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진 일행에게 이야기를 돌려보자.
그들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거인의 목욕탕’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거의 다 지나쳤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그 너머로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자 카할이 두 팔을 휘저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요툰하임이야. 정말 대단한데.”
눈이 쌓인 나뭇가지들, 키 큰 관목들로 빽빽이 들어찬 거대한 숲이 구불거리는 강을 따라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이전에 보던 숲과 달리, 강한 원초성과 살아 움직이는 야생성이 푹푹 내뿜어졌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강렬함은 처음이었기에 숨이 턱 막히었다. 태고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살아온 요툰하임은 그 세월만큼이나 오랜 비밀을 간직한 듯,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고요한 침묵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맞이할지 아님 거부할지 결정을 내리려는 듯 잠시 고심하는 듯 보였다. 마치 비행장의 관제탑처럼 말이다. 그러는 동안 학들은 비행기처럼 잠시 상공을 선회했다. 이내 맞이하겠노라 허락이 떨어졌는지 그것들은 눈부신 숲으로 힘차게 내려갔다.
거인들의 고향이라는 ‘요툰하임’.
우거진 숲 위를 날아가던 아이들은 전설로만 듣던 이곳에 직접 오게 되다니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샤를르 리의 말대로 전설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학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몇 번 더 그러다가 겨우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이젠 날개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무게 때문에 우려했던 일이 꼭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자 그는 앞서 가고 있는 친구들을 다급히 불렀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던 찰나였다. 그를 쥐고 있던 학의 발톱이 갑자기 활짝 벌어졌다. 미처 손 쓸 새도 없었다. 그가 허우적거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우거지고 눈이 덮인 숲으로 빠르게 떨어지는 그를 향해 수진과 카할이 손을 내밀어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안 돼! 이안, 이안~”
그는 숲으로 사라졌다. 수진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 떨어지려는 듯, 있는 힘껏 온몸으로 발버둥을 쳐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잡고 있는 발톱이 전보다 더 조여들 뿐이었다.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자이기에 그녀처럼 대놓고 표현하진 못했지만 카할 역시 속으로 흐느꼈다. 이안을 제외하고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것도 요툰하임에 다 도착해서 말이다.
다행히 정신줄을 먼저 되찾은 카할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수진, 그는 뱀파이어니까 괜찮을 거야. 분명 살아있을 거야. 앗, 저기는, 봐봐, 마을이야!”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자 드디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빽빽한 원시림 한편에 뻥 뚫려있는 초원이었다. 눈 위로 파릇파릇 올라온 풀 위에는 거대하고 이상한 모양의 바위들이 놓여 있었다. 어떤 바위는 끝이 뾰족한 원뿔 모양이었고, 어떤 것은 바위 중간에서부터 위쪽으로 마치 버섯갓이 활짝 핀 것처럼 하늘로 퍼져있었다. 피라미드 모양, 아이스크림콘이 추락한 모양, 파도처럼 한쪽 끝이 말아 올라간 것 등등 다양하고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땅 위로 솟았거나 들쑥날쑥 세워져 있었다.
그런 바위 집합체에서 좀 떨어져서 나무기둥으로 쳐진 테두리가 성벽처럼 빙 둘러쌓았다. 자연히 그것은 숲과 마을의 경계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이색적인 풍경에 잠시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마을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하다가 갑자기 학들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은 그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학들은 이윽고 고도를 낮추더니 절벽 위로 가지를 뻗은 나무에 놓인 둥지들로 향하였다. 그 안에서는 어미보다 더 익룡 같아 보이는, 아직 털도 제대로 안 나와 시뻘겋고 징그러운 모습의 새끼들이 입을 쫑알거리며 어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날아오는 먹잇감인 그녀를 알아보자 새끼들은 온몸을 솟구치며 어서 달라고 신경질적으로 울어댔다. 상황이 정말 안 좋아지자 카할이 긴장하여 외쳤다.
