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는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졌다. 이제 황혼도 거의 사라지고 짙어진 어둠이 하늘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수진이 미리 자신의 핸드백 안에 챙겨 온 것들이었다. 이안 것은 그대로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걷고 걸어도 공중에서 보았었던 마을을 둘러싼 테두리가 어째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길을 잘 안다고 당당히 주장했던 카할조차 점차 확신이 서지 않는지 두리번거리거나 여러 번 걸음을 멈춰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 모습에 수진은 초조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들은 너무 지친 나머지 나무 그루터기에 쓰러지듯 앉아버렸다. 스산하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과 몸을 스쳐 지나가고 두려울 정도로 적막한 고요가 그들 주변을 감싸 안았다. 매서운 바람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갑자기 카할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왼쪽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도 불안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점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도 뭔가가 약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할, 들리지?”
“누가 우는 것 같은데.”
“분명 이안일 거야. 동물들은 이미 다 돌로 변해서 소리조차 낼 수 없잖아. 분명히 이안이 도와달라고 울고 있는 거야. 어서 가서 도와주자.”
그들은 그루터기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점차 소리는 커지고 가까이서 들려왔는데 계속 들을수록 이안이라기보다는 아기가 응애 하며 우는 것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내 그가 아니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대신 숲에 버려져 있을 아기를 찾기로 했다. 아기는 배가 무척 고픈지 아주 날카롭게 울어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었다. 소리를 따라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새 등 뒤에서 들려오고, 그래서 뒤돌아 다가가면 또다시 등 쪽에서 나는 것이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렇게 빨리 뛰어다닐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꼭 귀신과 술래잡기를 하는 느낌이 든 카할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제안했다.
“아기는 그냥 놔두고 떠나자. 뭔가 불길해. 울음소리도 기분 나쁘고.”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절대 그럴 수 없어. 이런 눈 속에 몇 시간만 있으면 아기는 얼어 죽을지도 몰라.”
지금은 저기 울창한 나무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다가갔다. 길쭉한 검은 그림자가 나무 뒤에서 얼핏 움직이는 게 보였다. 대충 보기에도 아기 혼자는 아니고 아마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가 한 손을 내밀어 되도록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세요?”
울음소리가 딱 멈추었다. 동시에 윙윙대던 바람소리도 멈추었다. 불길한 느낌이 더욱 짙어지는 가운데 나무 뒤에 섰던 그림자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의 움직임이 좀 불편해 보였는데 꼭 허우적거리는 듯했다. 이젠 주위가 완전히 어둑해져 모습을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밟는 발소리 대신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대는 소리가 섞이어 났다. 검은 실루엣에서 아기 울음이 또다시 흘러나왔다.
참다못한 수진이 핸드백에서 딥언더니아 스톰펌 왕이 주었던 램프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고 수정을 돌렸다. 그러자 수정에서 튀어나온 빛이 앞을 비추었고, 아이들의 입에서는 충격에 빠진 비명이 총알처럼 터져 나왔다.
“악!”
“으악!”
그들은 경악하여 바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뱀의 머리와 긴 목에 소의 얼룩무늬 몸체를 가진 흉측한 괴물이었다. 뱀과 똑같이, 세로로 긴 두 눈동자에서 초록 형광불빛이 순간 켜졌고, 긴 목이 위아래 옆으로 돌려지며 몸체 위에서 흐느적거렸다.
“응애, 응애, 응애~”
이럴 수가? 괴물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알아차린 카할과 수진은 그 자리에 마비된 듯 주저앉아버렸다.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었을 정도로 그것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물은 소꼬리를 흔들며 입을 크게 벌렸는데, 과장이 아니라 얼굴의 반이 사과처럼 양쪽으로 쭉 쪼개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빨간 수백 개의 촉수가 달린 혀가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날름거렸다. 혀끝에서 파란 침이 뚝뚝 눈 위로 떨어졌다.
“응애, 응애, 응애~”
겁에 질린 수진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카할이 허리에 찬 단도를 위로 치켜든 채 그녀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칼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괴물이 그들을 향해 돌진하려는 듯 목을 앞으로 쭉 내밀자 아이들은 잔뜩 웅크리며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까악!”
그때였다. 그들 뒤에서 불이 붙은 화살이 괴물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그러자 그것은 엄청 크게 울더니 뒤돌아 나무 뒤로 급히 사라져 버렸다.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얘들아, 다친 데는 없니?”
화살통을 매고 여전히 불이 붙은 화살 하나를 든 딥언더니아인이 그들 뒤에서 급히 다가왔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체형과 빈티 나는 얼굴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그제야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일어나 전혀 알지도 못하는 그를 단숨에 확 껴안았다.
