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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un 02. 2019

1.  학 쫓아버리기 축제 - 2


“뿌우웅~ 뿌우웅~뿌우웅~”

 

 드디어 고대하고 기대하던 축제 시간이었다. 뼛속까지 울릴 정도로 우렁차게 깔리는 뿔고동 소리가 언덕 위에서 평원으로 울려 퍼졌다. 그것을 난생처음 들은 이안과 수진은 몸을 통과하여 넘어가는 음파의 진폭에 놀라 저절로 움찔거렸다.

 

 군중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뿔고동이 놓인 언덕 위에서 한 병사가 학이 그려진 깃발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 옆의 다른 뚱뚱한 병사는 자기 몸집의 두 배는 될법한 뿔고동의 뾰족한 끝을 입으로 힘차게 불어댔다. 뱃속 내장까지 박박 긁는 것 같이 낮으면서도 웅장한 고동소리가 온 평원을 맹렬히 내달리며 사방을 진동시켰다. 흡사 약한 지진이라도 난 듯 모든 것을 떨게 만들었다.

 

“학이다! 학이 나타났다!”


“어서 밭으로 숨어! 아이들을 숨겨!” 


 흥분한 여러 명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수진 일행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드높은 기세를 자랑하는 만년설의 흰모자노인장과 그 뒤로 이어진 꼬부랑 봉우리들 위로 검은 점들이 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벌 크기 정도였다. 곧 그것들은 급속도로 자라나며 학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 광경을 처음 목격한 이안과 수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수십 마리의 학들이 긴 주둥이를 우악스럽게 벌려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힘껏 날아오는 모습이 흡사 공룡시대의 익룡 군단이 부활하여 지구를 침략하러 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긴 다리들이 날개 밑에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그 끝에 달린 유난히 큰 발톱들이 눈에 띄었다. 만에 하나 그것에 잘못 잡히는 날이면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언덕 위에서 흔들어대던 깃발 위로 내려와 발톱으로 툭 쳐버리자 그것을 잡고 있던 병사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그는 깃발 봉을 재빨리 빼고 천 끝을 모아 잡으며 임시 낙하산으로 변신시켰기에 추락사는 피할 수 있었다. 뿔고동을 불던 병사는 몸집과 달리 날쌘 동작으로 바위 밑으로 몸을 숨겼기에 화를 면하였다. 


 빠르게 돌진해오던 학 떼가 이윽고 옥수수 밭 상공에 도착하였다. 그것들은 빙빙 돌며 아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옥수수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딥언더니아인들이 저마다 시끄럽게 외쳐댔다. 그중 목소리가 가장 큰 남자가 악을 지르며 고함쳤다.


“으악, 밭으로 내려올 거야. 내려온다고. 모두 준비해!”


 그때였다. 허공에서 여러 마리가 목표를 정한 듯 몸을 날렵하게 탄도미사일처럼 가다듬어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밭의 참가자들 중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여 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어린아이조차 울지 않고 그것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유일하게 겁먹은 이는 오직 수진과 이안 두 명뿐 인 것 같았다.


 주위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눈을 감으면 마치 이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불현듯 숨이 콱 막혀왔다. 어서 피하든지 아님 공격하든지 뭔가를 해야 하는데 다들 아무 행동도 안 하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옥수수 사이로 몸을 숨긴 채 학 떼의 움직임만 주시하고들 있었다. 그것들은 계속 하강하여 정말로 이제는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하는 그런 고도에까지 접근해 내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학 쫓아버리기 축제’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공격이 없다니. 


 그녀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옆의 이안을 푹 찔렀다. 그러나 그 역시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말없이 고개를 돌리었다.

 

 학의 단단한 발톱들이 잠시 후면 옥수수 바로 위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붉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먹이를 찾는 그것들의 덩치는 가까이서 보니 소형 비행기처럼 거대했다.

