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dy Hwang 황선연 Dec 19. 2020

11. 망토를 두른 남자와의 만남 - 1

11. 망토를 두른 남자와의 만남


 은색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은 깊은 산속에 있을 법한 산장 안의 거실이었다. 굵은 통나무로 지어진 이층 산장은 투박한 인테리어와 가구들로 채워져 편안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전의 긴장감과 불안이 점차 가라앉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실의 한쪽 벽에 위치한 커다란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앞으로 하얀 모직 카펫이 바닥에 깔려있고, 그 위로 붉은 방석이 깔린 소파들이 놓여있었다.


 그들은 난로를 향해 놓인 정중앙의 긴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잠시 불을 쬐었다. 곧 몸이 따듯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벽난로 위 벽면에는 생동감 있게 박제된 곰과 사자머리가 걸려 있는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새가 흡사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들처럼 느껴졌다. 노곤해져서 졸리기까지 한 레빌이 혼잣말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나 원 참, 이젠 평범한 집까지.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분명해.”


 그들은 움직이기 싫은 몸을 겨우 추스르며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로 나간 후 계단 옆으로 나 있는 문을 열어보았다. 식당이었다. 투박하고 녹이 슨 램프불이 올려진 식탁과 의자들이 있는데, 놀랍게도 따뜻한 음식들이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탐스럽고 싱싱해 보이는 포도가 담긴 바구니, 막 구웠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애플파이와 스콘이 예쁘게 놓인 나무쟁반, 그리고 하얀색 도자기에 붉은 장미가 그려진 티팟이 있었다. 티팟 주둥이에서 하얀 수증기가 뿅뿅 세어 나왔다. 각자 자리 앞으로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찻잔이 있고, 그 옆으로 개인접시와 포크, 나이프, 버터와 잼이 든 조그만 접시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완벽하게 세팅된 4인용 티타임 전용 식탁이었다. 누구보다도 먹을 것 앞에서 자제력을 잃는 수진이 가장 먼저 달려가 자리에 앉아 노랗게 잘 구워진 스콘을 한입 베어 물었다. 


“안 돼, 먹지 마! 혹시 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안이 후다닥 달려와 그녀의 손에서 스콘을 뺏으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잽싸게 손을 허리 뒤로 내빼어 안 빼앗기려고 버텼다. 결국 그가 방심한 사이 나머지 스콘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고 바로 꿀꺽 삼켜졌다.


“너무 맛있다. 먹고 죽어도 나 혼자 죽을 게. 지금 너무 배가 고프다고. 그리고 잘 봐봐, 누군가 우리가 올 줄 알고 이렇게 찻잔 수도 다 맞춰 준비해두었잖아.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게 먹어줘야지, 안 그래?”


 기분 좋게 말하며 그녀는 티팟을 들어 앞에 놓인 찻잔에 커피를 따라 부었다. 긴가민가 의심이 가던 카할과 레빌은 오 분이 지나도록 멀쩡한 그녀를 보더니 성큼 자리를 잡고 앉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들에게도 직접 커피를 따라주었다. 이안은 성이 난 표정으로 그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위층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식당 밖으로 뾰로롱 나가버렸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식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음식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지저분한 부스러기가 식탁에 가득 떨어져 있었다. 배불러서 둔탁해진 눈빛들이 그를 향하자 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층에는 이상한 점이 없어. 그냥 침실들뿐이야.”


 배가 너무 불러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 레빌이 뒤뚱뒤뚱 그의 곁을 지나치며 말을 흘렸다.


“저기, 한 시간만 자고 수색하면 어떨까? 이층 침실에서 잠 좀 자고 내려와야겠다.”


 뒤따라 카할과 수진이 반쯤 감긴 눈으로 식탁에서 일어나 좀비처럼 엉성하게 걸어 나왔다. 카할은 레빌과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지만 수진은 따듯한 벽난로가 좋아 그 앞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리고 이안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는 단잠에 빠져있었다. 몸을 덥혀주던 앞쪽의 난로 온기는 거의 사라지고 발이 놓인 아래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기분 좋게 일어나 앉은 그녀의 얼굴과 몸으로 달콤하면서 상큼한 장미향을 간직한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그녀의 두 눈이 살며시 떠지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만이 이 산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았다. 또다시 장미향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불어오는 거지?’ 


 호기심이 든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옆 벽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일일이 벽의 통나무 사이의 틈새를 만져보다가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두 손으로 힘껏 밀자 따그닥 소리와 함께 벽의 삼분의 일이 분리되며 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콤한 향이 물씬 밀려오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뒤로 확 퍼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장미 나무 덤불로 만들어진 미로 입구에 서 있었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넝쿨이 단단히 엉키어 빼곡히 미로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별이 총총히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막대사탕을 닮은, 알록달록한 얇은 지팡이 끝에 올려진 둥근달 모양의 가로등들이 미로 사이에 띄엄띄엄 낮게 세워져 있었다. 밤인데도 장미 한 송이 한 송이가 매우 탐스럽고 색깔이 뚜렷한 게 무척이나 싱그러워 보였다. 


