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개념이 있을 줄이야
졸지에 개념없는 엄마
"개념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지식과 정보를 칭하는 '개념'보다는 매너, 교양, 사회성등이 없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회사에서는 비즈니스 미팅에 슬리퍼를 신고오는 사람,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이 고기 굽는데 집어먹고만 있는 후배, 자리에서 손톱을 깎는 사람들 등을 개념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대체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개념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인 민감성이 높아 남 눈치를 보고 감정이 상해도 일단 여러번 생각한 후 겨우 내뱉는 성향이라 '좀 무섭다'는 말은 들어도 개념없다는 말은 거의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아이의 소풍날, 나는 개념없는 엄마가 됐다. 코로나 이후 3년만에 가는 야유회라 선생님도 준비를 꽤 철저하게 하시는 것 같았다. 소풍 이틀 전부터 준비물 리스트가 오더니 e-알리미를 통해도 두세번 체크하셨다. 요즘 난독증이 와서 밀집된 글자를 잘 못보는데 소풍 체크리스트는 눈을 크게 뜨고 꼼꼼히 봤다. 안그래도 '엄마는 맨날 빼먹어!'라고 하는 아드님인데 1년에 한번 뿐인 봄소풍에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소풍 당일, 아침부터 다시 체크했다. 역시 빠진 물건이 없었다. 처음 관광버스를 태우는 터라 꽤 긴장되서 위치추적기도 넣어뒀다. 어플과 연결해뒀더니 집 밖을 나가면서 알림이 왔다. "xx님께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이 정도면 과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노란티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아이 동영상을 찍으며 신나는 첫 소풍날 기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를 학교 안으로 데려다주고 회사로 향하는데 골목길 어귀에 엄마들이 몰려있다. 무슨일이 있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평소 알고 지내는 수연이 엄마가 있다. 수연엄마에게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이 내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따가 버스탈 때 손 흔들려구요~"
손.. 손을 흔든다고? 소풍을 가는데 왜 손을 흔들지? 라고 잠시 생각하기엔 관광버스 앞에 서있는 엄마들이 꽤 많았다. 극성이라던가 과잉보호라고 하기에는 그 수가 꽤 되서 아이소풍 가는 날 = 관광버스 앞에서 손을 흔든다 는 게 소풍날 지켜야하는 엄마의 기본적인 행동양식인 듯 했다. 얼른 아이를 학교에 던져놓고 출근길로 향하고 있었을 뿐인데 졸지에 개념없는 사람이 됐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수연엄마한테 연락이 왔다. 선생님을 따라 씩씩하게 걸어가는 우리 아이 영상이었다. 선생님 뒤꽁무니만 따라가는 우리 아이과 달리 다른 아이들은 엄마들에게 손을 흔들며 파안대소 하고 있었다.수연엄마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살짝 눈물이 날 것 같기는 커녕 일단 퇴근에서 집에 가서 아이에게 들을 푸념이 걱정됐다.
엄마, 엄마는 왜 없었어?
다행히 아이는 소풍이 너무 즐거웠는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소풍 잘 다녀왔어?'라는 물음에 '응, 경기도로 관광다녀왔어.'라는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손 흔들 때 없어서 섭섭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는 걸 택했다. 그걸 묻는 순간 그게 정말 개념이 되버릴까봐. 모르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기본적인 상식과 매너가 없는 엄마가 될까봐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나를 알게 됐으니 내년 소풍 땐 반차를 내서라도 손을 흔들어야지. 설렘가득 소풍을 떠나는 아이의 얼굴을 꼭 내 눈에 담아야겠다. 개념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