 

 학의 외양은 다음과 같이 징그럽고 못생겼다. 삐쩍 마른 흰색 몸에 정수리 꼭대기는 꼭 피부병이라도 난 듯 털이 빠져 빨간 살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마에서 긴 목까지 걸친 부위와 꽁지는 숯처럼 시커멨다. 고르지 못해 삐쭉거리는 날개깃은 흰색이었는데 그 끝이 오돌토돌 검은색으로 보기 싫게 물들었다. 청록색의 날카로운 부리가 벌어지자 안으로 촘촘히 나있는 잔이빨들이 드러났다. 

 

 그것들은 하강을 멈추고 낮은 상공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밭으로 내려가기 위해 다리를 아래로 쭉 피고 날개를 넓게 펼쳐 하강 준비를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뿌우웅~ 뿌우웅~뿌우웅~”  “둥둥둥 둥둥~두두 둥둥둥~~~”


“와아, 와아!”


 갑자기 천지가 개벽한 듯 세상이 뒤집어졌다. 이안과 수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한꺼번에 뿔고동과 북소리가 팡팡 터져 나오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온 지면이 흔들렸다. 그들의 귀가 먹먹해졌다.  


 '학 쫓아버리기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동시에 군중들은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장화 신은 발을 힘차게 굴렸다. 이어서 수백 개의 허수아비의 팔이 요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에 장착된 창들은 학이 가까이 오면 찌를 거라고 위협하듯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옥수수 밭 위로 지나가던 리본들도 정신없이 춤을 추며 흔들렸다. 리본 아래 숨어있던 자들이 손에 쥔 나무 꼬챙이로 그것을 열심히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리본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고 하강하는 학의 시야를 교란시켰다.


 이안과 수진, 카할 역시 고함을 지르며 나뭇가지로 열심히 리본을 때려댔다.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가 자리하지 못하였다. 

 함께 힘을 합쳐 위험한 대항에 도전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용기와 자신감을 그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준 것이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가 갑자기 터진 이런 소동에 깜짝 놀란 학들은 돌연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마리는 여전히 겁먹지 않은 채 자세를 낮추어 꿋꿋이 밭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곧 그것의 발톱이 옥수수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밑에 숨어있던 딥언더니아인들이 뾰족한 창끝을 불쑥 세우고 작은 손도끼들을 힘껏 날리었다. 당황한 학은 발목이 잘리지 않으려고 속히 접으며 허둥지둥 전속력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따라 상공 멀리 떠나가 버렸다. 


 학 떼가 떠나자 온 땅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승리의 함성이 온 평원에 가득 울려 퍼졌다. 딥언더니아인들이 밭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막춤을 췄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북을 든 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열심히 두들기며 축제의 흥을 돋웠다. 본격적인 축제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한 명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노래의 멜로디는 간단했고, 가사는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도 따라 부를 정도로 쉬웠다.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가 가사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안과 수진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축제를 즐겼다. 생전 처음 만난 딥언더니아인과도 전혀 어색함 없이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냈던 것처럼 손을 잡거나 껴안고 볼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뿌우웅~ 뿌우웅~뿌우웅~”


 아까 들었던 낮은 뿔고동소리가 다시 주변을 요동쳤다. 학에게 차여 구릉 아래로 추락했던 병사는 어느새 다시 올라가선 깃발을 연신 흔들어댔다. 축제를 즐기던 자들이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학이 돌아온다. 어서 준비해!”


 떠난 줄 알았던 학 떼가 다시 이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 아무 일도 겪지 않았던 듯 그것들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허공을 맴돌다가 고도를 낮춰 밭으로 내려온다. 그럼 이쪽에서는 몸을 숨겨 조용히 기회를 엿보다가 그것들이 거의 다 내려온 최후의 순간이 되면 뿔고동과 북소리, 고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운다. 허수아비의 창이 휘둘러지고 리본이 반짝거리며 손도끼가 날아간다. 그럼 학들은 다시 놀라 파다닥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옥수수 밭에는 아까보다 더 시끄러운 축제판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총 3번 이런 식으로 학을 내쫓고 나자 이번엔 커다란 나팔소리가 온 평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음악이 뭔가 전투적인 것이 발을 맞춰 나아가고 싶은 행진곡이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밭을 가로질러 아까 카할과 아이들이 가보았던 경기장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대신 밭에는 옥수수를 지킬 최소의 병력만이 남아 보초를 섰다. 만약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밭의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어마어마한 수의 딥언더니아인의 행렬이, 아프리카의 물소 떼보다도 더 장관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일직선 대로를 빽빽이 채운 군중 속에서 이안과 수진이 큰 키로 인해 유독 눈에 띄었다. 


