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내가 엄마 달래줄 거야,
한마디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계산대 아주머니에게 영수증을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건을 담을 천가방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종량제 봉투는 490원. 수전증 환자처럼 동전지갑을 흔들다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식으로 쌓아놓은 봉투가 찬장 한 가득이었다. 물건들을 어림잡아 보니 미니 가방에 일부 넣고 두 팔로 안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정통 중국 기예단이 서커스를 하듯 아파트 1층 현관을 통과하고, 팔꿈치로 번호키를 눌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생 몰랐던 나의 유연함과 기(技)에 감탄하며 숨을 확 몰아쉬는 순간,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삼천궁녀처럼 물건들이 떨어졌다. 묵직한 맥주 캔은 발등을 찍고, 탐스러운 과일들은 신발장 여기저기서 과즙미를 발산했다.
"아, 어떡해!!" 하며 머리를 감싸는데 소란을 듣고 아이가 뛰쳐나온다. 대형참사를 목도한 아이는 눈물이 굴절되어 안 그래도 큰 눈이 쏟아질 것 같다.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며(이거 다 얼마냐ㅠㅠ) '엄마 괜찮아'하며 웃어 보였다. 그랬더니 아이가 내 팔을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내가 엄마 달래줄 거야."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처럼 창백한 여름 하늘에 창 너머로 오사카성 공원의 녹음이 보이면, 이 경관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기쁨에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다. 옛날에는 슬플 때나 언짢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는데, 요즘에는 기쁠 때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 크나큰 차이는 옛날에 슬퍼서 눈앞이 캄캄해질 때는 그 어둠이 쭉 지속되었지만, 지금은 일순 캄캄해졌다가 다음 순간 그 전보다 훨씬 더 환해진다는 것이다."
- 다나베 세이코 <딸기를 으깨며> p.6
1초의 암전 후, 발광하는 빛이 느껴졌다.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 뒤에서 후광이 비췄다. '달래줘야지', '달래줄게'처럼 가벼운 말이 아닌 신의 의지가 담긴 '달래줄 거야'. 아이는 구원자였다. 이곳저곳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있던 마음을 일으켜 세우러 온 구원자.
Come unto me, all ye that labou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490원 아끼려다가 고심해서 고른 물건들을 날려먹고 청소까지 하게 되었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손해 본 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배시시 천사 미소를 짓고 있는 '구원자'만 눈에 보일 뿐. 머리는 4살 아이가 34살 먹은 어른을 달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한 커피 한 잔, 뜨끈한 국밥 하나 못 사주는 네가 어떻게 날 달래주겠니. 마음은 말했다. 이미 모든 게 다 풀어졌다고.
아이의 '달래준다'는 말은 어른의 것과 결이 달랐다. 어른의 위로는 일시적이지만, 아이의 위로는 더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 아이의 시간은 내 것보다 길고, 아이는 항상 미래적이니까.
신발장 청소를 멈추고 아이를 안았다. 너무 꼭 껴안았는지 아이가 발버둥 친다. 이제 힘으로 제압하는 게 어려운 4살 아이. 아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 아이의 성장은 든든하다.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아이의 포슬 한 볼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엄마도 널 달래줄게. 블록이 없어졌다고, 사탕을 떨어트렸다고 우는 지금 말고 정말 너의 머리가 무거워지고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힘들 때. 그때 엄마가 힘이 될게. 지금 너에게 받은 사랑 꼭 기억할게."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다. 세상에 인정받지 못할 때 "괜찮아", "다음 기회도 올 거야"라고 항상 토닥여주던 부모님. 어쩌면 우리가 힘들 때 부모가 손을 잡아주는 건 어릴 적 우리가 뱉었던 순수한 마음 때문 아닐지. "나 효도할 거야!", "엄마 괴롭힌 사람 다 혼내줄 거야!" 하며 호기롭게 외친 말은 공수표(空手票) 성격이 강하지만, 그 말에 부모들은 진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도 그런 힘을 잊지 않고 계속 등을 토닥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공수표면 어때.
그저 지금 아이의 마음에 기뻐해야지.
그 마음이 잊혀도 엄마는 이 순간을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