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생일을 며칠 앞두고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다. 짧은 여행 대신 해외 여러 지역에서 단기 체류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우선 6주간의 실험을 시작한 것인데, 떠나기 전에 주위에 대고 제일 많이 한 말은 이거다. 에, 나는 20년을 꼬박 일했으며, 되게 고생했고 엄청나게 수고했으며, 치앙마이에 가서도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뭔가 콘텐츠를 만들 것이며, 당연히 노트북이니 뭐니 잔뜩 챙겨가서 일을 할 것이며 어쩌고저쩌고… 남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구구절절 이다. 결국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나 치앙마이 가서 좀 놀아야겠다’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놀러 가는 거 아냐, 정말이야 라는 변명. 아니, 내가 좀 놀겠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입니까. 남 멱살 잡고 돈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 변명은 남에게 한 것 같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정체불명의 죄책감 때문에 쭈뼛쭈뼛, 우물쭈물 내뱉는 변명.
어디 거창하게 먼 곳으로 긴 여행을 가는 게 아니어도 그렇다. 평일 낮에 일 대신 다른 걸 하려고 할 때마다 괜히 남의 눈치, 나의 눈치를 보며 변명한다. 대체 뭐가 그리 송구한지, 재미나게 놀면서도 재밌다는 티를 내면 욕을 먹을까 싶어 자체 검열하며 찌그러진다. 프리랜서로서, 1인 기업의 사장(겸 총무 겸 청소 담당)으로서 내 시간을 직접 조율해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바쁜 업무 사이 적절히 휴식을 취하는 건 꼭 필요한데도 그렇다. 왜 이리 쭈구리야?
치앙마이에 도착해 예약해 둔 숙소에다 짐을 풀고, 집안을 구석구석 살피며 점검한다. 어디 뭐 부족한 건 없는지 하나둘 메모해 근처 쇼핑몰로 장을 보러 가는데, 화장솜과 면봉, 욕실 슬리퍼, 생수와 탄산수 등 사소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잔뜩 사와 숙소 최적화 작업을 한다. 아, 치실도 사야지. 한동안 이곳이 내 집이구나 하며 착착 정리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싹 편해지고 기분도 확 좋아져야 하는데 에엥? 오히려 불안함과 우울감이 사정없이 밀려든다. 이제부터 어떡하지? 뭘 해야 하지? 귀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쿵쿵 울린다. 아니, 어쩌긴 뭘 어쩌고 하긴 또 뭘 합니까. 그냥 즐기면 되잖아요. 태국씩이나 왔는데, 치앙마이씩이나 왔는데. 남들은 못가서 안달인데.
하지만 남의 일이라면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련만, 정작 스스로에겐 그 말을 해주질 못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뭔가를 해내야 해. 재미난 콘텐츠를 뽑아야 해.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이 단기 체류의 가성비를 높여야 한다구! 그렇게 생각하니 6주가 갑자기 짧게 느껴진다. 헉, 남은 날짜가 겨우 이것뿐이야? 큰일 났어, 째깍째깍! 오늘 자고 나면 하루가 또 줄어드네! 째깍째깍! 당장 내일은 뭐 하지? 째깍째깍!
라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카톡 메시지로 전하며 한숨을 푹푹 쉬니 친구가 대답했다. ‘네 인생에서 그 6주쯤 마음대로 쓴다고 큰일 나지 않아.’ 그 말에, 응? 하며 눈이 떠졌다. 저, 정말? 계산하기 편하게 한 달이라고 치자. 길기도 짧기도 한 시간이다. 어디 보자, 일 년이 열두 달이니 우리가 여든 살까지 산다고 치면 총 960달. 한 달이 960개나 있는 셈이다. 꽤 많은데? 이 중에서 하나쯤은 내 마음대로 써도 되겠는데? 주 단위로 계산해볼까? 일 년은 52주, 여든 살까지 산다면 4,160주. 대단한 숫자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중 하나쯤 쓱 뽑아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쓸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한다. 놀면서도 계속 그다음을 생각하고 걱정한다. 휴가 이후를 생각하느라 벌써 화가 나 있고(출근하기 싫어어!) 벌써 겁이 나 있다(카드값 어떡하지?). 대체 우리, 왜 이런 겁니까.
그래, 놀자 놀아. 드디어 마음을 굳혔지만 계속 안달복달이다. 어떻게 놀아야 제대로 놀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며 남의 평가에 여전히 연연한다. 더 알차게 시간을 보내야 해. 치앙마이 구석구석 샅샅이 훑으며 숨어있는 곳을 다 가봐야 해. 그리고 리뷰도 남겨야 하고, 블로그와 SNS에도 사진을 오조 오억 장 올려야 해… 라며 마음이 바쁘다. 아, 정말 너무 바쁘다. 그동안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여행 중에도 항상 빡빡했다. 그래서 제한된 시간 내에 어떻게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야 했고,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야 했다. 인증샷도 물론 찍어야지. 패키지여행은 으레 ‘고객님들, 내일은 새벽 여섯 시에 로비에서 뵐게요’라는 인사로 시작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달려야 알찬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자유여행도 다르지 않은데, 인터넷을 박박 뒤져 정보를 닥닥 긁어서 유명한 장소와 맛집 리스트를 쭉 뽑아야 한다. 그리고 게임 퀘스트를 달성하듯 하나씩 지워간다. 시간이 없어, 계속 달려! 달리는 건 익숙하다. 어릴 적부터 채찍을 맞으며 달렸다. 학교에서도 달렸고 사회에서도 달렸다. 그래야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남의 인정을 받으니까.
그동안 여행작가로 활동하며 2~3주 사이의 여행을 주로 다녔다. 모두 알찬 여행이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열심히 준비했고, 열심히 돌아다녔고, 돌아와선 또 엄청나게 열심히 정리해서 여행 경비 본전 뽑겠다는 각오로 콘텐츠를 뽑아냈다. 내가 생각해도 일을 참 잘했단 말이지(코를 쓱 비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여행이었냐고, 휴가였냐고, 휴식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나의 여행은 빡셌어요, 이 한마디뿐이다. 그래. 지금 내가 넘치는 시간을 앞에 두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건 어쩌면 너무 낯설어서야. 심지어 이런 시간이 처음이어서야.
치앙마이에서 나는 인생 최초의 여행을, 휴가를,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막을 올렸고,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