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예희 Feb 16. 2017

복권에 대하여

돈 얼마 생기면 뭐할래 라는 질문. 요거 참 좋아한다. 혼자서도 요런조런 생각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종종 묻는다. 만원 생기면 뭐할래?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케이크. 오만원 생기면 뭐할래? 아르마니 립글로스 연한 핑크색 미리 봐 둔 거 있음. 십만 원 생기면 뭐할래? ASOS에서 모자랑 옷 같은 거 두어 가지 직구 하면 딱 떨어지겠다. 오십만 원 생기면 뭐할래? 어디 보자 오십이면 친구랑 좋은 데서 애프터눈 티, 물론 내가 쏘고(동대문 메리어트나 명동 포시즌 호텔을 노리고 있다) 나머지는 야금야금 생활비로 쓰겠다. 백만 원이면 대출 원금이랑 이자 매달 나가는 거 고거부터 내고 남은 건 야금야금. 오백이면 어머나 감사합니다 여행을 간다. 


일해서 얻는 소득 얘기가 아니라 공돈 얘기다. 쌔빠지게 번 돈은 느낌이 확 다르죠. 이건 공돈 그러니까 어디 땅에서 솟든지 하늘에서 떨어지든지 한 고런 돈인데... 네에?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아니지 성은 알겠지... 하여간 정체불명의 대고모님(그런데 대고모가 뭔가요.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무섭게 생긴 대고모만 알고 있다)이 유산을 덜컥 남겨준다던가 언제 산 건지 1도 기억 안나는 아모레 퍼시픽 주식이 갑자기 어디선가 굴러 나온다던가 하기 전에는 공돈이 생길만한 기회는 오로지 한 가지뿐... 복권되시겠습니다. 


복권하면 역시 로또인데, 고 로또라는 것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어휴 그때는 그 뭐냐 국민은행 창구에서 판매했고 사람들이 은행 밖까지 줄을 쫘악 서서 한참 기다렸다 사고 그랬거든요. 그러다 서서히 김이 빠진 건지 맥이 빠진 건지 예전처럼 들썩들썩하진 않는 고런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우얏든동 로또가 한참 날리던 그 시절 한 대여섯 번쯤 사봤던 게 전부인데...


얼마 전 그러니까 1월 말 그러니까 내 생일 아침 뜨끈뜨끈한 온기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허연 김과 구수한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것은 맙소사 이것은 똥꿈이다. 새하얀 변기 가득 무른 똥을 누었으며 얼른 항문을 닦고 싶은데 어머나 휴지가 모자라네? 그래서 없는 휴지 여차저차 어렵게 접어가며 두어 번 반복해 닦다가 똥이 손에 묻었고 그 손가락을 굳이 코밑에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으며 역시 내 똥냄새는 대단해 라고 생각하다 잠에서 깨었던 것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든 생각은 1. 앗 이것은 똥꿈 그 좋다는 똥꿈    2. 앗 오늘 내 생일    3. 복권 반드시 복권, 요거였습니다. 1,2,3이 순서대로 순식간에 주마등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속도로 머릿속에 다라락 지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4.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 나가니까! 


그리하여 불초소생은 입에 지퍼를 꾸욱 채우고 핸드폰을 집어 들어 네이버 지도를 켜고 근처의 복권 판매소를 검색하였던 것이며 여차저차 저차여차하여 난생처음 연금복권이라는 신묘한 물체를 천 원에 구입하였던 것인데... 데... 데...


여러분 이게 말이죠. 연금복권이라는 게 그러니까 아주 재밌는 물건이더만요. 1등에 당첨이 딱 되면 매달 500만 원씩 20년간 쭉 주겠다, 그래서 이름도 연금복권인 건데 야 저는 얼핏 얘기만 들었지 사본적이 없으니 이제야 알게 된 고 시스템이 매우 흥미롭더라 이겁니다. 월 오백에 열두 달이면 일 년에 육천이야, 육천씩 이십 년이면 일십백천 해갖고 십이억. 거기서 세금 22% 떼어가고요. 매달 찔끔찔끔 받기 싫다 일시불로 확 땡기겠다 하는 경우엔 세금이 33%이라는데... 어우야 22도 많은데 33을 떼어가면 좀 너무 그르타. 


하지만 한편으론 요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마흔둘이고 일등 당첨되면 예순두 살 때까지 매달 오백 공돈이 생기는데 그럼 아마도 나는 그 돈을 믿고 대충 느슨하게 뒹굴거리면서 살게 뻔하다, 왜냐면 그 돈이 없어도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데 어머 여기서 오백이 더 생기면 어머 나 확 타락해버릴 거야!(매우 신남) 하여간 그러다가 예순두 살의 어느 날 갑자기 오백이 뚝 끊기면 우와 나는 심각하게 좌절할 것이므로 고개를 도리도리 뺨을 찰싹찰싹 안됩니다 이건 안된다! 그래 33%의 세금은 매우 큰돈이며 대단히 아깝지만 그래도 한큐에 목돈으로다가 받는 게 좋겠다. 일단 대출을 갚은 후 그것을 종잣돈으로 뭐가 되었든 간에 하여간 그 무언가를 할 것이다. 


주변에는 되도록 알리지 않는 게 좋겠지. 그럼 어디까지 알려야 하나, 부모님과 언니네와 남동생네가 있고 남자 친구가 있고 또 이 사람이 있고 저 사람이 있는데 어우야 여기서부터 또 고민이 시작된다. 확 다 까놓고 나 얼마 생겼다 내가 쏜다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입 꾹 다물고 얌전히 있다가 누가 힘들어 보인다 할 때 오다 줏었다 하며 스윽 도와주는 게 좋을까... 고민은 고민을 응차 하고 낳고 그 고민은 다시 새로운 고민을 뽕야 하고 낳는다. 아아 부동산! 역시 부동산이지! 하지만 세계일주도 하고 싶어! 슬슬 무릎이 나가고 있으니 돈 팡팡 쓰면서 편하게 여행 다니는 거야! 근데 여행 갔다 오면 뭐 해 먹고살아? 그래 역시 부동산, 기승전 부동산! 


시간은 흘러 흘러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 드디어 디데이를 맞이하였고 나는 지난 일주일간 지갑에서 절대 꺼내지 않았던, 반으로 접어 고이 넣어둔 복권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 연금복권 사이트에 접속해 제293회 연금복권의 결과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0초 후



이런 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