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축지법과 압박수비에 나는 무너졌다
이 말 밖에 못하겠다.
발라 모굴리스!
나에게는 콤플렉스가 하나 있다. 뭔가를 간곡히 원하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사물이든 사람이든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절대 내 손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성적이었고, 대학에서는 연애상대 였고, 졸업해서는 장래희망이었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들은 쉽게 주어졌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숙제지만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이면 사이렌오더로 주문한 스타벅스 음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대기하고 있었다. (뭔지 자세히 말하기는 낯간지러 예시는 생략) 그래서 가능하면 뭔가를 간절히 원치 않으려고 한다.
일의 자아, 엄마의 자아, 아내의 자아에 이어 최근에 작가의 자아까지 만들어져 정신이 없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인사이드아웃처럼 온갖 자아들이 아우성치고 있으니 콤플렉스가 있다는 자체도 잊어버렸다. 가끔 망각은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한 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아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생겨버렸기 때문.
그것은 곱창이었다. 사실 나는 내장류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이 데려간 삼성원조양곱창에서 소곱창구이를 접한 후 딱딱한 허물을 벗어 던진 매미처럼 해방과 신세계를 맛보았다. 그 뒤로 식사약속이 잡히면 ‘곱창, 곱창’하며 한여름 매미처럼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날 부장님이 회식을 제안한다. 회식 메뉴를 정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곱창 드시죠!’라고 외쳤다. 평소 내 돈으로 사먹기에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마침 회사 앞에 부산 낙곱새 맛집이 생겼다. 부서원 7명은 전원 수긍했고 나는 그날만 간절히 기다렸다.
회식 자리에 도착하고, 가능한 구석에 들어가서 앉았다. 자리 이동없이 가만히 앉아 사장님이 구워주는 곱창을 내 입으로 규칙적으로 넣기 위해. 그런데 최소 100킬로는 되는 A님이 내 앞에 앉는다. 사실 회식을 하면 내 앞자리가 인기가 많다. 유일하게 여자 직원인 경우가 많아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남자 직원들은 내 앞에 앉아 다른 남자들보다는 더 많이 먹는 꾀를 부린다.
평소에는 남자 직원들에게 고기나 반찬을 양보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아니다. 곱창을 맛있게 먹으려고 간식도 안 먹었단 말이다. 나무 젓가락을 부비며 손가락 운동을 했다. 오늘은 니가 알던 내가 아니니까. 준비운동을 하듯 잠시 숨을 고르고 옆자리 앉은 동료랑 담소를 나누는데, 시야에 풍성했던 참나물과 백김치, 파김치가 자취를 감췄다. 어, 분명 있었는데. 눈 앞에는 모든 반찬을 싹 비우고 이모님께 리필을 요청하는 A가 있다.
“A님, 나물 좋아하시네요. (천천히 좀 드세요. 여기 사람도 많은데.)”
“제가 자취를 해서 이럴 때 야채를 먹어야해요.”
자취든 타취든 간에 7명이 모여있는 테이블에서 혼자 쓸어담듯 반찬을 입에 담는 건 식사예절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불편함을 눈치챘는지 가운데 앉은 동료가 몸을 옆쪽 테이블로 돌린다. 야.. 가지마..
먼저 에피타이저로 연포탕이 나오고, 동료 B가 각자 그릇에 덜어줬다. 거기까진 별 문제가 없었다. 개인 그릇에 나온 걸 먹었으니. 하지만 다음 코스가 문제였다. 친절한 사장님은 내쪽 테이블에 곱창 3인분, 내 옆 테이블에 곱창 4인분을 내어놓고 차근차근 구워주셨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라도 대서 자리를 바꿀까 했지만, 평균 몸무게 80킬로가 넘는 남자 여섯을 나 때문에 옮기게 할 수도 없었다.
곱창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치이익. 축구도 한번 해본 적 없지만 압박수비를 당하는 축구선수의 심정을 조금이나 알 것 같다고 할까. 젓가락을 들고 열리지 않을 공간을 응시하며 미친 듯이 불안해진다. 저기서 나는 몇 개나 먹을 수 있을까.
철판 위에서는 염통, 소곱창, 대창이 나란히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그래, 다 먹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소곱창을 공략하자. 염통이랑 대창은 좋아하지도 않으니. 염통과 소곱창이 먼저 구워지고 사장님이 개인접시에 하나씩 올려줬다. 소스에 찍어먹으니 천상의 맛이다. 역시, 곱창 먹자고 하길 잘했다.
잠시 시선을 돌리고 다시 옆에 앉은 동료와 담소를 나누는데 이상함이 느껴진다. 풍성했던 철판 위 곱창이 반도 안 남아 있다. 맞은 편에는 말로만 듣던 허경영의 축지법으로 곱창을 본인 입으로 쓸어 담는 A가 보인다. 대창 한 개는 사수 해야할 것 같아서 대창을 집어서 개인접시에 한두점 올려두니 위기를 느낀 축구선수는 남은 대창을 모두 자기 입으로 쓸어 담는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머릿 속에 아득해지고 앞이 보이지가 않는다. 이건 모두 곱창을 간절히 원해버린 내 잘못이다. 나를 자책하며 텁텁한 제로사이다를 마시는데, 옆 테이블에 풍성히 남겨져 있는 곱창들이 보인다. 염통, 소곱창, 대창 뿐 아니라 은행, 감자, 옥수수도 있었다. 구운 은행 진짜 좋아하는데... 나 은행 좋아하는데... 또 정신을 잃었다.
더 이상 뭔가를 간절히 원치 않기로 했다.
그저 이 말만 외쳐야지.
발라 모굴리스!* (모든 인간은 죽는다.)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대사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권력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류 모두에 적용되는 말로 현재 글에서는 저자의 해탈한 상태를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