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여행은 서툴렀다. 지금도 사소하거나 아찔한 실수를 잊을 만하면 저지르고 있지만, 그땐 정말 대단했다. 여권을 책상 위에 고이 놓아두고 당당하게 공항으로 향했으니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막 출근하려던 아버지가 내 급한 전화에 한숨을 푹푹 쉬며 김포공항(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의 이야기입니다)까지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첫 비행기고 첫 기내식이고 몽땅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글 다 쓰고서 전화 드릴게요…
지금은 적어도 그때보단 좀 낫다. 여행 횟수가 늘어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패턴이 생겼다. 패턴은 일을 쉽게 만든다. 계절에 적합한 여행지를 고르고, 눈높이와 주머니 사정 사이의 적당한 선에서 항공권을 사고 숙소를 고른다. 하루에 얼마나 돈을 쓰게 될지를 가늠해 대략의 경비를 계산하면 제일 중요한 준비는 끝난 셈이다. 짐을 꾸릴 때는 우선순위에 따라 필요한 것, 없어도 그만인 것을 나눈다. 여행지에 도착한 후에도 나름의 효율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데, 첫날이나 둘째 날엔 워킹 투어에 참여해 동네 분위기를 파악한다. 그리고 전통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고, 이 지역의 제철 재료와 주로 쓰는 향신료는 뭔지 알아본다. 음식을 좋아하니, 가능하다면 쿠킹 클래스에도 참여한다. 쇼핑은 여행 초반엔 잠시 몸을 사렸다가 일정이 절반쯤 지나갈 무렵 상큼한 기분으로 한 차례 하고, 막판에 숙제하듯 싹 몰아서 한 번 더 하는 식이다.
이런 패턴이 몸에 배니,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든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나에게 맞게 효율적으로 착착 움직이며 알찬 시간을 보낸다. 좋다. 편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재미도 흥미도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당황하지 않는다는 건 어딜 가든 설레고 흥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미지의 장소가 선물하는 당황스러운 짜릿함 대신 편안함과 안전함, 익숙함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를 먹은 만큼 현명해진 것일까? 아냐.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거야.
셀프 안식년을 부르짖으며 태국의 치앙마이로 휙 떠날 땐 일부러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거기에 뭐가 있고, 뭐가 유명한지, 뭘 꼭 먹어봐야 하는지 말 그대로 요만큼도 모른 채 무작정 와버렸다. 오랫동안 애써 쌓은 패턴을 내 손으로 툭 쳐서 와르르 무너트렸다.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래도 되나? 날씨가 좋고 바람은 선선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도 되나? 카페에서 책이나 읽고 있어도 되나?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걸어도 되나? 여행이란 알차야 하는 건데, 돈 들여서 왔으니 최대한 가성비를 높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나 지금, 시간 낭비 돈 낭비하는 거 아닌가?
시간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럴 땐 꽤 잘 듣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니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이건 여행이 아니라 사는 거야. 난 이 동네에 월셋집을 구해 이사 온 거야. 천천히, 주변엔 뭐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쓰레기는 어디에 버려야 하며 분리수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탁소는 어디에 있고 편의점과 마트는 어느 지점이 제일 쏠쏠한지, 근처에 서점은 있는지 하나씩 하나씩. 우리들 몫까지 재미있게 지내라는 친구들의 응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의 패턴을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앤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턴을 만들기로 했다. 새로운 여행과 생활의 패턴. 기존의 것에서 낡은 부분을 잘라내고 수정해 새로운 형태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치앙마이에서 한 코 두 코 뜨기 시작해 포르투에서도, 마드리드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꾸준히 떠나간다. 어느 도시에 가든, 처음 며칠간은 역시나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와, 여기가 어디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그때마다 치앙마이의 경험이 나를 토닥여준다. 이거 해봤잖아. 겪어봤잖아. 당황스럽고 외롭지만, 이런 감정도 다 지나간다는 거 알잖아. 이럴 때 뭘 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지도 알잖아(단것을 먹겠다는 뜻입니다).