“고맙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저희는 저 괴물 뱃속에 들어가 있었을 거예요.”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겨우 인사를 건넸다. 카할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낯선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침 목격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너희들이 만난 것은 ‘알유’라는 괴물이란다. 아기 우는 소리를 내서 유인한 후에 잡아먹지. 어떤 연유로 너희가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우선 나랑 같이 가자꾸나. 어두워지면 숲은 아주 위험해. 알유는 초저녁과 밤에 주로 활동하거든.”
그는 불붙은 화살촉을 횃불처럼 위로 치켜든 채 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혹시나 그를 놓칠세라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어둠의 장막이 완전히 내린 요툰하임 숲은 음산한 기운이 무척 강했다. 수진은 꼭 누군가가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종종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곤 했다. 그러나 커다란 나무들, 줄기와 가지 사이로 비치는 얼음처럼 차가운 별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는 중에도 그녀의 뒤통수는 계속 찜찜했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앞 남자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숲이 끝나고 조그만 공터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높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제일 꼭대기는 버섯갓 모양이었다. 갓 지붕 아래로 조그만 문이 하나 달려있고, 그 밑으로 나무판자를 밧줄로 엮어 만든 사다리가 아래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문 앞에는 진짜 발만 겨우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발코니가 있었고, 그 뒤로 나무문이 달려있었다.
남자는 간신히 발코니에 서서 문을 밀고 들어가서는 뒤따라 올라오는 수진과 카할의 손을 잡아당겨주었다. 다들 집안으로 들어오자 남자는 사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차곡차곡 접은 후 발코니 옆에 고정시켜 놓았다. 문은 거의 아파트 3층 높이에 위치해 있기에 사다리가 없으면 다른 동물이나 특히 알유의 공격은 거뜬히 피할 수 있었다.
바위를 파서 만든 실내는 복층구조로 넓고 천장도 높았다.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더니 옆에 쌓아놓은 장작들을 넣고 불을 피웠다. 어느 정도 불꽃이 타닥거리자 집안 공기가 따듯해졌다. 나무 가구들의 거친 겉면을 보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티를 더럭더럭 내었지만 테이블, 의자, 찬장, 침대 등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는 벽난로 앞바닥에 깔아놓은 털가죽 위에 그들을 앉히고 잠시 쉬라고 했다. 안전한 장소로 들어온 아이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이안이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알유의 공격을 받는다면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딥언더니아인은 장작불 위에 커다란 무쇠 솥을 걸고 물을 부어 고기 수프를 끓였다. 그리고 아래층 창고로 내려가 치즈와 빵을 꺼내 와서 테이블의 빈 접시 위에 놓자 수진이 칼로 그것들을 잘랐다. 카할은 국자로 수프를 저었다. 곧 맛있는 수프가 완성되자 그들을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단숨에 그릇을 싹싹 비웠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프를 더 떠주며 이름을 묻자 그들은 이름만 간단히 말한 후 수프를 계속 떠먹었다. 그가 자신의 그릇에 마지막 남은 수프를 따라 담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구나. 나는 ‘레빌’이란다.”
깜짝 놀란 수진이 수프를 꿀꺽 삼켰다. 카할은 스푼을 떨어뜨리고 바로 맞받아쳤다.
“혹시 ‘사기꾼 레빌’, 아얏~ 실례했습니다.”
그녀가 인상을 팍 쓰며 카할의 팔을 꼬집자 그는 아파하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을 구해준 분에게 사기꾼이라니, 그건 매우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수긍했다.
“맞아. 내가 그 레빌이지.”
“앗, 이럴 수가.”
카할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 주위를 왔다갔다 하며 뛰어다녔다. 매우 흥분한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자 레빌은 재미있다는 듯 혼자 낄낄거렸다.
“오랜만에 손님들이 있으니 사는 것 같군. 이래서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건가?”
그가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으나 아이들은 미처 알아듣지 못하였다. 카할이 그의 앞으로 달려와 양 뺨에 손바닥을 댄 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레빌, 당신이 여기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딥언더니아의 아무도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 여기지 않았거든요. 저 조차도 말이에요. 그런데 다 사실이었군요.”
“왜 여기로 돌아오신 거예요? 그래도 원래 살던 고향이 더 낫지 않나요? 저 징그러운 알유도 없고 말이에요.”
이어진 수진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생각이 정리된 듯 그의 눈이 반짝이더니 감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두 눈은 이미 눈물로 촉촉이 적셔져 있었다.
“고향이 좋기는 하다만, 사기꾼이다 거짓말쟁이다 라고 낙인이 찍힌 내 생활도 그리 편안치는 않았단다. 물론 예전엔 진짜 사기도 치고 거짓말도 했었지. 하지만 이곳 요툰하임으로 와서 겪은 일은 정말 다 사실이었어.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것을 믿어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지. 내가 지나가면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거나 욕하기 바빴어. 아이들도 내 뒤를 쫓아다니며 ‘거짓말쟁이 레빌’, ‘사기꾼 레빌’이라 놀려대며 돌을 던지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평생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떠나자. 타지에서 착한 친구들과 사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말이야. 그들은 나를 참 따듯하게 대해주었거든.
