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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y 09. 2021

11. 망토를 두른 남자와의 만남 - 2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이 크게 들리어왔다. 이안의 목소리였다. 순간 그녀의 정신이 바짝 들더니 눈앞이 번쩍였다. 좀 전의 별별 생각과 변명들이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이 힘들거나 위험해지면 먼저 달려와 도와주던 친구들인데 이렇게 배신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이미 여기까지 고생을 같이 했는데 마지막까지 함께여야만 한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마음을 다잡는 중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너의 친구들이 지금의 너라면 분명 여기에 남기를 원할 거야.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은 자기 몸을 위하는 게 본능이고 당연한 거거든. 아주 이기적인 존재들이야, 인간이란 게. 그러니 양심을 부추겨 그리 고심할 필요는 없어.”


“친구가 저를 불러요.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이미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그때마다 친구들이 저를 도와주었죠. 그들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신은 재미로 그랬다지만 생명이란 건 장난이 아니에요.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라고요. 우리 외할머니는 항상 과자나 빵부스러기를 챙겨서 마당에 뿌리곤 했어요. 새들이 와서 먹으라고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유니세프에 매달 기부를 했고요. 생명이란 것은 그렇게 당신 맘대로 소홀이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에요. 전 망치도 되찾겠지만 당신이 건 돌마법도 꼭 풀 거예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당당히 큰소리치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미로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어느새 그녀 앞을 가로막은 그가 손을 내밀어 뭔가를 주려고 했다. 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자 은빛을 발하는 조그만 열쇠가 놓여졌다.


“오늘 내 이야기를 들어준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야. 나중에 이것을 써볼 기회가 생기길 바래.”


“무슨 열쇠예요?”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아, 그리고 돌마법은 방울을 깨뜨리면 저절로 풀릴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쇠를 쥔 채 미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거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몸을 돌려 환한 보름달을 향해 섰다. 가려진 모자를 투과하여 달을 바라보고 있는 듯 그의 얼굴이 고정된 채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문득 옥열매가 매달린 나무기둥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쓱 하고 나타났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안다는 듯 신경 쓰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꿈틀대더니 그에게 말을 건넸다.


“혼란스러워 보이는군요. 그녀와... 많이 닮았지요?”


“그래, 성격이 많이 닮았어. 나한테 큰소리도 다 치고.”


“정말 그래요. 그녀도 그랬었는데. 벌써 아주 오래 전의 일이군요.”


“그러나 나에겐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지냈는데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그림자가 주저하는 어조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아까 그 소녀를 만났지만 당신의 계획은 여전히 유효한 건가요?”


“내가 받은 걸 그대로 되돌려줄 예정이지.”


“재고의 여지는 전혀 없으신 건가요? 저리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그의 입술이 찌그러지며 대답하길 거부했다. 그 모습에 그림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황금 달빛 아래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틀어 올린 머리 위로 보름달 모양의 흰 접시가 모자처럼 비스듬히 씌어있고, 사파이어 단추를 단 초록색 스웨이드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바로 수진이 요툰하임숲에서 만난 적이 있는 별난 행색의 그 중년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 뒤로 뭔가가 붙어져 질질 끌려 나왔다. 뱀의 몸뚱이였다. 


 그녀는 몸과 꼬리를 꿈틀거려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한 손에 든 컴퍼스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파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하였다. 




“수진, 수진, 잠 좀 깨봐!”


 이안이 소파에 누운 그녀를 흔들어댔다.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뜨니 카할과 레빌, 이안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반만 뜬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망토, 보름달, 옥, 장미.”


“웬 잠꼬대야? 어서 잠을 깨라니까. 왜 이렇게 못 깨어나고 그래?”


“꿈이 아니야, 이안. 진짜 같았어. 저기 저 벽이 열려서 밖으로 나가니 장미로 가득한 미로가 나타났고, 옥이 달린 나무에서 그를 만났어. 보름달이 아주 노랗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통나무 벽으로 달려 나갔다.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가며 가물가물 떠오르는 곳을 꾹꾹 밀어보았지만 열리기는커녕 그냥 딱딱한 벽이었다. 오히려 너무 힘을 주어 손가락이 아파올 정도였다. 그녀가 호호 손가락을 불자 그들은 전보다 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얌전히 소파로 돌아와 앉으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소파 방석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놀란 카할이 손으로 그녀를 저지하며 애원했다.


“수진, 다 꿈이야. 이제 그만하고 앉아.”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사냥개처럼 카펫 주위를 기어 다니며 뒤졌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고 순간 그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이거야. 이 열쇠, 그가 준 거라고. 이것 봐봐, 난 꿈을 꾼 게 아니야.”


 그녀가 은빛을 발하는 조그만 열쇠를 흔들어대며 자신이 겪은 일을 흥분한 상태로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그저 잠꼬대로만 여기던 그들은 열쇠라는 물리적 증거와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는 꽤 흥미가 생긴 듯 보였다.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우리가 훔치려 온 걸 뻔히 아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바보가 어디 있냐?”


“뭘 들은 거야? 아직 한 가지 시험이 더 남았다잖아? 공룡보다 더 위험한 건가 봐.”


 그녀의 대답에 레빌의 얼굴은 급 어두워졌다. 전보다 더 위험하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그는 생각조차하기 싫었다. ‘자신은 왜 이리 지지리도 복이 없을까.’ 그는 한탄에 한탄을 하였다. 카할 역시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마지막으로 커다란 한방이 남은 것이 분명했다. 이안 역시 그다지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만났다는 그 망토 두른 자가 그의 신경을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꿈이든 아니든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말을 건넸다는 게 영 불쾌했다. 그가 그녀를 기다렸다니, 정말 안 좋은 징조였다. 


