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이 점차 고조되며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방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상체만큼이나 기다란 황금색 중절모를 쓰고 화려한 황금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주변에 찬물이라도 뿌린 듯 금세 조용해졌다.
한 덩치 자랑하는 용사들 사이에서 그는 너무나도 왜소해 보였다. 손가락마다 굵은 보석이 달린 반지를 낀 그의 왼손이 재킷의 안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번 접힌 황금색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치 접는 부채라도 되는 양 그것의 끝을 잡고 앞으로 탁 던지자 따다닥 소리와 함께 단번에 펼쳐져 내려갔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소리로 명단과 결투 순서를 읽기 시작했다. 카할의 말대로 그들 일행은 여덟 번째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인원체크까지 끝낸 후 그는 종이에서 눈을 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이안 일행을 발견하곤 잠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이 아이들을 어쩔꼬.’란 눈초리였다.
그는 다시 종이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틀에 박힌 지루한 목소리로 결투 전 주의사항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와서 그런지, 마치 모자장수가 모자에 대해 자동적으로 칭찬을 늘어놓듯 그의 녹음기 같은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일정하게 이어졌다.
“학과의 결투에 신청해주신 용사 여러분, 먼저 딥언더니아의 위대한 스톰펌 왕과 만민을 대표하여 여러분의 사자 같은 용기와 독수리 같은 담대함에 진심으로 우러나는 응원과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노고와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결투에서, 다들 잘 알다시피, 본인의 부주의나 나쁜 운수 때문에 불가피하게 끔찍한 상황이 도래한다고 해도 저와 경기 진행자들, 딥언더니아 왕국은 일말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미리 분명하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이곳에서 학에게 잡혀 죽거나 부리나 날개에 차여 병신이 되어도 그것은 100% 결투에 참여한 본인의 책임이란 뜻입니다.
잠시 후 제가 호명하는 팀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종소리가 나면 경기장 무대로 바로 튀어나오면 되겠습니다.
결투에서 제일 중요한 '기록'은 여러분이 입구를 나와 학과 대면할 때부터 재기 시작하여 출구로 들어오기 전까지 걸린 시간을 측정한 것입니다. 즉 학과 결투를 벌이면서 흘러간 시간 전부를 말하지요. 기록들 중 최장시간 동안 버틴 팀이 오늘의 챔피언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도망쳐 들어올 출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문은 여러분이 나가는 입구가 되는 것이고, 경기장을 똑바로 가로질러 저 끝에 똑같이 생긴 문이 보이시죠? 바로 출구입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긴박한 상황에서 입구고 출구고 뭐 상관없습니다. 아무 데다 열린 곳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됩니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위대한 용사는 경기장을 가로질러 되도록 출구로 들어오려는 치밀함을 선보여 관중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내곤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각자 알아서 연구해왔겠지만 여러분의 무사무탈한 귀환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짧게 언급해보겠습니다. 절대로 학에게 등을 보인 채 몸을 웅크리지 마십시오. 이 자세는 ‘날 그냥 잡아가시오!’를 뜻하는 신호입니다. 아무리 위험하고 절박하더라도 이 자세는 피한 채 가능한 온갖 도구를 이용하여 몸을 최대한 크게 부풀리도록 하십시오.
작년에는 별로 기록이 좋지 않았습니다. 올해에는 우리를 깜짝 놀래 킬 수 있는 그런 성적들이 풍성히 나오길 기대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브라잇 동맹이 내려주는 크나큰 행운과 더불어, 동맹사에 영원히 기억될 무훈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중절모의 위치를 한 손으로 똑바로 잡더니 입구문을 통과해 부리나케 무대로 나가버렸다.
카할은 이안과 수진에게 몸을 완전히 웅크리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들이 어제저녁까지 죽도록 연습한, 아까 관계자가 이미 설명했듯이 ‘날 그냥 잡아가시오!’를 재촉하는 바로 그 자세였다. 특히 이안은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리느라 다른 둘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였는데 혹시나 큰 덩치로 학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었다.
밖에서 휘파람 소리, 웃고 깔깔거리는 소리, 떠드는 고함소리 등이 뒤섞이어 방 안으로 쉴 새 없이 흘러들어왔다. 이제 정말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불안과 호기심이 동시에 든 이안과 수진은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말없이 쪼르르 달려가 용사들이 곧 지나갈 입구 양 옆을 붙잡고 섰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빼내어 경기장 무대를 빼꼼이 들여다보았다.
