 사장이 오면 사장보다 나이많은 사람들은 집에 가야한다는 말이 좀 있어.”
남다름 “네? 마흔 좀 넘으신걸로 아는데.”
변과장 “그러니까.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다름은 김세하 회장의 첫째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자회사 세하맥주에서 마케팅본부장을 하다가 다름이 세하그룹 미래전략실을 떠날 때 그가 지주회사로 왔다.
남다름 “부장님 걱정이 많으시겠네.”
심대리 “근데 그러면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갑자기 모든 사람이 심대리를 쳐다본다.
심대리 “우리도 다... 마흔 넘었잖아요.”
갑자기 침울해지는 분위기. 다름을 제외한 전원이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다.
남다름 “에이! 걱정마세요. 그런일은 없을거에요.”
첫째아드님이 어떤 성향을 가진 분인지는 모르지만 김세하 회장님과 비슷한 성향이라면 그런 원칙으로 직원들을 잘라내진 않을 거다.
남다름 “자자. 주간보고 제 것부터 할게요. 저는 마케팅본부장 지시로 ‘여성타깃’제품 개발 중입니다. 이번 주에 소비자조사업체에 조사의뢰했고요. 다음주중에 일본에 출장 다녀올 계획입니다. 그리고 ...”
심대리 “그런데 다름씨...”
남다름 “네?”
심대리 “회장님이랑 친해?”
남다름 “네? 아... 그런 오해 많이 받았는데요. 그 일 이후로는 전혀 뵌적이 없어요.”
지난 세하그룹 뇌물사건 때 회장쪽 증인으로 나왔던 다름.
무죄판결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다름을 주목했었다.
모두 그녀가 바로 승진을 할거라했지만, 결론적으로 가장 작은 자회사에 배치됐다.
남다름 “저희회사는 생각보다 상식적이고 공정해요. 다들 이상한 걱정 하지마세요.”
*
“어머니, 생신축하드려요.”
상식적이고 공정한 회사에 다니는 다름.
가장 비상식적이고 비공정한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부터 갈비찜과 모듬전을 만들어 아현동 시댁으로 출근한 다름.
남편은 아침에 일어날 자신이 없다며 전날 시댁으로 가있었고, 엄마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민준 때문에 다름은 집에 있다가 새벽 택시로 시댁에 왔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푸짐하게 차려놓자 하나둘씩 모여드는 시댁가족들.
시어머니 “아이고, 우리 다름이 솜씨 좋구나.”
시아버지 “고생했다. 며느리.”
강남편 “원래 더 잘해. 그치 여보?”
시어머니 “그래? 다음에 더 기대할게 아가.”
남다름 “흐흐흐(호호호)..,느(네)...”
이를 앙하고 문 채로 입만 웃고 있는 다름.
분명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전에 말했는데.
시어머니 “아들, 공부는 잘되니? 대학원 간다며.”
강남편 “응. 뭐 잘되지. 월수금에 퇴근하고 가.”
시어머니 “아이고, 세상에서 공부하는게 가장 힘든건데. 고생이 많다.”
공부하는게 뭐가 힘들다고.
퇴근하고 와서 집에서 애보는게 훨씬 힘든데.
입을 삐죽이는 다름.
시아버지 “민준이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남다름 “너무 새벽이라 깨울 수가 없더라고요. 다음에 데리고 올게요 아버님.”
새근새근 자고 있는 민준이.
새벽에 나오면서 친정엄마와 바통터치 했다.
강남편 “(민준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거 봐봐. 민준이 너무 잘생겼어. 다름이 눈 닮아서 눈도 엄청 크고.”
시아버지 “그러네. 이거 큰일할 얼굴이야. 대통령감이야.”
남다름 “아버님도 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후추치는 시어머니 한마디.
시어머니 “흥, 그래도 나처럼은 못 낳지.”
시아버지 “응? 무슨 소리야.”
시어머니 “아무리 잘낳았다해도 나만큼은 못낳는다고. 그치 아들?”
단추구멍보다 작은 눈에 배나온 아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뭐 원빈, 현빈 난리인데, 나는 우리 강빈이 최고여!”
남다름 “콜록콜록.”
먹던 음식을 뱉을 뻔한 다름.
대체적으로 좋은 시어머니지만 꼭 저렇게 며느리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한마디를 하셔야한다.
시어머니의 아들어천가가 3절, 4절을 지나 돌림노래까지 마친 후 식사는 끝났다.
다름이 설거지를 하려고 비워진 갈비찜 그릇을 드는데 남편이 막아선다.
강남편 “어라, 여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남다름 “(쌍심지켜며) 아냐. (시어머니쪽 눈짓하며) 내가할게.”
눈치없는 남편이 계속 접시를 뺏어간다.
강남편 “내가 할게. 여보 고생했잖아.”
남다름 “아냐. 내가 한다니까.”
시어머니 “이리내! 내가 한다!”
갑자기 접시를 뺏어드는 시어머니.
갈비찜 그릇에서 양념이 튀어 다름 옷에 묻었다.
남다름 “아....”
옷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름.
머리를 긁적이는 남편.
화가 난 시어머니.
시어머니 “너네 집에서 뭘 하든 상관안해! 그런데 우리집에서는 아들이 설거지하는 꼴 못본다. 내가 치울테니까 너네들 빨리 출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