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너머의 관계에 대한 질문

2 - 사랑 : 감정과 상황의 산물

by 심영의

이종산은 뉴질랜드의 여성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단편「가든파티」를「별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리라이팅(rewriting)한다. 맨스필드 소설「가든파티」에서는, 유복한 집에서 자란 ‘로라’는 가든파티가 열리는 날 가난한 이웃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로라는 파티를 여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가족들은 아랑곳없이 파티를 강행하고 남은 음식을 로라에게 들려 상갓집에 보낸다. 이 소설은 자신과 지위가 다른 하층민과 접촉하면서 겪는 ‘로라’의 감정의 변화와 산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단편이다. 이종산은 맨스필드 소설「가든파티」에서 특히 ‘칸나’와 ‘모자’에 주목한다. 까닭은 주인공 로라의 어머니가 파티를 위해 잔뜩 주문한 싱싱하고 붉은 칸나와 로라가 거울을 보며 조심스레 썼던 예쁜 모자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별과 그림자」에서 ‘나’는 지난 방학 때 ‘하트’가 준 알뿌리를 이번 봄에 텃밭에 심는다. 처음 한두 달은 아무 소식도 없어 죽은 건가 했는데 한 달 전쯤 싹이 나더니 그때부터 무서울 정도로 쑥쑥 자라 오늘 아침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붉은 칸나였다. ‘나’의 생일날, 나와 엄마는 조촐한 생일 파티 음식을 준비한다. 올 사람은 단 한 사람, 초등학교 친구였고 지금도 유일한 친구인 ‘하트’ 뿐이다. 하트는 나를 ‘경’(햇볕)이라 부르고, 나는 하트를 ‘영’(그림자)이라 부른다. 내 가슴은 납작한데, 하트의 가슴은 불룩하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하트는 갈수록 예뻐졌고, 나는 더 못생겨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지금 나와 하트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애들이다. 나는 지금 하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트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무시하고 아무런 연락이 없다. 나는 “오늘 오후 여섯 시까지 답 없으면 다신 너 안 봐”라는 메시지를 쓰다가 지워 버린다. 늦게 하트가 왔다. 방으로 들어오기를 망설이던 하트는 요양원에 계시던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울음을 터트린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운다. 그러다 짧은 키스를 한다.

할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서도 둘은 올해가 가기 전에 키스를 해 보고 싶었다는 고백을 주고받으며, 가슴이 기쁨으로 쿵쿵 뛰는 것을 느낀다. 작가 이종산은 소설 후기에서 말한다. “사랑은 때로 이름을 나눠 가지는 일 같다. 이름을 나눠 가진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36쪽)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의 인격성과 그 관계성은 핵심적인 개념이다.(박병준,「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308) 이 소설「별과 그림자」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의 유사 레즈비언 서사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핵심은 소설의 인물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동성애에 대한 욕구는 대부분의 자연스러운 욕구들처럼 모든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왔다. 동성애는 인간 사회에 미만한 하나의 성적 특성이며, 주어진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 부여하려는 의지적이며 주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배척되어왔다. 슈미츠는, 인간이 사랑을 원할 때, 이 원함 속에 두 가지 욕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즉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흔히 생각하듯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상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사랑은 감정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속해 있다고 믿고 느끼는 ‘공동의 상황’이라는 것이다.(하선규,「감정과 상황으로서의 사랑- H.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과 그 인간학적 의미에 대한 고찰」,13)

이 소설「별과 그림자」에서 두 여성 인물,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고 그것이 타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 두 여성 인물은 바로 그러한 ‘공동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사랑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금희는「레이디」라는 단편을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더블린 사람들』에서 영감을 얻는다. 김금희는 모두 열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더블린 사람들』소설 중에서 특히 단편소설「에러비」속 소년의 마음을 헤아린다. 소년은 친구인 ‘맹간’의 누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녀의 주변을 서성인다. 어느 날 누나에게 주려고 선물을 사러 바자회에 가지만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버린 쓸쓸한 현실을 마주한 그의 마음은 곧 분노로 변한다.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창가에 서 있는「죽은 사람들」의 ‘그레타’를 통해 김금희는 그들의 열망이 어떻게 좌절되어가는지 혹은 여전히 실패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

「레이디」의 화자는 ‘정아’다. 정아는 ‘유나’와 친한데 까닭은 유나가 노래를 잘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함께 다니던 친구들끼리 사십 분쯤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유나의 노래를 듣는다. 유나는 모든 노래를 잘했지만 특히 알앤비에 강했고, 노래로 정아를 비롯한 또래들을 전율시킨다. 어느 날 유나가 방학 때 바다에 가자고 말하고, 아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에 우울해하지만 유나는 그의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 여럿이 함께 가는 야유회라고 정아를 설득한다. 그렇게 그들은 4박 5일 동안의 여름의 바캉스를 준비하고 마침내 서해의 해수욕장에 간다.

그곳에서 이제 열여섯의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인 유나는 정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 위에 올려놓고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까워지기 위해”(60쪽) 애쓴다. 정아는 성애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저 입고 있던 파자마와 속옷을 벗고 맨다리로 유나를 끌어안는다. 유나는 말한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61쪽)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곧 냉담해지고 만다. 정아가 몸에 열이 심해지고 그래서 바닷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유나는 정아를 텐트에 내버려 두고, 어디선가 누가 잡아 온 물고기를 구우려는 제 아버지 곁에만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다들 텐트 안으로 들어간 밤에도 유나는 자기 부모의 텐트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정아는 어떤 슬픔과 분노 같은 것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정아는 4년간 더 그 소도시에서 살다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그곳을 떠났고, 자연스럽게 유나와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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