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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y 12. 2019

1.  학 쫓아버리기 축제 - 1

1. 학 쫓아버리기 축제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오랜 전통을 가진 딥언더니아 왕국의 ‘학 쫓아버리기 축제’ 날이 밝았다. 


 무수히 많은 딥언더니아인이 지상의 옥수수 밭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거기에 끼어있던 카할과 이안, 그리고 수진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특히 두 아이의 머리가 군중의 바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에 그랬다. 미할과 그의 아내는 스위티니아 왕국에서 추가로 받은 주문을 제작하기 위해 올해 축제는 건너뛰기로 하였다. 오히려 아이들에겐 참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학과의 결투’를 관람하는 중에 카할의 어머니가 단번에 심장마비를 일으킬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차라리 남의 입을 통해 소식을 듣는 편이 나으리라 여겨졌다. 


‘축제’ 라는 단어에 걸맞게 잔뜩 들떠있고 시끌버끌 웃고 떠드는 주변과 달리 세 아이의 표정은 유독 어둡기만 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을 향해 조용히 걸어나갔다. 지나가던 행인 몇 명이 농담을 던져도 그들 중 아무도 쳐다보거나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어디 몸이 불편하냐고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들은 대답은 ‘괜찮아요’ 딱 네 마디였다. 


 특히 수진이 가장 불편해 보였다.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시퍼렇게 질려갔다.      

 사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머물라는 카할의 친절한 호의도 정중히 거절하고 다시 호텔로 되돌아온 이안과 수진은 미할이 만들어준 이동식 문잠금장치 두 개로 객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축제를 하루 앞둔 어젯밤, 그녀는 침대에 누웠지만 당체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참다못해 그녀가 몸을 바로 일으켜 앉았다. 마치 안에 돌덩어리라도 가득 집어넣은 것 마냥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부수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땅땅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잠시 미쳤지. 어디를 따라간다고 따라나서, 나서길. 거인들이 득실대는 곳에 가서 뭘 어쩌려고. 겁이 나서 도저히 못 견디겠네. 지금이라도 가서 못 간다고 알려야지.”


 그녀는 담요를 힘껏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금장치에 손을 대려는 순간 어둠에 잠긴 천장에서 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 감히 어딜 따라간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워 피우길?” 


 그녀의 눈앞으로 비죽거리는 이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웃는 그의 얄미운 표정, 계속 메아리쳐 들려오는 그의 거슬리는 웃음소리와 핀잔.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꽉 악문 채 다시 침대로 되돌아와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그에게 말 못 할 것 같다.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못 한다. 


 별안간 엄마와 할머니가 떠올랐다. 자존심이야 살다 보면 굽힐 때도 있는 거지만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 아닌가? 죽는 것보다야 자존심 한번 상하고 마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이런 결론에 이르자 그녀는 또다시 담요를 확 집어던지고 문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이번에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까지 살짝 열었다. 그러나 한 발을 내딛자마자 또다시 들려오는 이안의 비웃음 소리에 그냥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문으로 달려가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다가 이내 피곤해졌는지 침대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고, 눈을 떠보니 바로 오늘 아침이었던 것이다. 


 하루가 시작되고 이안과 카할의 비장한 얼굴을 보자 밤새 그녀를 괴롭혔던 망설임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어떻게 되겠지, 설령 죽겠어?’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잘 견디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막상 출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또다시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그 익룡 같은 학과 마주칠 생각을 하니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런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과 카할은 그저 옆에서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가끔 둘은 서로 눈짓으로 그녀를 주시하곤 했는데, 별 걱정 없어 보이는 그들도 사실 평소와 달리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의 심장도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의 30%는 요툰하임에 대한 걱정이었고, 나머지 70%는 전적으로 수진이었다. 그녀는 마법도 못 다루고 그렇다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전사도 아니고. 어제 오후까지 그녀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 정말 그들이 할 수 있는 애원과 협박이란 협박은 다 써먹어봤지만 결국 지금과 같은 결과였던 것이다.