 이안은 두려운 마음을 애써 누른 채 소파 주변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다들 그가 다음 행보를 정하기 위해 좋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려 단호하면서도 무거운 어조로 알렸다.


“지금 여기서 철수하자. 이건 함정이야. 토르의 망치는 포기하고 떠나자.”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생고생을 해가며 여태까지 버텨왔는데 이제 한 단계만 남겨놓고 떠나자니. 자신의 불운(不運)을 책망하던 레빌조차 화가 치밀어 분통을 확 터트렸다.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지 않니? 나의 명예회복이 걸린 일인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둘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 토르의 망치는 딥언더니아로 가지고 가야 해. 원래 우리 것이었으니까. 시험 하나만 이겨내면 되잖아. 좀만 버티자, 이안, 응?”


 카할도 그의 손에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하지만 그의 결연한 표정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망토 두른 자가 우리를 이리로 부른 건 바로 수진 때문이었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우리를 요툰하임으로 유인한 거야. 망치는 그저 수단에 불과한 거였어. 그리고 그에게 있건 없건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 수진이었다. 자신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불퉁한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왜 나를 만나려고 해?”


“그건 모르지. 아무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그가 그랬다며? 너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럼 이야기는 끝난 거지. 목표는 바로 너였던 거야. 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지금 철수하는 게 옳아. 어서 떠나자. 빨리 가요.”


“나의 안전을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난 사양이거든. 여기까지 죽기 살기로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어. 난 꼭 망치를 되찾고 방울을 깨뜨려서 마법도 풀 거야.”


“수진, 지금 그의 정체를 대체 알고나 하는 말이야?”


 이안이 무서운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그녀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놀라 입이 짝 벌어졌다. 순간 송곳니가 튀어나온 뱀파이어의 모습으로 그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본연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씩씩거리며 이어 덧붙였다.


“마왕 블랙수트야! 그가 내가 아닌 너를 불러낸 거라고. 너를 선택한 거라고, 이 바보야!”


 수진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녀는 딥언더니아의 스톰펌 왕에게서 같이 사연을 듣고 나서도 그와 그를 서로 연관 짓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카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레빌이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카할을 툭 치며 물었다.


“마왕 블랙수트 라니? 동화책에 나오는 이였나?”


 카할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곧 시끄러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레빌의 표정이 정말 유령처럼 새하얗게 변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나처럼 쪽박 인생도 없지. 하필 걸려도 그런 무시무시한 놈한테 걸리다니. 내가 미쳤지, 따라오길 왜 따라와. 얘들아, 미안하지만 이젠 정말로 포기하고 돌아가련다.”


 도대체 돌아간다는 말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는지 그 자신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목숨에 비하면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확 열어젖혔는데, 앗 이럴 수가, 정말로 믿기 싫은 끔찍한 악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 벽돌벽이 딱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만 충격에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들도 크게 눈을 치켜뜬 채 다가와 벽을 이리저리 만지고 발로 차보고 힘껏 두들겨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몇 시간 전에 들어왔었던 입구는 꽉 막혀버렸다. 


 다들 표정이 심각한 가운데 가장 어두워 보이는 이안이 굳게 다문 입술을 겨우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는 수밖에...”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궁지에 빠졌다는 느낌이 아주 짙어졌다. 그리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과연 이처럼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왕의 능력과 마법을 당해낼 자가 브라잇 동맹에 몇이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서 안전한 곳으로 탈출해야 한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사이 수진은 충격에 흐느적거리는 레빌을 부축해 소파로 데리고 와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카할은 어쩔 줄 모른 채 레빌과 이안으로 시선만 계속 옮길 뿐이었다. 


“수진, 우리가 찾는 것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


 이안이 이내 결심한 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레빌에게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리며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지하무덤에 있다고 했어, 방울도 같이.”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다잡은 카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여긴 지하실이 없어. 1층에는 주방과 거실만 있다고.”


“분명 그가 그렇게 말했어!”


 그녀가 소리치자 이안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확실한 거야. 이곳 어딘가에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는 거지. 흩어져서 찾아보자.”


 그들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카할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이안은 복도를, 수진은 거실을 샅샅이 살펴봤다. 겨우 정신을 차린 레빌은 이젠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기우뚱거리며 그녀를 도와 거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벽난로 앞 소파에 다시 모여들었다. 다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할이 씩씩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없어. 서랍장과 싱크대, 오븐, 냉장고, 마룻바닥까지 다 살펴봤지만 없다고.”


“복도에도 전혀 이상이 없던데.”


“거실도 마찬가지야. 그냥 선반에, 그냥 벽난로에, 그냥 바닥에.”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파들 아래 깔린 하얀 카펫을 주시했다. 그리고 목청을 높였다.


“앗, 카펫 밑은 아직 조사 안 했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안과 카할이 소파들을 구석으로 급히 끌어냈다. 레빌이 끝에서부터 카펫을 말았고 그녀는 달려와 그를 도왔다. 카펫이 절반쯤 걷어지자 바닥에서 약간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부분은 정확히 벽난로를 마주한 긴 소파가 놓인 바로 그 자리였다. 수진이 잠들었었던 그 의자 말이다. 얼핏 보면 관 모양을 띠기도 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이안이 그 부분의 경계 밑으로 손바닥을 집어넣어 바닥판을 들어 올렸다.


 뿌연 먼지가 날리고 돌계단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밑으로 쇠 손잡이가 달린 철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카할이 잽싸게 내려가 손잡이를 위로 잡아당겼다. 


“끼이익, 끼이익.” 


 녹슨 철판이 파르르 떨리며 위로 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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