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니아로...”
중얼거리는 이안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몸을 겨우 일으켜 앉는데 머리가 띵한 게 기분이 안 좋았다. 그는 주저하는 듯하다가 할 수 없이 품 안에 보관해둔 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쓱 쳐다보더니 안에 든 미적지근한 붉은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시자마자 온몸에 온기가 싹 도는 게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해졌다.
‘거인의 피라서 그런가? 효과 만점이군.’
그는 붉은 성에서 혼자 방으로 들어가 발로르의 피를 받아낸 병의 뚜껑을 닫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방금 꿈에서 다시 재생되었지만 이것은 그때 샤를르 리가 부탁한 물건이었다. 토르의 망치를 되찾은 후 바로 그를 찾아갈 예정이었는데 그만 여기서 한 모금 슬쩍 마시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펜카르의 피를 담은 병 하나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완전히 기운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과 레빌은 아직 꿈나라 중이었다.
그런데 앞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하여 옆의 친구들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먼저 일어나 앉은 카할에게 그는 소리쳤다.
“큰일 났어!”
그가 고함을 지르자 레빌과 수진도 눈을 뜨더니 겨우 일어나 앉았다. 다들 연탄가스라도 마신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몸이 쑤시는 듯 찌뿌둥했다. 그녀는 앉은 채 잔뜩 찌푸린 눈으로 이안을 째려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앞에 세워진 비석에서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진짜 성이 되었잖아!”
그랬다. 잠이 들기 전까지는 검은 비석에 새겨진 성의 정면이었는데 어느새 커다란 성으로 변해있었다. 검은 성의 창문들에서 푸근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굴뚝 위로 회색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곳의 대문에 맞도록 그들의 몸이 엄청 작아져버린 것이었다. 바닥의 무덤돌은 축구장만큼이나 넓어졌고 비석은 몇 층 높이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비석의 측면 너비는 그대로 얇은 채였다.
그들은 겨우 몸을 추스른 후 비문 아래 세워진 대문으로 다가갔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포도송이 문손잡이가 삐끗거리며 문이 스스로 안쪽으로 열리었다. 안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을 받으며 그들이 들어가자 문은 다시 삐끗거리며 무겁게 닫혔다.
그 안은 동화책에 나올법한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홀이었다. 부드러운 황금 양털로 짠 카펫이 바닥에 깔려있고, 수십 개의 초가 꽂혀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홀 천장에 매달려있었다. 도자기로 만든 귀여운 아기천사상들이 벽면과 천장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장식되었고, 또 하얀 도자기로 구워서 만든, 여러 개의 옷장과 찬장, 서랍장, 책장 등 가구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하얀 공단 커튼이 열 개는 족히 넘는 창문마다 가지런히 묶여 내려왔다. 홀 한쪽에는 역시나 하얀 도자기로 만든 원형 티테이블과 의자들이 깔끔히 배치되었다.
그 뒤로 황금 카펫이 깔린 하얀 계단들이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그 계단 끝에는 커다란 대리석관이 놓여 있었다. 관에는 둘레를 따라 탐스러운 장미들이 조각되었고, 관 뚜껑은 완전히 열리어 관 뒤에 비스듬히 세워진 채였다. 그들은 두려움을 안고서 천천히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채 몇 발자국도 못 떼던 바로 그때였다.
“아아앙~”
하품하는 숨소리가 관 속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그리고 관 위로 허연 막대기 두 개가 불쑥 올라오더니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경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수진은 자신이 아직 잠이 덜 깨었나 싶어 손으로 뺨을 때려보았지만 불운하게도 꿈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윤기 나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두 팔이었다.
“도대체 저것들이 뭐더냐?”
레빌이 기절할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잠시 후 관 안에서 뭔가가 벌떡 일자로 일어났다. 그들은 너무나 놀라 움찔하며 머리카락과 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것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얀 도자기 인형이었다.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와 오동통한 몸집, 가슴 부분에 리본 장식이 있고 레이스 소매를 달아 화려한 로코코풍 드레스를 입은 소녀 인형이었다. 인형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몽롱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앙증맞게 튀어나온 코와 붉게 칠해진 얇은 입술, 핑크로 볼터치가 된 인형의 얼굴은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였다. 그러자 긴장한 그들의 굳은 몸이 조금씩 풀어지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갔다.
살아난 인형은 폴짝 관을 뛰어넘은 후 카펫이 깔린 계단을 차분히 내려왔다. 그런데 희한한 광경이 또 하나 포착되었다. 인형의 꽉 조인 허리 아래로 풍성하게 펼쳐진 드레스 뒷자락이 끊임없이 연결되며 관에서 각티슈처럼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형은 그물 같이 펼쳐진 도자기 치마로 관과 연결되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 계단 위로 딱딱한 치맛자락이 길게 늘어져 마치 관과 연결된 도자기 통로가 치마 내부에 세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올려다볼 때는 잘 몰랐었는데 아래에서 보니 키가 상당히 컸다. 3미터가 훨씬 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얇은 허리가 이안의 키의 거의 두 배 정도에 위치해 있어, 비율적으로 유난히 긴 치마 길이를 지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두 눈은 물감으로 그려져 감을 수 없었고, 딱딱한 도자기 피부로 인해 얼굴에는 늘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만 입술을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는 한 명 한 명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밝게 환영인사를 건넸다.
“이 성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전 ‘레이디 포터리 (Lady Pottery)’에요. 여기 앉으세요. 어머머, 내 정신 좀 봐. 아직 준비도 안 해놓고 냉큼 초대부터 하다니. 저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급히 찬장으로 미끄러져 다가가더니 찬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영국식 최고급 찻잔세트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높은 의자에 겨우 올라와 앉은 그들 앞으로 꽃문양 손잡이가 달린 하얀 찻잔과 받침을 내려놓고 하얀 개인 접시와 도자기 티스푼 등을 그 옆에 배치했다. 다시 찬장 쪽으로 돌아온 그녀가 옆의 다른 찬장문을 열자 허연 김이 푹 새어 나오며 조그만 간이부엌이 나타났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티포트와 우유, 설탕을 들고 와서 각자의 찻잔에 붉은 홍차를 부어주고 기호에 맞게 우유와 설탕을 넣어주었다. 그들이 차를 마시는 동안 다시 부엌으로 간 그녀는 화이트 초코를 묻힌 비스킷과 체리파이가 든 도자기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 중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도자기와 도자기가 부딪치며 실로폰 비슷한 소리를 내자 레이디 포터리의 입술에 경련이 일고 몸이 살짝 떨렸다. 그 소리를 매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지만 딱딱한 허리를 접을 수 없어 그냥 수진 옆 빈 공간에 꼿꼿이 서 있었다. 테이블이 높아 그녀가 차를 마시기에 큰 불편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찻잔에 차를 붓고 우아하게 받침까지 같이 든 채 입술에 갖다 대었다. 여러 번 입술로 가져갔지만 수진이 슬쩍 곁눈질하니 그녀의 차는 줄어들 기미가 없어 보였다.
‘마실 수가 없구나.’
수진은 내색하지 않은 채 비스킷을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씹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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