아침에는 훤히 비어있던 그 많은 좌석들이 딥언더니아인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복도 바닥을 따라 꽂혀있는 성화들에서 기어 나온 노란 불꽃의 끝자락이 위로 높게 치솟았다. 그것들에서 품어져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경기장 내부를 비추자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전쟁터인 것처럼 꽤나 호전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분위기로 연출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의 주인공인 학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도 없었다. 경기장의 꼭대기 부스에는 커다란 북이 위치해있었다. 털이 부슬거리는 가슴을 훤히 드러낸 젊은 악사 여러 명이 동물뼈로 만든 북채로 그것을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두둥둥~두둥둥~두둥둥~”
웅장하고 신비로운 북소리와 함께 아까 황금색 중절모를 쓴 그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는 출구 바로 옆에 세워진 5층 단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단 꼭대기에는 커다란 전광판이 달려있는 일인용 중계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학의 침입을 막고자 사면이 막혀있고 무대 쪽으로만 상체를 드러낼 수 있도록 직사각형 창문이 뚫려있었다.
그가 창문 밖으로 몸을 쭉 내밀어 손에 든 중절모를 흔들어댔다.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북소리가 멈추자 그는 재킷 안에서 소라껍데기 마이크를 꺼내어 입에 갖다 대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그의 에너지 넘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온 경기장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여러분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바로 그 결투,
저 인간세상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백하며 매일 걱정병에 시달린 함빗(‘햄릿’을 잘못 알고 있음)을 단번에 치유시켜줄 바로 그 결투,
날갯짓에서 불어온 돌풍처럼 불현듯 닥쳐와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바로 그 결투,
용맹스러움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바로 그 결투,
잔혹하지만 관람할 맛 나게 흥미진진한 바로 그 결투,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바로 그 결투,
‘인생사,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란 진리를 냉혹하게 보여주는 바로 그 결투.
자, 이제 여러분의 비명을 계속해서 자아낼, 피 튀기는 바로 그 결투가 시작됩니다. 올해에는 총 16팀이 참가하였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그들이 죽도록 고생하는 모습을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럼, 딥언더니아 ‘학 쫓아버리기 축제’의 최고 하이라이트, ‘학과의 결투’를 지금 시작합니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황금색 중절모를 창문 밖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결투의 해설자로 거듭난 그는 좀 전까지 용사들 앞에서 왜소해 보이던 그가 더 이상 아니었다. 중계석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성화의 불빛을 한 몸에 받으며 황금 재킷을 반짝거리는 그는 마치 이 날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온 힘과 열정을 다해 강약을 넣어 피 끓는 목소리로 결투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정말로 대단했다. 관중석에서 또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너무나 우렁차서 귀가 얼얼하고 광풍이 시끄럽게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북이 위치한 경기장 꼭대기 한쪽에 설치된 조그만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할이 학을 유인하는 향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로 곧 한 무리의 학들이 경기장 위로 몰려들었고 상공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마리가 뻥 뚫린 지붕을 통해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어느새 무대 한가운데에는 옥수수 단이 깔려있었다. 학이 그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 또 한 마리가 날아와 그것의 바로 뒤에 섰다.
“첫 번째 용사, ‘파미르’가 나갑니다. 그의 주특기는 ‘도끼 부메랑’,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가 소개를 마치자마자 창문 옆으로 천장에서 내려온 줄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줄 끝에 매달린 작은 종이 힘차게 땡땡 울려 퍼졌다. 신호와 함께 처음 결투를 벌일 파미르가 용맹스럽게 무대로 뛰어나왔다.