 드디어 토르의 망치를 건 운명이 걸린 ‘학과의 결투’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전해주는 충격과 두려움은 이전까지 그들을 전율시켰던 흥분과 열기의 도취에서 조금씩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태껏 일부러 피했던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구나 듣기만 해도 참으로 두렵다며 펄쩍 뛰고 두 손으로 힘껏 말릴만한 일이었다. 바로 다음과 같았다.


[저 무시무시한 학에게 낚아 채여 ‘요툰하임’으로 가야만 하는 참혹한 계획]

     

 다행히 둘의 마음속에는 아직 ‘용기’라는 불꽃이 약하게나마 타고 있었다. 축제에서 점화되기 시작한 그 불은 학을 처음 목격했을 때보다 담대하고 용감하게 그것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었다.


 경기장 앞에 도착한 카할은 결투 순서를 정하러 축제사무실로 먼저 뛰어가 버렸다. 이안은 나란히 걷던 수진이 점점 뒤처진다는 걸 알아채고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타이르듯 말했다.


“수진,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가지 않아도 돼. 응?”


“….” 


 대답을 안 하는 모양새를 보니 그녀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그는 다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니까 그리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아. 위험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래도 난 갈 거야. 떨리고 두렵지만 도전해볼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봐.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 그리고 나랑 카할이 항상 네 옆에서 보호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알아. 하지만 아까 축제를 겪으면서 알게 된 점이 있어. 직접 부딪쳐보지도 않고 무섭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야. 오늘 저들은 옥수수를 지키기 위해 어른이고 아이이고 힘을 합쳐 무서운 학을 쫓아냈잖아? 작지만 서로 힘을 합치면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거야. 내가 가면 아마 너희에게 짐이 되겠지.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야.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토르의 망치를 꼭 되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난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그녀의 말에 이안은 잠시 멍해졌다. 어떻게든 친구를 돕고 싶다는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전해져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홀연 그녀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아주 정중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 북적거리는 경기장 안으로 씩씩하게 나아갔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무시무시한 괴물이 다가와도, 마왕 블랙수트가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멀리서 카할이 그들을 발견하고 날쌔게 달려왔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겨우 진정되자 그가 흥분해서 외쳤다.


“우리는 8번째로 결정됐어. 그래도 처음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니? 결투는 20분 뒤에 바로 시작한데. 어서 가자.”


 그들은 ‘학과의 결투’에 나가는 용사들이 모이는 장소를 서둘러 찾아갔다.


 경기장 1층 오른쪽에 위치한 넓은 방안에는 벌써 20명 넘게 도착해 몸을 풀고 있었다. 모두 딥언더니아인으로 체구로 보나 얼굴 인상으로 보나 힘깨나 쓴다고 자랑하고도 남을 건장한 용사들이었다. 이곳이 결투장이 아니라 곧 미스터 대회가 열린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들 울끈불끈 솟은 알통과 근육질 몸매를 뽐내었다. 근육들이 옷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각이 지고 꾹 누르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각자 마지막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이는 도끼를 마치 부메랑처럼 던졌다가 다시 돌아오게끔 하는 기술을 연마하였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나가는 팀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괴상한 훈련을 했다. 서로 등을 딱 붙인 채 합체시켜 흡사 팔과 다리가 4개씩 달린 것처럼 한 몸으로 달리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네 손에는 창과 검, 방패 두 개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매우 용맹해 보였는데 부리부리하고 강렬한 눈빛만으로도 이미 학 여러 마리를 때려잡고 남을 정도였다. 


