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사랑한 건 아닐까 생각했네. 그런 생각의 그늘로 도피하려네. 어쩌면 당신이 아니었어도 나는 타올랐을 테고, 어쩌면 당신 아니라도 나는 사랑에 빠졌을 거라 체념해보네. 이런 비겁함의 동굴로 들어가도 젓갈처럼 겸손하게 삭을 수 있을까. 백 년이면 맑은 진액만 남기고 육탈할 수 있을까. 나의 일이었다 하면 당신은 없어도 되는 것이네. 당신이 애초부터 없었어도 사랑과 무너짐은 자초한 결과가 되는 셈이네. 단지 사랑을 사랑했다고 말해놓고 후회하네. 남들에게 장담하고 돌아와 젖은 나무처럼 하루를 울었네. 사랑을 사랑했네. 그러나 당신이어서 사랑을 사랑할 수 있었네. 더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네, 나는.
-전영관 산문집, 『그대가 생각날 때마다 길을 잃는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