그는 아까 방에서 도끼를 부메랑처럼 던지는 연습을 하던 자였다. 그의 허리를 감싼 가죽 벨트 양 옆으로 도끼가 하나씩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학들에게 바로 달려가지 않고 약간 거리를 둔 채 떨어져서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들도 그를 따라 같이 돌았다. 그가 멈칫하더니 순간 빠른 동작으로 왼쪽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 한 마리를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도끼가 부메랑처럼 허공을 쓱 가르며 날아갔다. 학은 처음엔 호기심 어린 붉은 눈으로 구경하다가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자 위협을 느껴 날개를 펴서 우아하고 유연한 몸짓으로 사사삭 피하였다.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도끼는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다시 파미르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는 좀 더 멀리 떨어져 빙빙 돌며 다음 기회를 엿보았다. 곧 도끼가 다시 세게 내던져졌다. 이번에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면서 학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학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것을 열심히 주시하다가 날카로운 주둥이를 벌리어 단번에 그것을 확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도끼를 자기 옆에다 훅 하고 내뱉었다. 그것이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당황한 파미르. 그는 급히 오른쪽 도끼를 꺼내어 다짜고짜 내던졌다. 아까보다 더 큰 도끼였는데 속도는 거의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학은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날개를 쭉 펴서 하늘로 살짝 떠올라서는 이번엔 부리가 아닌 발톱으로 날아오는 그것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용사를 갖고 노는 것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것은 첫 번째 도끼 옆으로 떨어졌다.
학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파미르를 응시하자 그는 열심히 준비해왔던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 되어버린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지었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 몇 초간 멍하니 있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뒤돌아보니 다른 학의 기다란 부리가 배꼽에 닿았다. 한순간 그는 그것의 부리 안에 사로잡혀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비록 그는 사라졌지만 검은 전광판에 황금색 글씨로 기록이 떠올랐다.
“10분 2초”
카할이 친구들에게 꽤 괜찮은 기록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파미르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아, 이런 안타까운 일을 어찌합니까? 결국 파미르는 저것의 밥이 되고 말았군요. 매우 아쉽습니다만 다음 팀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들은 매우 강하거든요.
쌍둥이 형제인 ‘카슈’와 ‘파슈’. 형제의 주특기는 ‘합체’라고 적혀있네요? 도대체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지만요."
종소리와 더불어 쌍둥이 형제 카슈와 파슈가 뛰어나왔다. 뛸 때마다 옷 밑으로 튀어나온 근육들이 피스톤처럼 일정하게 실룩거렸다. 방금 전 용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용감하고 당당하게 학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서로의 등을 맞대어 합체를 했다.
합체하자 팔이 4개, 다리가 4개 달린, 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새로운 생명체가 되어버렸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앞의 두 손에는 방패들을 들어 몸을 가리고, 측면으로 창과 검이 각각 튀어나왔다. 그들은 학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못 뚫은 것이 없다는 강렬한 레이저 눈빛을 쏘아대며 그것들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들은 연마해온 현란한 기술들을 이것저것 선보이기 시작했다. 합체된 몸을 팽이처럼 돌리자 창과 검이 믹서의 칼날처럼 매우 빠르게 회전했다. 무기가 회전하면서 나는 바람소리가 얼마나 거센지 아이들이 서있는 입구문과 관중석에까지 휙휙 들려올 정도였다. 회전이 끝나자 텀블링 기술을 선보였다. 앞으로 2번, 뒤로 2번 매끄럽게 텀블링하였다. 물론 몸이 합체된 상태로 말이다.
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형제가 보여주는 쇼를 열심히 관람하다가 이번엔 먼저 공격에 나섰다. 날카로운 부리로 그들 사이를 위에서 쪼개려 하자 두 방패가 위로 들려지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학이 여러 번 공격을 해왔지만 형제는 모두 막았다. 그들이 방패 밑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동안 또 다른 학이 무대로 날아 내려왔다. 그것은 낮게 날면서 발톱으로 땅을 질질 끌어 방패와 형제 모두를 쓸어 넘어뜨리었다. 그것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방패들이 바닥을 떼구루루 굴러갔고 그중 하나가 아이들이 서 있는 입구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형제는 무기들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이미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된 후였다. 형인 카슈가 급히 몸을 일으켜 동생을 버려둔 채 앞의 출구를 향해 달리었다. 하지만 파슈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누워있었다. 학이 부리로 그를 낚아채어 경기장 위로 날아가 버렸다. 형이 걸음아 나 살려라 달려 출구 안으로 들어오자 전광판에 기록이 떠올랐다.