 이안은 살짝 그녀를 훔쳐보며 생각했다. 


‘우리들 몸이야 스스로 지킬 수 있다지만 그녀는 어떡하지? 혹시 그녀가 잘못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떠나지 말고 남아있으라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볼까?’


 하지만 그는 저 황소고집을 꺾느라 진을 빼기보다는 당장 힘을 절약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대한 그녀의 안전을 지켜주고 만약 잘못되면 그건 그녀의 타고난 운명이리라. 


‘나는 할 만큼 했으니 그 이상은, 에라 나도 모르겠다.’

 



 출구를 덮은 옥수수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춰 들어와 동굴을 걷고 있는 이안의 얼굴에 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같이 보조를 맞추며 걷던 군중들은 햇빛에 흥분되어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곧 출구는 한꺼번에 몰려든 인파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안은 뒤에서 밀어대는 엄청난 압력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몸뚱이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옆의 수진도 마찬가지였고 카할은 어디에 가 묻혔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질서를 지키세요. 질서를!”


 참다못한 수진이 주변을 향해 크게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딥언더니아인들의 커다란 야유와 험한 욕설에 파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욕설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비신사적이고 정중하지 못하여 교양을 갖춘 독자 여러분에게 미처 전하지 못함을 간곡히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녀도 듣자마자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힘든 몸 겨루기를 겨우 견뎌내며 나오니, 그들의 눈앞에 천국이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사파이어 하늘. 그 아래 펼쳐진 푸른 옥수수나무들이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어 이리저리 수줍게 춤을 추었다. 마치 바다 밑에서 떠오른 초록 에메랄드들이 파도가 되어 살랑이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 드높은 기세를 드러내며 만년설로 덮인 산꼭대기인 '흰모자노인장'은 위풍당당한 모습 그 자체였다. 흐린 날에는 잘 보이지 않던, 그 뒤로 구불구불 이어진 봉우리들의 산맥이 웅장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위용을 마음껏 뽐내며 황금빛 태양 아래 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맑고 화창할 날씨는 아이들에게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걱정과 두려움을 날려버리고, 축제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조금씩 불러일으켰다. 군중들은 좁은 출구를 나오자마자 키가 큰 옥수수나무 사이사이로 금세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깔깔거림과 웅성거림은 비록 모습은 보이진 않지만 푸른 물결 안에 꽤 많이들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도 남았다. 가끔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으나 단 2, 3초 정도일 뿐이었다. 그 정도로 딥언더니아인의 움직임은 매우 날렵하고 재빨랐다. 


 이안과 수진은 사방으로 펼쳐진 옥수수 밭에 설치되어있는 낯선 장치들에 눈길이 쏠리었다. 


 짚으로 제작된 거대한 허수아비가 땅에 박힌 두꺼운 나무 말뚝 끝에 고정된 채, 옥수수 위로 불쑥 높게 솟아올라와 있었다. 대충 한눈에도 수백 개가 넘는 듯했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등 다채로운 색깔의 거대한 모자와 망토를 덮어쓴 그것들의 동글동글한 얼굴과 짧달막한 체구는 딥언더니아인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특이한 점은 허수아비의 양 팔 위로 날카로운 창 여러 개가 삐죽삐죽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장착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이안과 수진은 카할을 따라 파란 모자와 망토를 쓴 허수아비 밑을 지나갔다. 한 무리가 그 밑에 진을 친 채 웅성거리며 몰려있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에 과자나 사탕을 든 아이들이 나무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맥주를 돌리며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노란 모자와 노란 망토를 쓴 허수아비 밑을 막 지나려던 참이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긴 창들이 장착된 그것의 무거운 양팔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 기둥 여러 개가 그 밑을 떠받쳤는데, 그것들 중 하나를 차지하겠다고 어른들 사이에 뜨거운 신경전과 현란한 욕설전이 벌어졌다. 어디는 이미 패싸움으로 번져 어른과 아이 여럿이 땅바닥을 뒹굴면서 때리고 맞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수진이 의아해하며 카할에게 물었다.


