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시드니 Sep 23. 2022

청담동엔 빌라거지가 없다

빌라 사는 사람이 더 부자일듯


빌라 거지라는 말,

세상물정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


 



'빌거(빌라거지)'라는 말이 세상에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카피처럼, 사는 곳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만연한 세태였다. 한국 주거형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파트고 그 곳에 살지 않은 사람들을 빈곤하게 보는 시선도 여전히 존재했다. 다만, 사람들이 경악한 건  그것을 단어로 만들어서 입밖으로 내뱉는 아이들의 천진함이었다.  


청담삼성대치 등 강남지역에 거주하면서 보니 '빌거'라는 단어는 초등학생처럼 치기어리고 사회경험 없는 사람들만 쓸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동네 살면서 빌라사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거지'는 한명도 보질 못했다. 오히려 아파트 사는 사람들 보다는 빌라에 살면서 공간을 자유롭게 변형하고 옥상에 텃밭을 꾸미는 빌라거주자의 삶이 더 풍요로워 보인다.


하지만 나도 초창기에 실수를 한적이 있다. 오다가며 만난 엄마가 있는데, 빌라에 살아서 동네 아파트 놀이터를 전전하고 있었다.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남의 놀이터를 투어하며 천진난만하게 노는 그집 아이들이 측은해서 가끔 과자나 바나나우유를 사주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엄마도 꼭 뭔가를 보답으로 사오셨다. 어후, 괜찮아요 하며 언제든이 우리 아파트에 놀러오라고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  엄마가 나와 우리 아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이와 바깥놀이를 갔다가 오후에  집에 들리기로 해서 차를 가져갔어야했다. 주차장도 좁을텐데 차를 가져가는  민폐일 듯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를 가져가도 될까요? 자리가 있을까해서."

"아, 여기 발렛 기사님이 계세요."


그 말을 듣고 집이 상가 안에 자그맣게 붙어있는, 아주 가난한(?) 집이란 생각에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찾아갔다. 찍어준 주소에 도착해서 보니 친절한 발렛 기사님이 계셨다. 키를 맡기고 5층에 왔다고 하니 유독 더 파안대소하는 발렛기사님을 봤을 때 눈치챘어야했는데 문이 열리고 집 안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 사람들... 건물주구나.



청담동에서 '빌라산다'는 건 건물주일 가능성이 꽤 높다. 꼭 청담동이 아니더라도 어떤 빌라는 소유주가 거주하고 있을 거다. 같은 동네 기준 아파트에 세입자로 사는 사람과 빌라 소유주를 비교하면 빌라에 사는 사람이 더 부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빌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거지'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하는 건 몰라도 너무 모르고,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며 삶의 경험이 일천한 어린아이 다운 발상이란 생각이 든다.

 

빌거든 휴거든 엘사든 주거형태로 사람을 가르는 세태는 안타깝다. 나도 과거엔 빌라에 사는 세입자, 빌라거지였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빌거'라고 부르지 않았따. 오히려 우리집은 친구들 사이에 아지트였고 하교 후 빌라 옥상에서 만화책을 보며 낭만을 즐겼었다. 요즘 세태를 보며 과거 나를 동등하게 대해준 아파트 살았던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그나저나 곧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는데, 우리 아이한테 아거(아파트 거지) 라고 부르면 어떡하지?

빌라로 이사가야하나.ㅎ

시드니 소속 직업 회사원
구독자 2,735
매거진의 이전글 대치동 사람들도 명품을 안 입는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