“18분 56초”
이쯤 되자 수진은 카할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학이 멍청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상당히 영리한데. 우리는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었다. 옆에서 이안은 꽤 심각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학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 이들에게도 하늘의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군요. 동생은 떠났고 형만 살아남았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여러분에게 묻고 싶군요? 학들이 영리한 걸까요? 아님 우리 딥언더니아 용사들이 무식한 걸까요? 저렇게 현란한 합체 기술을 가진 형제도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요. 그래도 ‘희망’이란 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법이지요. 다음 팀에게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는 제발 좋은 기록이 나오길 진심으로 기원해봅니다.
다음 팀은 ‘무시무시한 사자’입니다. 그들의 무기는 ‘사자튜브풍선’. 엥? 풍선?”
해설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학과의 결투 역사상 튜브풍선을 가지고 나온 팀은 처음 본 것이었다. 그러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재빨리 종을 쳐댔다. 역시나 우람한 체격을 가진 두 용사가 공기 펌프와 쭈글거리는 튜브를 들고 입구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많이 나아가지 않고 조금 걷다가 바로 멈추었다. 한 명이 커다란 튜브를 땅바닥에 가지런히 펼쳐놓자 다른 한 명이 전속력으로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학들은 이젠 아주 즐기려는 듯 그들의 행동을 여유롭게 쳐다볼 뿐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공기가 들어가자 튜브는 쑥쑥 커지더니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얼굴과 오른쪽 앞다리를 쳐든 채 앉아있는 우람한 몸체로 변해갔다. 바닥에 대고 있는 사자 왼발바닥 밑으로 돌들이 매달려있어 풍선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방지해주었다. 사자는 거의 학과 대등한 크기였고, 색채와 모습마저 진짜인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자연스러웠다.
학들이 사자를 알아보고는 제자리에서 살살 뒷걸음질 쳤다. 관중석에서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이번엔 기록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인가란 희망으로 주변이 웅성거렸고 물결치듯 사람들의 머리통이 넘실거렸다. 해설가 역시 흥분하여 두서없이 마구 떠들어댔다. 그렇게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안타까워라, 그들의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으니 펌프가 갑자기 고장 난 것이었다. 공기가 풍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옆으로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한 명이 튜브 구멍을 펌프에서 때어내려다 조심하지 못해 바람이 또 한차례 “슈우윽~” 길게 빠져나갔다. 다행히 다른 한 명이 잽싸게 끈으로 묶어 더 이상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올려다보았을 땐 하마터면 심장마비에 걸릴 뻔하였으니, 공기로 꽉 차 있었을 땐 그렇게나 용맹해 보이던 젊은 수사자가 어느새 쭈글쭈글한 늙은 사자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용사가 끈을 풀어 황급히 입으로 튜브를 불었다. 허파가 터지기 일보직전에 구멍을 막고 위를 쳐다보았지만 사자의 앞다리 부분만 조금 팽팽해졌을 뿐 얼굴 주름까지 펴주지는 못하였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은 앉아있는 사자의 엉덩이 밑으로 몸을 숨겼다. 풍선으로 몸을 덮은 채 버틸 수 있는 한 끝까지 버텨볼 작정이었다.
늠름한 사자의 모습에 뒷걸음쳤던 학들이 점차 그것이 찌그러들자 용기를 얻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튜브풍선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도대체 이것의 정체는 뭘까?' 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살짝 건드려본다고 날카로운 주둥이로 콕 찔러보았다. 그러자 바로 풍선에 구멍이 생기며 공기가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그것은 이리저리 날뛰었고, 학들은 놀라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곧 용감한 한 마리가 그것을 통째로 들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등이 완전히 노출되자 용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가까이 있는 입구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모두 무사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기록은 아까보다 좋지 않았다.
“14분 49초”
다음으로 나온 세 팀은 별 특징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학에게 잡혀간 자도 있었고 팔이 부러진 자와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있었다. 점차 흥미와 재미가 사그라들어 좀 지루해질 무렵 어느새 7번째 순서가 되었다. 입구에 선 용사를 보니 바로 오렌지색 리본을 수염에 단 그 미치광이였다. 그는 무대로 나가기 전까지 옆의 카할에게 기분 나쁜 웃음을 연신 쪼갰는데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번엔 자그마치 5년 내내 결투에 나온 용사와 처음 나온 용사로 이루어진 팀 ‘오렌지 리본과 초보동료’ 입니다. 사실 다섯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오렌지 리본이 과연 제정신일 수 있을지 잘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그의 무기는 매년 바뀌었는데 올해 5번째로 들고 나온 무기는... 허 참, 독특합니다. 무기는 바로 ‘부드러운 빗질’!”