 또한 아이들의 눈에 확 띄는 자가 저쪽에 있었으니, 꾀죄죄하고 비쩍 마른 얼굴에 역시나 더 꾀죄죄한 염소수염을 땋아서 오렌지색 리본으로 묶은 용사였다. 아니, 용사라 부르기엔 근육이라곤 전혀 붙어있지 않아 빈약하고 나이도 많이 들어 보였다. 

 게다가 그가 하는 행동을 처음 봤을 땐 정신이 좀 나간 게 아닌가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는데, 길고 커다란 일자 빗을 끝에 매단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허공에다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었다. 똑같이 생긴 지팡이를 든 그의 젊은 동료 역시 그를 보며 열심히 따라 했는데 강약에 맞춰 부드럽게 또는 세게 긁는 모습을 취하였다.


 커다란 나팔 2개를 든 팀도 있었다. 어떤 용사는 조그만 돌이 가득 든 배낭을 등에 메고서 돌팔매질할 도구를 손질하였다.


 모두들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눈에 힘을 잔뜩 주어 주위의 경쟁자들을 노려보는 등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마치 눈싸움만으로 이 결투의 승패가 가려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고개가 별안간 한 곳으로 돌려졌다. 누군가 말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자동적이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작이었다. 그것은 어리고 약해 보이는 카할, 험한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이 귀티가 줄줄 흐르는 이안과 결투 역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여자 수진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이다. 놀라움으로 방안이 술렁이는 가운데 우락부락한 용사들의 레이저 눈빛이 그들을 찬찬히 살피었다. 그러다가 자기들끼리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어이, 여기는 어른이 하는 것이니 엄마 젖 좀 더 먹고 와야지?”

“어린것들이 겁도 없군. 무슨 유치원 소풍인 줄 알고 들어왔나? 얘들아, 학이 너희 유치원 선생님은 아니란다. 잘못 찾아왔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어허, 어른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그때였다. 빗 달린 지팡이를 갖고 연습하던 오렌지색 리본의 용사가 용케 카할을 알아보았다. 그는 비쩍 말라서 굵게 마디 진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꽤나 카랑카랑했는데 예전 기억력이 아주 정확한 것으로 보아 완전 미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너는 작년에 출전했던 애 아니냐? 이히히히. 올해도 작년과 같은 쇼를 부리려 다시 기어들어왔느냐, 이히히히?”


 그는 습관처럼 “이히히히”거리며 미친 자만이 낼 수 있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냈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고 애원하자 물어보지 않아도 다 말할 작정이었다는 투로 그가 말했다.


“작년에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뭔가? 아 글쎄, 학이 앞에 나타나자마자 저 놈이 결투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냅다 출구로 뛰지 않았겠어? 체구는 작아도 달리기 하나는 진짜 잘하더구먼. 딱 고양이에게 걸려 도망치는 생쥐 꼴이었지, 이히히히. 하지만 저 놈은 결국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지. 왜냐고? 묻지 않아도 다 알려줄 테니 좀 기다리라니까. 그날 저 놈이 신기록을 세웠거든. 학과의 결투가 개최된 이래 최단 신기록을 말이야. 기록이 어떻게 되었냐고? 딱 8초였어. 8초 동안 버틴 거지, 이히히히.”


“우하하하~~”

 

 방안은 순간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덩치가 산 만한 용사들이 불끈한 알통 팔을 휘저으며 손뼉을 치거나 자신의 몸을 때리었다. 어떤 이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댔고, 또 어떤 이는 하도 웃어서 눈물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카할의 얼굴이 순간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모욕한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안이 얼른 그의 팔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참아, 지금은 쓸데없는 일에 미리 기운 빼면 안 돼. 우리에겐 중요한 임무가 있잖아.”


 이안이 귀에다 대고 조용히 당부하자 그는 순순히 꾹 참았다. 그들은 어른들에게서 벗어나 조용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가는 도중에 수진이 카할의 손을 맞잡으며 그의 기분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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