이럴 땐 배경음악도 꽤 중요한데, 느리고 구슬픈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마저 그렇게 만들기 쉽다(여기에 PMS가 겹치면 아주 바닥을 친다). 포르투에서 지낸 지도 어느새 한 달쯤 되었을 무렵, 언제나처럼 카페에 앉아 입 꾹 다물고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 열린 문 바로 앞에 첼로 연주자 3인조가 자리를 잡더니 제프 버클리의 <Hallelujah>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실로 묵직한 힘이 있다. 순식간에 마음이 스산해지고, 겸허해지며, 인생 뭐 있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나는 왜 포르투까지 왔을까, 대체 혼자서 뭘 하는 걸까, 외롭다. 앞 테이블도, 옆 테이블도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나는 외롭다.
첼로 3인조는 어느새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찌잉 하는 첼로 소리에 화창한 초여름이지만 내 마음만은 겨울이 된 기분이야…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축축 처지려는데, 카페 주인이 벌떡 일어나 문을 닫고 들어와선 루이스 폰시의 <Despacito>를 스피커가 터질 듯한 볼륨으로 틀어제꼈지 뭐겠습니까.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지면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마구 흔들고 싶어지더만요. 사장님 여기 맥주 주세요.
제프 버클리도, 비발디도 잘못이 없다(물론 첼로 3인조도 마찬가지다). 그저, 내가 음악의 영향을 잔뜩 받아 나도 모르게 자기 연민에 푹 빠진 것이다. 짜르르하고 싸르르한 감정에 취하는 것도 과하면 곤란하다. 이럴 땐 음악이든 뭐든 바꿔서 분위기를 환기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내가 나를 응원하고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걸 배웠다. 이것 역시 새로이 습득한 패턴의 일부다. 자 또 시작이군, 지난번에도 겪은 그 혼란과 외로움과 울컥한 기분이 잊지도 않고 또 왔군, 하며 스스로 토닥토닥해준다. 불안하고 어두운 감정은 마치 PMS 같다. 때가 되면 오고, 다시 때가 되면 간다. 가능한 한 곱게 잘 보내주어야 한다.
나는 종종 허공을 향해 소리 내어 말한다. '어이구 그려요, 슬슬 외로울 때가 되었지요, 요맘때쯤 한번 울컥할 때가 되었어~ 그래도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도 살살 잘 지내보자고~' 라고 흥얼거리며 넋두리하듯, 남 얘기하듯 중얼거린다(반드시 혼자 있을 때 합시다). 그럼 어느새 흐흐 웃게 된다. 여행 중일 때든, 바쁘게 일할 때든, 번아웃 상태에서 회복 중일 때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살살 다독여 다스려야 한다. 잊지도 않고 또 오는 스트레스를 잘 구슬려 가며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
이게 가능해지려면 결국 마음의 기초체력과 유연성이 그만큼 받쳐줘야 한다. 하루 중 즐거운 일은 생각보다 적고, 그나마도 아주 짧게 후다닥 지나간다. 그 외엔 종일 무덤덤하거나, 멍하거나, 불안하거나, 울적하다. 한마디로 잠깐 즐겁고 내내 칙칙하다. 특히 일이 잘 안 풀릴 땐 더한데, 잘 나갈 땐 인생 참 짧게 느껴지지만 못 나갈 땐 하루가 더럽게 길다. 이 길고 칙칙한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마음의 기초체력을 키워야 한다.
한편, 두려움과 불안함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두렵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과 섹스할 엄두가 나지 않고, 탐나는 물건을 몽땅 사지 못하고, 해 질 무렵 낯선 골목 입구에서 망설이다 돌아 나오곤 한다. 한때는 그런 내가 답답하다고, 놀 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두려움이라는 감정 덕분에 나는 성병에 걸리거나, 파산하거나, 살해당하거나, 국제 미아가 되지 않았다.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본능이다. 그러니 이 감정의 사용 방법을 익히고 사이좋게 공존해야 한다. 두려움이 내 발목을 꽉 잡고 컨트롤하게 맡겨버리는 대신 자동차의 브레이크 페달 역할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운전 중에 항상 발을 올려놓아야 할 곳은 엑셀이 아니라 브레이크 페달이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중에도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 안의 경고등이 삐요삐요 울릴 때면 귀 기울여 들어본다. 단순히 낯설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선 물러서는 것이 현명할지 생각한다. 두려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을 나에게 맞는 속도로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