 수진이 미로 앞에서 흡족한 마음으로 꽃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불현듯 그 안에서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로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처음에 주저했지만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키보다 몇 배 높은 미로였지만 그것을 휘감은 장미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고귀한 향기로 인해 지나가는 내내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곧 미로가 끝나자 밤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구릉과 평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둥근 보름달이 나지막한 언덕 끝에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녀가 태어나서 본 수많은 보름달 중 지금 것만큼 크고 밝은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쟁반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쟁반 안으로 언덕 위의 나무 한 그루가 들어가 있었다. 달그림자로 검어진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낸 채, 나무는 길게 늘어진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그녀를 유혹하였다. 그녀는 최면에 걸린 듯 언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옥구슬이 떼구루루 구르거나 서로 부딪쳐서 나오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세세한 윤곽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누군가가 거기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진이 더이상 다가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는 서서히 몸을 돌리더니 팔짱을 낀 채로 그녀를 향하였다. 순간 불어오는 미풍에 나뭇잎들이 흔들렸고 그 틈새로 황금 달빛이 내려와 그를 비추었다. 검은 망토로 가려진 몸은 날씬하고 단단해 보였으며 긴 챙모자 아래 드러난 하얀 턱은 티끌 없이 맑고 투명했다.


 둘은 잠시 서로를 관찰하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번개가 번쩍이었다. 혹시 레빌이 말한, 방울을 흔들어 생명체를 돌로 만들어버린 그자가 아닌 가 싶었다.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기대었던 나무 둥지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가 상당히 훤칠했다. 그가 신고 있는 유명 브랜드의 검정 운동화가 유난히 튀었다. 


‘나도 돌로 만들려고 그러나?’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던 찰나, 그는 멈추더니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하여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무에서 다시 옥구슬 소리가 났는데 왠지 구슬프고 스산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어색해진 나머지 뒤돌아서려 했다. 


“어서와, 수진. 널 기다리고 있었어.”  


 그에게서 허스키하면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너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제 이름을?”


 질문을 하면서 그녀의 눈이 솔방울처럼 커지고 입술은 살며시 벌어졌다. 겁이 나서 몸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름을 알고 있어서 놀랐나 보군. 넌 나를 모르겠지만 난 너를 알고 있지.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


“처음이 아니라고요? 그럼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단 말이에요? 언제요?”


 그녀가 토끼 같은 눈으로 언성을 높여 꼬치꼬치 캐묻자 그의 입술 끝이 살며시 올라가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붉은 입술 아래로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들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거의 가려진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와 친구들이 토르의 망치를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것도 알고 있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는 회피했다. 하지만 그녀는 토르의 망치란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그가 알고 있다면 일은 다 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순순히 돌려주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걱정으로 찌푸려지고 가슴은 막막해졌다. 그가 별안간 떠오른 듯이 물었다.


“아, 내가 주방에 준비해 놓은 것은 잘 먹었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얼떨결에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너무 배가 고팠거든요.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어요. 준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의 아래턱이 살짝 흔들리더니 화통하게 웃기 시작했다. 저음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다시 근사하게 들려왔다. 왠지 그가 그렇게 나쁜 자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이 그런 생각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다.


“재미있군, 이 겁 없고 당당한 아가씨야. 만약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아무도 너처럼 말하지 못할 텐데. 그런 점은 그녀와 닮았군그래.”


 그들 사이로 세찬 바람이 여러 차례 불어왔다. 그의 뒤로 물러나 있는 나무의 무수한 잎사귀들이 심하게 흔들리는데 매우 반짝거렸다. 마치 나무가 보석 박힌 스카프를 온몸에 두르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는 미처 못 봤었는데 연두색을 띠는 둥근 열매 같은 것들이 나뭇잎 사이에서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애잔한 구슬 소리는 바로 그것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일어 앞에 서 있는 그를 지나쳐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황금 달빛 아래 잎사귀에 가려진 열매들이 영롱한 빛을 내며 살살 흔들리고 있었다.


“옥이야. 아주 귀중한 옥이지. 하지만 아무나 딸 수는 없어. 나무의 주인이 허락을 해야만 하지. 보름달이 뜬 밤에 나는 그녀를 여기로 데리고 왔었어. 그다음부터 이곳은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지. 특히 그녀는 이 나무에 기대어 명상에 잠기기를 참 좋아했었어.”


“그럴 만하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옥구슬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감탄하여 말했다. 아무리 다시 봐도 질리지 않았다. 침묵이 흐른 후 그는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자 난 나무 주인에게 몇 개만 따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나 같은 존재가 부탁이란 걸 다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군. 사실 내 몸은 옥과 그리 친하지 못해서 만지면 나를 아프게 해. 그래서 따는 동안 손바닥이 고통스러웠지.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 그걸 받았을 때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면, 또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난 여기 있는 옥을 다 따버릴 거야.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아니, 사실 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냥 조금 불편하고 사소한 느낌이랄까?”