끝에 빗이 달린 지팡이를 각자 들고서 오렌지 리본과 초보 동료가 헐레벌떡 무대로 뛰어나왔다. 오렌지 리본의 눈에서는 광기가 무섭게 뻗어 나왔는데 가까이서 보면 이번에 또 지면 즉시 여기에 뼈를 묻어버릴 듯한 집념과 의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나 증오하는 학을 대하자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에 살짝 경련이 일고 입 옆으로 하얀 거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학도 그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저것을 먹으면 식중독이 걸리지 않을까 싶어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옆에서 벌벌 떠는, 멀쩡해 보이는 초보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렌지 리본과 동료가 다가오는 학을 향해 힘껏 달려가는 것이었다. 관람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점점 강해지는 북소리와 더불어 중계석에서도 용감한 그들을 응원하는 말들이 빠르게 내뱉어졌다. 경기장 내의 흥분된 분위기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히 고조되어갔다.
가까이 접근한 그들은 몸을 옆으로 낮추어 잽싸게 학의 긴 다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지팡이 끝의 빗으로 그것의 아랫배 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간지러움을 참다못한 학이 꺼억꺼억 울며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몸을 꼬아댔다. 학의 그런 모습은 관중들에게 처음이었기에 경기장 곳곳에서 또다시 커다란 환호와 찬사가 흘러나왔다.
어쩔 줄 몰라하며 몸을 비비 꼬던 학 옆으로 또 다른 학이 허공에서 무대로 내려왔다. 동료를 내버려 두고 오렌지 리본이 새로 등장한 학의 아랫배 밑으로 날렵하게 들어가 그것의 배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것 역시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날갯짓까지 펄럭이며 꺼억꺼억 울어댔다. 너무 울었는지 그것의 눈에서 눈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런, 무대로 또 다른 학이 내려와 착지를 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학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할 세 번째 용사는 없었다. 새로 온 학은 간지럼 때문에 맛이 간 두 마리를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그스름한 눈으로 이상스레 쳐다보았다.
이렇게 잘 되어가도 괜찮나 싶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운명’이란 것은 대부분 그렇듯이 가장 잘 나갈 때 그 꼴을 못 참고서 꼭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오렌지 리본보다 덜 숙련된 빗질 기술을 가졌던 초보의 빗이 하필이면 지팡이 끝에서 핑 돌더니 퍽 하고 땅에 떨어진 것이다. 빗이 없는 지팡이로 아무리 부드럽게 쓰다듬는다고 해도 꾹꾹 찔러대는 형국이었고, 아랫배에 찌릿한 자극을 느낀 학의 눈빛이 단번에 홱 뒤집혔다.
‘이놈아, 아파!’라고 짜증을 내듯 학이 날카롭게 울부짖자 겁이 난 동료는 지팡이를 집어던지며 가까운 출구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앞길을 딱 가로막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세 번째로 내려온 학이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부리로 그의 옷을 낚아채어 하늘 위로 붕 날아가 버렸다.
이제 오렌지 리본만이 두 마리의 학과 남겨졌다. 그는 열심히 빗질을 하였지만 다른 것이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에게도 만족을 주기 위해 뛰어가는데 그만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지팡이도 같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빗이 홀라당 빠지었다. 더 이상 그에게 비장의 무기는 없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는 판단이 재빨리 서자 그는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까운 출구를 놔두고 하필 먼 입구로 향하는 것이었다. 진짜 이때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기록을 위해, 그리고 관중 여러분을 위해,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먼 길로 우회하는군요. 용사들이여, 그를 본받으시오! 오렌지 리본, 어서 달리시오, 달려!”
아무것도 모르는 해설자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그때, 오렌지 리본의 앞과 뒤가 학들에 의해 가로막혀버렸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표현 그대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괜히 5년 내내 학과 결투를 벌이며 그동안 경험과 내공을 안 쌓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암튼 정말로 기막힌 생존 비법이었다며 몇 년 후 딥언더니아의 신문기사에까지 언급되었다는 점을 미리 한번 적어나 본다.