“수진, 둥지로 가기 전에 얼른 빠져나와야 해. 안 그럼 저것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거야. 어떡하든 발톱에서 빠져나와!”
오래된 속담 중에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했던가?
그녀는 아까 추락한 이안이 새삼 부러워졌다. 저 징그러운 것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먹히는 것보다야 추락사가 훨씬 우아하지 않은가? 새끼들이 부리를 쫑알거리며 둥지 한가운데에 떨어진 자신에게 마구 달려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카할은 발톱 사이의 여유 공간으로 팔을 겨우 집어넣어 오른쪽 허리춤에 몰래 숨겨온 단도를 뽑아 발톱을 쿡 찔렀다. 학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바로 그를 내팽개쳤다. 그는 추락하여 나무들 밑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수진 역시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러나 아까의 발버둥으로 더 꽉 조이고 있는 발톱 사이로는 팔을 넣을 틈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옆구리에 놓인 핸드백까지 손이 닿을 수 없었다. 무기나 도구들이 다 그 안에 들어있는데, 꼭 필요로 하는 이때 아무 소용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할 노릇이었다. 정말로 빨리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둥지가 바로 코앞이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그리 좋지 못한 머리를 최대한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오렌지 리본의 대적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학이 간지럼을 탄다는 사실. 그녀도 경기장에서 비웃었던 그 기술을 한번 써먹어보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통하면 사는 것이고 통하지 않으면... 음... 너무 무섭고 비참하여 생각하기조차 싫다.
무조건 통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품은 채 그녀는 손톱을 세워 학의 발등과 발목을 살살 간지럼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개미가 기어가듯 그녀의 손톱 끝이 섬세하게 왔다 갔다 했다. 잡고 있던 발톱이 살살 흔들렸다. 분명 간지럼을 탄 것이리라. 그녀는 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내 참다못한 학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간지럼의 온상이던 두 발톱을 활짝 벌리고 말았다. 이 행동은 몸이 스스로 알아서 시킨 생리적 작용이었지 학의 의도는 절대 아니라는 걸 밝히고 싶다. 그것은 허공에 뜬 채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고 발을 부르르 떨면서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새끼들의 울음소리에 어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먹이는 밑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것은 다급히 내려와 나무 위를 스치며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학은 한동안 아쉬워하다 결국 다른 곳으로 사냥을 떠났다.
수진은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가장 높게 나 있는 나뭇가지를 덮은 눈에 푹 떨어져 튕겨졌다. 그다음 눈 가지에도 푹, 또 그 아래 눈 가지에도 푹,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여 겨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로 이어 그녀 위로 꽤 많은 나뭇잎과 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절묘하게도 학이 그 위를 두세 번 지나갔으나 다 모르고 지나쳐버렸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누워있었다.
“이제 나와요. 안전해요.”
걸걸한 여인의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놀란 수진이 얼른 눈 더미를 헤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낮은 바위 위로 한 중년 여인이 상체만 내민 채 기대어있었다. 수진은 이런 곳에서 사람을 다 만나다니 그저 신기하여 손을 흔들었다. 여인은 잔잔한 미소로 답했다.
바위 위로 드러난 그녀의 행색은 매우 별났다. 끝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 검은 머리 위에 하얀 보름달 모양의 접시가 모자처럼 비스듬히 씌었고, 파란 사파이어 단추가 박힌 초록색 스웨이드 코트를 입고 있었다. 깨끗하게 빛나는 피부에 온화한 듯 보이지만 한편 강렬한 카리스마를 자아내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컴퍼스였다.
그녀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어색해진 수진이 멀리서 먼저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전 황수진이에요. 아주머니는 여기 사시나요?”
“아니요. 잠시 여행 중이랍니다. 지나가다 그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달려왔을 뿐이에요.”
떨어졌다는 말을 듣자 수진은 아까 헤어졌던 친구들이 떠올라 얼굴이 찌푸려지고 당장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변하였다.