 자신을 앞에 세워놓고 마치 편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그가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래서 그냥 듣기만 하며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로 손을 뻗어 올렸다. 마침 잎사귀들 사이로 은은한 연두색 옥이 보였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자석의 양극이나 된 것처럼 그것이 손가락을 피해 이리저리 도는 게 아닌가? 그녀가 있는 힘껏 손가락을 쭉 뻗었으나 잡히기는커녕 결국 잎들 사이로 모습을 숨겨버리고 말았다.


“주인의 허락 없이 딸 수 없다니까.”


 그의 어조에 살짝 조롱이 섞이었다. 그녀는 포기하고 그들 옆으로 광채를 발하는 노란 보름달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크고 밝은 달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머머, 저게 뭐야?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나무로 가려졌던 달 표면에서 뭔가가 꿈틀대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빈 후 그녀는 자세히 쳐다보았다.


 달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나, 초록 토끼가 절구 방망이를 움직여 열심히 절구통을 찧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힘차게 뜨며 다시 째려보았다. 그러나 토끼와 절구는 그새 사라지고 울퉁불퉁한 달 표면만 남아있었다.


‘잘못 봤나?’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녀는 그 집을 좋아했었어. 숲속에 있는 조그만 통나무집, 네가 잠시 머물렀던 그 산장 말이야. 화려한 궁전이나 거대한 성이 아니라 아늑하고 따듯해 보이는 그곳을 찾아오곤 했었지. 낮에는 주변 숲을 돌아다니며 꽃과 토끼, 사슴과 대화를 나누고, 밤에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지. 몇 시간이고 그렇게 책을 읽었어. 그럴 때면 그녀는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가진 표정을 띠고 있었지. 정말 아름다웠어...”


 그는 말끝을 흐리며 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진이 시선을 돌려 달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모자가 살짝 뒤로 넘어가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캐물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요?”  


 그녀의 질문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찌른 것처럼 그의 몸이 별안간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몸을 돌려 등으로 달빛을 받으며 상체를 앞으로 웅크렸다. 잠시 후 그는 몸을 피면서 고통스러운 어조로 겨우 답했다.


“그녀는 죽었어.”


 그의 비참함과 절망이 망토를 뚫고 그녀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그녀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너무 안타깝네요.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었던 분이 돌아가셨다니 말이에요. 그래도 힘을 내요. 또 다른 사랑이 꼭 찾아올 거예요.”


 그녀는 그동안 열심히 읽어왔던 로맨스 소설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미풍이 그들과 나무에 부딪치며 지나쳐갔다. 전보다 차가움이 더 깃든 바람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들도 따라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이안, 카할, 레빌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차가워진 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며 장미 덤불이 감싼 미로 쪽으로 몸을 돌린 후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당신이 요툰하임 숲의 동물들을 돌로 만들었나요? 과보족도 말이에요?”


“그래, 그랬지.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 좀 쳐봤지.”


 차갑고 잔인한 말소리가 모자 안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것은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있던 그녀를 바짝 깨어나게 만들었다. 장난이라니? 살아있는 것을 돌로 만든 게 재미있다고?


 그녀의 뱃속에서 불끈하며 솟아오르는 항의를 막 전달하려던 찰나였다.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를 저지했다.


“너희들이 찾고 있는 것은 지하무덤에 있어. 생명체를 돌로 만든 방울도 같이 들어가 있지. 하지만 아직 마지막 시험이 하나 더 남아있어. 그냥 쉽게 되면 나도, 너희도 재미없잖아?”


 그의 비아냥거림에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꾹 참고 물었다.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더한 건가요? 어느 정도의 시험인데요?”


“미리 알면 재미없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걸. 당연히 죽을 수도 있고. 이러면 어떨까? 우리가 이 아름다운 달밤을 좀 더 즐기는 동안 너의 친구들이 먼저 그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거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고. 넌 다 끝난 후에 그들 앞에 나타나는 거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말이야. 어때? 그러면 넌 공포에 떨며 도망칠 필요도 없고, 어디를 다치거나 죽음조차 피할 수 있어. 여기서 나랑 편안히 있다가 돌아갈래? ‘예’라고 대답하면 바로 그렇게 해줄게.”


 그의 매력적인 저음 목소리에 그녀는 하마터면 ‘예’라고 해버릴 뻔했다. 그의 제안은 수면 위로 던져진 돌멩이가 되어 그녀의 마음속 호수에 파동을 일으켰다. 


 무시무시한 티라노사우루스가 그녀의 눈앞에 떠오르고, 루시와 서로 부둥켜안고 벌벌 떨던 장면도 생각났다. 남은 시험이 이보다 더할 수 있단 말에 돌아가기 꺼려진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토르의 망치가 자신과 무슨 깊은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로 여기까지 온 것인데, 과연 그것들이 목숨보다 더 중요할까?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엄마와 외할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녀는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유혹했고 점차 그것에 동요되어가던 바로 그때였다.

이전 16화 10. 루시 (Lucy)가 두발로 뛰다. -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