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시작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깬 다름.
창문 너머 떨어지는 햇살이 다름의 얼굴이 비추고 강한 빛에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
눈을 거의 반 감은채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낯선 공간이다.
“뚜뚜뚜”
기계음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병원에서 쓰는 기계처럼 보인다.
눈을 가린 손에 무언가 달려있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링겔이다.
한눈에 봐도 VIP실임을 알수 있는 널찍한 병실.
남다름 “맞다. 도로로 넘어졌었는데. 아...”
강한 두통이 느껴지는 다름.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때, 다름을 깜짝 놀라게 한 누군가의 목소리.
“2014년 6월 7일”
다름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한 남자.
“그때가 시작이었습니다.”
민규였다.
“저는 평생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가정에 소홀하고 항상 바깥으로 도는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을 쓰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사랑받지 못한 여자였거든요. 아버지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했겠지만 어머니에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어머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아버지는 저와 어머니를 이모가 계시는 바르셀로나로 보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마음을 가족을 통해 위로받는 듯 했죠.
적응은 꽤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우울증을 차차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낯선문화를 이겨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생일날, 스페인어로 본 시험을 처음으로 100점 맞았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친구들과 생일파티도 뒤로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갔죠.
집안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저는 의자에 편안히 기대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한번도 본적 없는 온화한 표정... 엄마, 엄마, 나 100점 맞았어요. 라고 외쳤지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러 바르셀로나에 왔습니다. 한국에 같이 가자고요. 저는 어머니의 죽음은 다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돈을 버느라 가족을 등한시한 남자를 따라갈 수 없었고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스페인에 있었습니다. 평생 스페인에서 살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4년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장을 치르는 동안 아버지의 공판이 있었습니다.
회사 자금을 불법적으로 횡령하고 하청업체에 뇌물을 받았다는 아버지 죄... 솔직히 통쾌했습니다. 돈으로 흥한자는 돈으로 망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날, 어머니를 버린 남자가 어떻게 자멸하는지 두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법원에 잠시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평생 혐오했던 그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민규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름을 바라보는 민규.
깊고 짙은 눈으로 그녀를 아련하게 바라본다.
김민규 “한 여자에 대해서도 궁금해졌습니다.”
다름은 법정에서 울부짖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회장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똑똑똑”
그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간호사.
간호사 “두분 깨어나셨군요. 가족분들이 곧 오실 겁니다. 일단 편히 쉬고 계세요.”
간호사에게 목례를 하고 말을 이어가는 민규.
김민규 “아직도 후회하는 건.”
“그때 한국에 남지 않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스페인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국 시스템에 다시 적응하는데 두려움이 조금 있었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이런 문구를 봤습니다.
Mas vale tarde que nunca.
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고 하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늦게라도 도전 해봐야겠더군요.
그리고 강렬한 무언가가 저를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 여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다름은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고개를 들수가 없어 헛기침하며 딴청 피우는 다름.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민규.
김민규 “다 정리하고 돌아온게 2016년이었습니다.”
*
2016년 5월, 세하그룹 로비.
안경을 쓰고 백팩을 매고 로비를 돌아다니는 민규.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다.
그때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춰선다.
그의 시야에 한아름과 남다름이 들어온다.
팔짱을 껴고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그녀들.
그녀들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지는 민규.
*
김민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
다름도 궁금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김민규 “배가 나와있었습니다.”
민규가 세하그룹에 왔다는 2016년 5월.
다름이 아들을 낳은건 2016년 7월이었다.
민규가 본건 만삭의 다름이었다.
김민규 “그때 허탈감은 말로 못합니다. 이미 그녀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죠.”
후배의 거침없는 고백에 몸둘바를 모르던 다름.
오글거리는 기운을 참을 수 없어 결국 한마디를 던진다.
남다름 “푸하하핫, 뭐야. 어린자식이. 장난그만쳐.”
굴하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가는 민규.
김민규 “그런데, 전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굳어버린 다름.
다름이 생각하는 의미가 맞는지 아닌지 고민중이다.
또 오글거리는 기운을 참을 수 없는 다름.
남다름 “뭐어어어? 유부녀를? 야. 큰일나.”
“하핫”
짧게 웃음을 터트리는 민규.
다름은 자신이 김칫국을 마신게 아닌지 잠시 생각했다.
김민규 “큰일나는 것 맞죠. 제가 말한 의미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한 의미는...”
민규는 다름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희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
병실 바깥으로 나온 다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도로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 민규의 거침없는 과거사 고백까지.
남다름 “그런데 도로로 떨어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몸은 멀쩡하지?”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찾는 다름.
아무래도 병실에 놓고 온 것 같다.
병실에 들어가면 민규와 또 마주쳐야 하는데...
용기를 내어 뒤로 도는데, 민규가 서있다.
남다름 “엄마! 깜짝이야!!”
김민규 “핸드폰 찾으시죠? 여기있습니다.”
남다름 “야! 놀랐잖아.”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민규를 향해 뛰어오는 회사 사람들.
맞다. 민규는 사장이었다.
민규에게 막대한 자신이 민망해지는 다름.
그때 저 멀리서 땀범벅이 된 채로 뛰어오는 한사람이 보인다.
“여보~~~~”
남편이다.
일주일에 한 두번 볼까말까하는 다름의 남편.
단추를 풀어헤치고 배내밀며 힘겹게 뛰어오고 있다.
그때 다름의 시야에 들어온 민규.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겼다.
185는 거뜬히 넘는 큰키.
오똑한 콧날과 흑진주 같은 피부.
바르셀로나 뉴캄프의 기운이 느껴지는 혈기왕성함.
순간 다름은 어떤 드라마가 생각났다.
교통사고 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여자주인공.
그녀는 전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잃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데...
하지만 다름의 기억은 너무 멀쩡했다.
달려오는 남편을 반기며 중얼거리는 다름.
남다름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남편 "여보 괜찮아?"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아름이었다.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다름.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