그 날 아침 바로 짐자루를 메고 옥수수 밭으로 나갔지. 다행히 학이 나를 낚아채 주었고 그래서 여기 다시 오게 된 거야. 예전에 나를 도와주었던 착한 친구 샨샨을 만나고, 지금 내가 사는 이 집도 같이 지었단다.”
“샨샨은 거인인가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카할이 테이블을 돌아 그녀 옆의 원래 자리로 가 앉으며 물었다.
“그렇단다. 참 착한 거인이지. 그는 여기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내가 처음 학의 둥지에서 추락했을 때 우연히 밑으로 걸어가던 샨샨의 어깨에 떨어진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지. 그리고 그와 동족은 되돌아온 나를 다시 따듯하게 맞아주었단다. 이렇게 먹을 것과 잠잘 곳까지 마련해주고 말이야.”
그때였다.
“똑똑똑.”
레빌과 아이들은 공포에 찬 눈으로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별안간 등짝이 오싹해지는 그들이었다. 이 밤중에, 사다리가 올려져 없는 마당에 도대체 누가 올라올 수 있단 말인가?
“똑똑똑.”
레빌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수진과 카할에게 테이블 아래 숨으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벽난로 옆에 놓인 장작 패는 도끼를 위로 쳐든 채, 한 발 한 발 조용히 문 옆의 조그만 창문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창문에선 밖의 발코니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입은 바짝 말라갔다. 그가 쭈뼛쭈뼛 문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수진, 카할, 나야 나.”
이럴 수가, 아이들이 그토록 걱정하던 이안의 목소리였다. 수진이 총알처럼 테이블 밑에서 튀어나와 레빌보다 먼저 도착하였다. 그리고 문을 안으로 확 열어젖혔다. 얕은 눈보라가 섞인 차가운 바람과 함께 그가, 이안이 서 있었다. 기적같이, 아니 숲에서 만난 의문의 아주머니 예언대로 그가 스스로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좁은 발코니 위에 겨우 버티며 서 있던 이안이 집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수진이 그에게 확 안기어왔다. 뱀파이어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힘으로 밀려 뒤로 넘어가 발코니에 매달릴 뻔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카할이 휘청거리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셋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레빌은 문을 닫으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냥 서 있었다. 소란스러운 만남이 진정되자 카할은 레빌에게 그를 소개했다. ‘사기꾼 레빌’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에 이안 역시 매우 놀라워했다. 수진이 ‘알유’에 대해 설명하고 혹 그 괴물을 만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나무에서 떨어져 밤이 될 때까지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깨어났어. 숲을 헤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운 좋게도 멀리 불빛이 보이지 않겠어? 불빛을 따라와 보니 바로 여기였어.”
“사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왔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레빌에게 그는 잠시 주저하며 답했다.
“기어서 올라왔지요. 전 뱀파이어거든요.”
레빌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다른 아이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그에게는 대답들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집을 지은 이유는 숲 어디든 올라가서 봐도 나무에 겹겹이 가려져 창문 불빛을 숨기기가 쉬었고, 또한 집을 받치고 있는 기둥바위 겉면이 대리석처럼 매끄러워 맨손으로 오르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 도착한 손님, 그것도 뱀파이어에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자신도 예전에 많이 해봐서 아는데 차마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리라. 누군들 구태여 머리 굴려가며 힘들게 거짓말을 하고 싶겠는가? 다 그럴만한 이유와 사연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레빌은 등잔을 들고 아래층 창고로 다시 내려갔다. 그가 키우던 쥐들 중 한 마리를 잡아 죽인 후 피를 유리잔에 받아내어 이안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배가 고팠는지 단번에 잔을 싹 비워버렸다. 레빌은 수프를 끓이던 솥을 옆에 내려놓고 조그만 냄비를 얹어 물을 부은 후 우유와 코코아 가루를 넣었다. 진한 코코아향이 온 집안에 달콤하게 떠돌자 다들 마법에라도 걸린 듯 냄비가 놓인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안을 제외하고 냄비에서 각자 컵으로 코코아를 떠 마시며 아까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샨샨을 포함한 거인 부족의 착한 심성을 침 튀겨가며 옹호하던 레빌을 향해 이안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물론 그들이 다 착하다고 여기시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거인들이 딥언더니아의 소금궁전에 침입해 죄수들을 죽이고 토르의 망치를 훔쳐갔거든요. 우리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이렇게 오게 된 것이고요.”
“토르의 망치를 훔쳐갔다고?”
레빌은 너무 놀라 입이 크게 벌어지고 입술 옆으로 코코아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가 앉고 있던 의자가 뒤로 쾅하고 넘어갔다. 그의 삐쩍 마른 뺨이 더욱 안으로 타들어가고, 주먹을 쥔 양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곧 분노에 찬 어조로 빽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