갑자기 오렌지 리본의 눈동자가 뒤집히고 몸에 심한 경련이 일더니 하얀 거품이 입 안 가득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은 학이 기겁하여 살짝 옆으로 길을 비켜주는 것이었다. 그는 경련으로 몸을 비비 꼬면서 거품을 입 안 가득 문 채 안전하게 입구로 들어왔고 바로 기절해 쓰러졌다. 하지만 기록은 여태까지 나온 것들 중 가장 좋았다.
“33분 50초”
경기장이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호응으로 들썩거리었다. 해설자는 소라 마이크를 입 앞에 댄 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결투의 흥을 더욱 돋웠다.
“학이 음식재료의 신선도에 꽤나 신경을 쓴다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는데.”
이안의 농담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나갈 순서가 되었던 것이다. 마음을 담담히 가지려던 노력은 다 물거품이 되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중구난방 꿈틀대는 것을 수진은 느낄 수 있었다. 옆에서 카할은 계속 침만 꼴딱꼴딱 삼키었고, 이안도 어느새 긴장된 표정으로 허공을 주시하였다.
“오렌지 리본은 6번째로 올해도 살아남았군요.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았지만 어쨌든 대단합니다. 기록도 가장 좋군요. 과연 그가 올해 ‘학과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까요?
자, 다음 팀은 ‘카할과 친구들’로서 오늘 출전하는 용사 중 가장 나이들이 어리답니다. 허허, 이런 곳에서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말이죠.. 그들의 무기는 우.. 엥? 여기 앉은 이래로 이런 건 처음 보는데요. 그들의 무기는 바로 ‘우정과 용기’랍니다. 이게 무슨 허파에 바람 들어가는 소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랍니까? 아마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겠지요? 아님 어린것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던가요.”
종소리가 운명의 순간을 알리기라도 하듯 그들에게 너무나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느릿느릿 경기장 무대로 나아갔다. 결투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이 참여했고, 또한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이 관심을 끌었는지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갈채와 응원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관중석 정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스톰펌 왕의 얼굴은 긴장이 되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도저히 못 볼 것 같아 눈을 감으려 해도 궁금하긴 한지, 양쪽 눈을 감았다 떳다를 반복하였다. 옆에 같이 앉은 샤를르 리 역시 애꿎은 망토 자락만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카할과 친구들은 학에게 조금 못 미쳐 걸음을 멈추고 서로 거리를 둔 채 띄엄띄엄 섰다. 그리고 어젯밤까지 열심히 연습했던 동작을 취하였다. 등은 하늘을 향하고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어 웅크리고 앉았던 것이다. 이들의 이상한 자세를 본 관중들이 웅성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굴러댔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주위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어갔다. 안타까운 그들이 마구 손을 휘저으며 온 몸을 흔들어 고함쳤다.
“어서 일어나, 얘들아! 웅크리면 안 돼!”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학들을 자극시켰는지 이게 웬 떡이냐 라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마리씩 커다란 발톱으로 한 명씩 낚아채서는 경기장 위로 쑥 올라갔다. 큰 몸집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던 이안의 걱정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세 명은 하늘 위로 날아올라 경기장 너머로 사라졌다. 번갯불에 콩 볶듯, 별똥별이 떨어지듯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관중석에서 미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이어 여자들과 아이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가슴을 내리치며 크게 통곡하였다. 충격을 받아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던 해설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후 소라를 입 앞에 갖다 대었다. 그의 무겁고 안타까운 어조가 합동장례식 같은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아, 그냥 이렇게 가 버렸군요. 아마도 방어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왜 ‘우정과 용기’를 무기로 썼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갔으니 덜 외롭겠지요? 저 빌어먹을 학들이 앗아간 가여운 영혼들을 위해 우리 잠시 눈을 감고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요? 모두 묵념!”
경기장 꼭대기에서 악단이 북소리를 약하게 깔아주는 동안 사람들은 떠나간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눈앞의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목격한 스톰펌 왕과 샤를르 리가 서로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연극의 무서운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 덤덤하게 앉은 채, 영혼이 아닌 그들의 무사귀환과 안전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