“전 바빠서 이만. 친구들을 찾아야 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서자 여인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다 살아있고 전혀 다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그녀가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뒤돌아보자 여인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컴퍼스 끝으로 숲 한쪽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한 친구는 스스로 그대를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다른 친구는 지금 저쪽에 있어요. 이름을 크게 불러 봐요.”
“이안, 카할, 이안, 카할!”
“수진, 내가 그리로 갈게, 기다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서 카할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그가 나무를 헤치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수진은 너무 기뻐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다시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부스럭 소리도 없이 정말 귀신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녀와 기쁨의 조우를 한 카할의 왼쪽 뺨 위로 나뭇가지에 베인 경미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방금 전 의문의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는 무척 놀라워하며 그 예언이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그녀는 이안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그는 마을로 가는 방향을 잘 알고 있으니 자신만 따라오라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깊디깊은 원시림을 헤치며 나아갔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빽빽한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겨우 길을 비추어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노을빛으로 바뀌면서 눈 바닥은 차차 붉게 물들어갔다.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터였다. 밤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다. 거인이 생활하던 숲이어서 그런지 수목들의 키가 상당했고, 어떤 건 나무통이 수진 같은 아이 세 명이 손잡고 둘러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눈을 비집고 삐죽 솟아난 거친 풀 사이로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뿌드득 뿌드득~”
눈을 밟는 그들의 신발 소리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마치 넓은 이 세상에 그들과 하늘, 나무, 풀, 눈, 돌 밖에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고요함이 이랬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카할은 도중에 언제부터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무척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그녀 쪽을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근데 수진,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너무 조용하잖아.”
“숲이 조용하지, 그럼 딥언더니아 원형광장처럼 시끄럽겠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숲인데도 새 한 마리 울지 않잖아? 다람쥐도 없고. 하물며 사슴이나, 오면서 짐승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잖아? 넓디넓은 이곳에 우리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기분 나쁘고 이상하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왜 이리 돌이 많은 거야? 크기도 다 제각각이고. 밟을까 봐 피해 다니느라 아주 힘들어 죽겠어. 아얏!”
그녀는 바로 앞에 놓인 회색 돌을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눈 위로 쓰러져 무릎을 다치진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자신을 괴롭히다니 한꺼번에 짜증이 확 밀려드는 그녀였다. 분풀이를 하려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째 해괴한 게 좀 이상했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세히 관찰하던 중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눈 위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머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좀 더 큰 돌로 다가가 그 앞에 주저 않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충격적인, 이젠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한 얼굴로 카할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완전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아까 걸려 넘어진 돌에는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어. 지금 이것은 토끼 모양이고. 앗, 저 건 새잖아? 그리고 그 앞에 누워있는 건 여우 모양이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카할은 그의 왼쪽에 놓인, 자신의 몸 크기와 거의 대등한 돌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곰 새끼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수진, 우리 주위의 돌들이 다 동물 모양을 하고 있어!”
“도대체 왜?”
“모르겠어. 하지만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아. 어서 빨리 이 숲을 떠나자. 어서 빨리!”
그들은 앞으로 뛰면서 가능한 한 돌에 닿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조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어떤 나무 밑으로 조그만 자갈들이 한 움큼 쌓여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녀는 자갈 하나를 슬쩍 집어 눈 가까이 대어 보았다. 꿀벌이었다. 그 자리 바로 위 나뭇가지에 허물어진 벌집이 매달려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로 섬광이 번뜩하고 내리쳤다.
“카할, 이것들은.. 이것들은 조각이 아니야. 진짜 동물들이었다고. 여기 벌들도 저 벌집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돌이 되어버린 거야. 앗,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아님 살기로 둘은 정신없이 달렸다. 웬만하면 돌을 건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발에 밟히거나 차이면 마치 전기가 흐르듯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어 넘어질 뻔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 혹시나 그들도 이와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해가 지고 숲으로 몰려드는 어두움의 숨결처럼 극한 공포가 어느새 그들의 몸과 정신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