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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Jan 09. 2022

같은 라인에 여배우가 산다

우리 아파트에 국민 000이 산다

우리 동네의 자랑,

닮고 싶은 사람






경사진 도로 위에 쉐보레 로고가 박힌 밴이 한 대 서있다. 작은 빵집 하나를 다 가릴 것 같은 풍채의 밴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그녀가 오늘 스케줄이 있구나. 바로 같은 라인에 사는 여배우 K님.         


사실 청담동이나 삼성동 현대빌라촌 주변을 돌아다니다보면 연예인을 쉽게 본다. 소아과에 갔더니 전지현 배우가 있고, 칼국수 집에 들어갔더니 김지호 배우님 부부가 앉아있고, 할리스에 들어갔더니 아이돌 세븐틴 멤버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쉬고 있다.      


워낙 연예인들이 많이 보이는 동네라 덤덤하게 지나가고 있는데, 여배우 K를 처음 본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간만에 새벽 운동을 갔다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는데 한 입주민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라고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상대방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아줬다.     


7층을 누르고 어색하게 서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익숙한 인상인데.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좁은 공간에서 뒤를 돌아 얼굴을 확인하면 실례일 것 같아 가만히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감사합니다’하며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그제야 누군지 알았다. ‘국민 000’으로 불리는 꽤 유명한 여배우였다.   

   

집으로 달려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나 방금 000봤어! 우리 라인 사나봐!’ 그랬더니 부스스 하게 있던 남편이 깜짝 놀란다. 아니, K가 이 아파트에 산다고? 왜? 그건 나도 의문이었다. 그녀정도라면 PH129나 상지리츠빌 정도되는 고급빌라에 살 것 같은데 의외였다.      


포털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필모그래피나 화보를 넘겨보다가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기부를 엄청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이 지금 사는 아파트 값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잘 번다고 해도 이 정도 기부는 쉬운 일은 아닌데.       


그녀가 같은 라인에 사는걸 알게 된 후, 기분상 더 자주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알아보면 (어머, K씨 맞아요?) 수줍게 웃으며 (맞아요. 안녕하세요.) 라고 소탈하게 인사했다. 옷은 항상 검정색 츄리닝에 얼굴은 화장끼가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부는 엄청 하면서 본인은 잘 꾸미지 않는구나. 검정색 츄리닝도 로고 하나 안써있는데. (물론 내가 모르는 대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옷도 옷이고 배우특유의 도도함이나 차가운 느낌이 없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소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K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오랜 연인과 결별했다는 기사가 떴다. 오만 추측성 댓글들과 지저분한 문장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질투해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독한 단어들을 하나씩 눌러 읽는데, 왜인지 얼굴에 쥐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였다. 아니, 당신들이 K에 대해 뭘 안다고.     


바로 손을 걷어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대변인이 되주고 싶었다. 당신이 뭘 아냐고. 얼굴 보고 할 수 있는 말만 댓글에 싸지르라고. 한바탕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깨달았다.

아, 나 K의 팬이구나. 그것도 열성팬.       


한바탕 댓글타임을 하고 난 다음, 얼마 안되서 그녀와 마주쳤다. 기사 때문인지 뭔가 좀 수척해 보였다.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무슨 말이라도 해줄까 고민했다. 괜찮으세요? 응원해요. 다 지나갈거에요. 등등.. 아니야. 괜히 아는 척 했다가 불편해 할 것 같아. 내가 팬인거 티내면 마치 사생팬 같을 것 같기도 해. 열성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팬이 한 라인에 살면 불편하지 않을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전혀 생뚱 맞은 소리가 튀어나갔다.


“저 인스타 팔로 하고 있어요."    


매번 수줍은 표정만 짓던 그녀가 '푸핫'하며 파안대소 한다. 그녀는 당황한 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머,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인스타 팔로 하고 있다'라는 말은 꽤 센스있는 응원이 아니었나 싶다. 부담주는 열성 팬이라기 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1인이니 힘내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 들여졌길. 왜인지 그녀는 그렇게 받아줬을 것 같다.    


종종 그녀는 인스타 라이브를 한다. 그녀의 소통창 뒤로 보이는 집구조는 익숙하다. 가구나 인테리어도 눈에 들어오는데 초기 입주 옵션에서 크게 변화를 주지도 않은 듯하다. 소탈하고 꾸밈없고 인사 잘하는 여배우 K. 계속 우리 아파트의 자랑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승승장구 하길.



ps. 사진 속 배우는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입니다. 그냥 제가 좋아해서 올렸습니다. 본문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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