“다들 왜 저렇게 난리법석인 거야?”


“나중에 학이 가까이 다가오면 저것을 들어 올려 팔을 움직여야 하거든. 그러면 거기에 달린 창들이 학을 위협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허수아비가 거대해서 팔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얻어맞아 코피를 줄줄 흘린 어른이 승리의 미소를 띤 채 기둥 하나를 겨우 차지하자, 뒤에서 응원하며 바라보던 그의 가족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다 같이 그 끝을 부여잡고서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럿 가족이 매달린 허수아비의 팔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공중에서 흐느적 넘실거렸다. 

 그들의 허리에는 날이 잘 갈린 호신용 도끼와 돌팔매 기구가 매달려있었다.      




 딥언더니아인이라면 누구나 일 년 내내 기다리고 고대하는 '학 쫓아버리기 축제'였다. 


 여기저기서 바비큐 연기가 올라오고 많은 이의 손에는 고기 꼬치가 들려졌다. 이미 자리를 잡은 이들은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 먹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다. 수진과 친구들이 축제 분위기기에 완전히 동화되어 아까 출구를 나오기 전까지 몸을 덮쳤던 경직과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서 다른 이들처럼 한껏 들뜬 기분이 되어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 소리도 점차 커지고 격렬해졌다.


 카할은 그들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불현듯 수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또 발견되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허수아비 사이로 가느다란 리본들이 옥수수 밭 위를 지그재그 가로지르며 팽팽하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중간중간에 세워진 쇠꼬챙이 끝에 묶이어 연결된 리본들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바람이 불면 그것은 옥수수를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는데 반짝이를 뿌린 듯 번득거려서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군중들은 밭 아무 데다 무작정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본을 따라 바로 그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나무 꼬챙이 두서너 개가 들려있었다. 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읽은 카할이 신이 나서 말했다.


“잠시 후면 알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아침 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지상 위로 떠올랐다. 축제날이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자태가 크고 황금 쟁반처럼 밝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푸른 옥수수 물결 위로 노란 광선이 연기처럼 흩뿌려지자 사람들의 얼굴과 몸이 누렇게 빛이 났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차차 건조해지며 상쾌해졌다. 


 카할의 말에 따르면 축제가 시작하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더 지나야 한단다. 그런데 그것도 명확한 게 아니란다. 왜냐하면 축제의 주인공인 학 떼가 멀리서 등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한 축제의 시작은 바로 학 떼가 등장할 때인 것이다.    



 그들 앞으로 높은 구릉이 나타났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놀라운 광경이 발밑 아래로 펼쳐졌다. 저 아래 분지 안에 어마어마하게 큰 경기장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흡사 정글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 겨우 발견된 비밀 사원 같이 성스럽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경기장은 위에서 보면 오각 펜타곤 모양으로, 거대한 바위를 납작하게 저민 돌벽들을 세워 건설한 것이었다. 건물을 이루는 회색 벽과 같은 재질로 닦여진 일직선대로가 구릉 위에서부터 경기장 입구까지 쭉 깔리고, 그 양 옆으로 ‘화이트커런트댄서’ 꽃이 길을 따라 심겨 있었다. 


 그들은 대로를 따라 내려갔다. 경기장에 가까워질수록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였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컸다. 경기장의 오각 펜타곤 천장 테두리 위에는 대리석으로 깎여진 인물상들이 각자 무기를 든 채 바깥쪽을 향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카할이 그것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거침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조그만 손도끼 하나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락부락한 얼굴에 두꺼운 입술을 크게 벌려 괴성을 지르는 모습의 입상이었다. 화려한 갑옷과 깃발이 달린 장대, 크고 그럴싸한 무기를 내세운 다른 상들과 달리 어딘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와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딥언더니아 최고의 용사 ‘막심’이야. 그는 저기 세워진 용사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지. ‘학과의 결투’에서 자그마치 43분 5초를 기록했거든. 여태까지 아무도 못 깬 최장 신기록이야. 들고 싸운 무기는 단지 저 조그만 손도끼뿐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43분이나 버텨냈다니 정말 대단하지? 

 하긴, 그는 도끼 말고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우렁찬 목소리였어. 그가 함성을 내지르면 학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막심을 우러러보며 혼자 좋아라하고 망상에 빠진 그를 남겨둔 채 수진과 이안은 길을 전진했다. 찌르면 실제 꿈틀거릴 것 같이 생생한 아나콘다의 활짝 벌린 아가리 모습으로 건설된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목구멍을 지나니 관중석에 둘러싸인 거대한 경기장의 내부가 나타났다. 그녀가 얼핏 보기에 텔레비전에서 보던 로마 콜로세움의 구조와 매우 비슷한 것 같았다. 물론 이곳의 규모가 훨씬 더 컸지만 말이다. 


 관중석 옆 복도 바닥으로 미스터리한 검은 구멍들이 군데군데 파여 있었다. 궁금해진 이안이 그것에 대해 묻자 카할은 대답했다.


“학이 관중석으로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을 피운 성화를 꽂는 자리야. 새는 불을 무서워하니까 가까이 오지 않거든. 그리고 관중석 뒤로 눈구멍이 나있는 꽉 막힌 덮개가 있는데, 이거 말이야.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야. 학이 달려들려고 하면 얼른 이것을 내려 몸을 보호해야 해.”


 그는 관중석 의자 뒤에 달린 ‘ㄱ’자 덮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용사뿐 아니라 구경하는 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위험이 도사리는 경기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들도 이젠 익숙해져서 더 이상 여기로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자신과 싸우기 위해 나온 장난감, 즉 용사가 경기장 무대에 있으니 주로 거기에만 집중을 하지.”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청소하거나 정리하는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카할이 갑자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경기장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겁고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대충 눈치챘겠지? 저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학과 결투를 벌일 장소야.”


 그 말을 듣자 축제 분위기에 가려져 거의 잊고 있었던 긴장과 공포가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금 샘솟기 시작했다. 이안은 급격한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긴 송곳니로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편치 않은 게 분명했다. 


 카할은 ‘학과의 결투’ 참가 등록을 해야 한다며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이안과 수진은 주위를 둘러보기만 할 뿐 서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등 뒤로 넘어간 빨간 핸드백을 배꼽 앞으로 끌어오더니 열고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두 마디 핀잔을 주었다.


“가방은 왜 들고 왔어? 안 그래도 몸무게도 무거운데.”


 그의 가시 돋친 표현에 그녀는 화가 났지만 날이 날인지라 침을 꿀꺽 삼키며 참았다. 그녀는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이건 아무리 집어넣어도 새털처럼 가볍거든. 혹시나 해서 몇 가지를 챙겨 왔어. 네 말대로 내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잖아?”


“무엇을 챙겼는데? 혹시 먹을 것만 잔뜩 넣은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거기 가서 굶을까 봐 걱정돼?”


“그런 거 아니야. 물론 먹을 것도 있지만, 무기도 있단 말이야.”


“거기 가서 굶으면 어떡하나 정말 조금도 걱정되지 않아?”


“걱정 안 돼. 그 정도 비상식량은 가져왔다고. 카할 것도 조금 있고. 너나 걱정하셔.”


“따듯한 피를 지닌 네가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이겠니?”


 불현듯 등짝을 따라 소름이 쫙 끼쳐오는 그녀였다. ‘설마 내 피를?’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핸드백을 찰칵 닫고 얼른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버렸다. 어른들 말씀 중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다. 물론 그의 말이 100퍼센트 진심이라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떨려오는 몸을 겨우 진정시킨 후 뒤돌아섰다. 그리고 살그머니 그의 표정을 살피었다.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못됐어! 계속 장난칠 거야?”


 그녀는 소리치며 핸드백으로 그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맞으면서도 정말 오랜만에 깔깔거리며 즐거워했고 그녀 역시 결국 너털웃음을 지었다. 


 위험한 결투를 앞두고 공포와 긴장이 많이 해소되었다는 건 말하기도 입 아플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축제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이 빠질 수 없음이 당연한 이치이다. 벌써부터 경기장 관람석 뒤쪽에서는 고기와 옥수수를 석쇠 위에 얹어 먹음직스럽게 굽기 시작했다. 노란 거품이 이는 맥주와 다양한 음료수가 컵들에 부어지고 있었다. 석쇠에서 나오는 짙은 회색 연기가 경기장 아래까지 휘감으며 내려왔다.

 

 카할이 흥분된 얼굴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까지 합쳐서 총 16팀이 ‘학과의 결투’에 신청했데. 결투 순서는 시작 바로 전에 정해지고. 제발 우리가 처음이 아니어야 할 텐데.”


“만약 처음이라면 결투 역사상 시작부터 완전 김새는 날이 되겠다. 그렇지, 카할?”


“그렇게 말이야, 이안. 딱 중간 정도가 좋은데. 다른 용사들을 보면서 우리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경기장 밖으로 나가려는데 저 뒤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요리사가 앞으로 달려 나와 구운 옥수수를 건넸다. 이안을 제외한 두 아이는 그것을 맛있게 먹으며 구릉을 넘어 허수아비가 꽂힌 옥수수 밭으로 되돌아왔다.     

 



 그새 축제 참가자 수가 훨씬 늘어났는지 인파를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이 겨우겨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나팔소리와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난리브루스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황금왕관을 쓴 스톰펌 왕의 요란한 행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앞장선 병사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채 끝이 길고 꼬부라진 갈고리 꼬챙이로 옥수수나무 줄기들을 바깥쪽으로 잡아당기었다. 그러자 양쪽으로 쫙 벌어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파란 망토를 머리까지 두른 이가 왕의 곁에 있었다. 그가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왕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깜짝 놀라며 수진과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이 군중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주다가 급히 방향을 틀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미리 예상하고 앞장서 길을 터놓았던 병사들이 그만 당황하여 후다닥 옆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행차보다 몇 발자국 앞서 다시 나무들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새로 난 길을 따라 왕과 파란 망토 입은 자가 나란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수진과 아이들은 캠프 폐막식 이후 왕을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쪽에서도 한 번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소금궁전에서 호텔로 신하를 보내어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봐주며 편의를 봐주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계획을 취소하고 싶으면 답장을 하라는 쪽지도 같이 전해왔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제까지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계획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또한 궁에서는 이안을 위해 매일 신선한 피를 제공해주었는데 그 역시 그 점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다. 


 왕은 강인하고 화끈한 성격과 함께 참으로 따듯하고 정이 많은 자였다. 이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다.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하나니, 그동안 그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차 버렸던 결정의 공은 마침내 아이들 발밑으로 떨어졌고 더 이상 그들 곁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왕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옆의 망토를 두른 이는 뱀파이어 ‘샤를르 리’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온 몸을 망토로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토 아래 드러난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서있는 이안을 매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왕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이안과 수진, 카할의 한 손들을 모아 자신의 두 손안에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가 자못 슬프고 무거웠다. 


“오늘 좋은 경기를 보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꼭 다시 만나자꾸나.”


 왕은 여전히 아쉬운 듯 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네었다. 그의 손은 참으로 따듯했다. 그리고 악단과 일행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던 샤를르 리가 갑자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급히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햇빛을 막기 위해 낀 그의 파란 장갑을 이안의 왼쪽 어깨 위에 얹은 채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곧 이안이 충격적인 표정이 되어 망토로 가려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손을 거두어 바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손으로 망토 윗부분을 들어 올렸다. 그가 미소 짓는 얼굴로 그들을 향해 활기차게 외쳤다. 참으로 세기의 미남처럼 아름다웠다. 


“모두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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