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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un 12. 2022

1. 롤리마을의 역사적인 그날 - 2


 보통 때 같으면 25분은 너끈히 걸릴 수진의 하교 시간이 오늘은 11분 20초로 마감하였다. 1분은 아까 호세노인과 부딪쳐서 소모된 시간으로 그 당시 그녀의 가슴이 얼마나 저리고 떨리던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진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허옇게 질린 얼굴로 집 앞의 우체통으로 달려든 그녀는 양손으로 그 안을 마구 뒤지기 시작하였다. 거의 우체통을 부숴버릴 기세였다. 그런데 이런,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그럼 여기서 우체국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오늘같이 추운 날씨에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겠다고 결심이 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너무나도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로변 맞은편 이웃에 사는 동갑내기 제인이 우체통을 뒤지더니 성적표 비슷해 보이는 편지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수진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혀를 날름거리며 그것을 정신없이 흔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그것을 자신의 입 안에 쏙 집어넣어 우물우물 고기처럼 씹어대었다. 그녀는 집과 반대 방향으로 훅 도망쳤다.  

 

 성적표는 벌써 가정으로 발송된 것이다. 맞은편 이웃에 도착했다면 이미 여기에도 도착하고 남았을 터. 지금 그것이 통 안에 없다는 것은, 즉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앞으로 벌어질 예정이란 뜻이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지금 이대로 확 죽어버렸으면. 악마의 목소리같이 차갑고 독기 서린 말자 여사의 불호령이 열린 문으로 튀어나와 수진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지옥에라도 떠밀려가듯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후회해도 늦어버린, 별별 변명들이 마구 솟아오르고 있었다. 만약 좀 더 빨리 달려왔으면, 아님 주의를 더 잘해서 그리스 할아버지와 부딪치지 않았으면. 아, 그랬다면 지금 할머니 수중에 들어간 그 종이를 먼저 낚아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할머니가 앉아있는 거실 소파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멈춰 서자 할머니는 그녀의 푹 숙인 고개가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성적표를 내밀었다. 그녀는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듯 덜덜 떠는 두 손으로 그것을 겨우 받았다. 그리고 펼쳐보았다. 이런,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안 좋았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말자 여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화가 나면 그녀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낮게 깔리었다.


“아무리 전학을 와서 첫 성적표라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니냐? 네가 몇 등이라고 적혀있는지 좀 읽어보렴!”


“36등... 이요.”


“너희 반에 총 몇 명이지?”


“총...38명...이요.”


 별안간 여사의 두 눈에 화산 폭발 같은 섬광이 번득이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쿵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여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눈앞에 끔찍한 괴물이라도 서 있는 듯한 표정을 띠고서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총 38명 중에서 36등? 36등?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앞으로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생각이냐? 멀리 서울에서 너를 위해 고생하는 엄마가 가엽지도 않니? 우리가 돈이 많길 하니, 짱짱한 친척들이 있긴 하니? 뭐 하나 기대거나 도움을 받을 데가 쥐뿔도 없는 그런 집안이다. 그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어서 대답해봐!”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자 여사는 수진의 입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짜증과 울분이 잔뜩 버무려진 저음으로 고함쳤다. 수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트였다.


“하지만 공부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요즘엔 공부를 못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데요.”


“그래, 그 말 한번 잘 꺼냈다. 물론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 허나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온 이 할미는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각박한 세상 물정과 마주한 현실을 늘 뼈아프게 겪으며 지내왔으니까. 성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처럼 쥐뿔도 없는 집안은 공부만이 그나마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말이다, 지름길! 그럼, 어디 한번 물어보자. 넌 공부 말고 잘하는 게 있긴 있느냐?”


 수진의 머리가 갑자기 띵해지고 눈앞이 문자 그대로 컴컴해졌다. 할머니의 꾸중에 어디서 주워들은 변명을 늘어놓긴 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미래에 대한 꿈이 있긴 한지, 고민을 해본 적도, 아니 그런 생각조차 든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금 떠올려 봐도 그녀로선 매우 황당한 노릇이었다. 따듯한 집안 공기였지만 별안간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흐르고 양 무릎이 부르르 떨려왔다.

 

‘난 앞으로 뭘 해야만 하지? 뭐하며 먹고살아야 하지?’


 대답을 전혀 못하는 손녀를 앞에 두고서 여사는 전보다 더 큰 분노를 품은 어조로 이젠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거봐라 거봐!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하는 게 없지 않느냐? 그러니 공부라도 해야지 별수 있어? 네 엄마처럼 공부 안 하고 펑펑 놀다가 지금 저리 고생하는 꼴을 닮으려고 그러는 거냐? 엉?”


“엄마가 어떻다고 그러세요! 미혼모지만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주는데요. 할머니는 늘 깔보고 무시하지만 저에겐 최고로 좋은 엄마란 말이에요! 할머니 미워욧!”


 수진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채 바로 집을 뛰쳐나갔다. 


 문이 꽝 닫히자마자 여사는 소파를 힘겹게 세우고 살며시 몸을 기대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벽난로의 장작불 쪽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침울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창문 옆 삼층 탁자 위에 올려진 가족사진으로 옮겨졌다. 그녀와 딸, 손녀 수진이 올 여름휴가 때 롤리숲의 계곡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미혼모의 딸로서 냉정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할 손녀의 앞날을 예상해볼 때 여사의 가슴은 미어지듯 점점 아파왔다. 그녀는 진심으로 손녀를 사랑했다. 아직 그녀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편견과 장애에 부딪치게 될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비록 나이 든 할머니였지만 여사 스스로도 이미 뉴스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타트업,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삼성, 애플, 구글, 메타, 네이버, 카카오, 테슬라, 스페이스 X, 아마존, 로블록스, 가상현실, 증강현실, 융합현실 등등.  


 손녀의 말처럼 꼭 공부 일등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점도 분명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계바둑천재 이세돌 구단과의 세기적인 바둑대결에서 기계가 이기는 것을 목격하곤 다른 한국인처럼 큰 충격에 빠졌었다. 앞으로 사람뿐 아니라 기계와도 경쟁을 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혼내 정신을 차리게 하여 하나라도 더 열심히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남모르게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어쩌면 딸자식이 미혼모라는 낙인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그녀를 더욱 채찍질하였고, 보란 듯이 남보다 훨씬 더 잘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손녀에게 투영되어 아까처럼 길길이 뛰며 화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정말 눈이 홱홱 돌아갈 정도로 어지럽고 무서운 세상이었다. 어찌했든 지금부터라도 혹독하게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며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다짐했다.




 이런 할머니의 속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아예 모르고 있는 수진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발길 닫는 대로 뛰었다. 목적지는 따로 없었다. 그저 달릴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과연 잘하는 게 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당황스럽게도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롤리교회 뒤의 교회묘지 앞에 도착해있었다.


“끼이익~”


 그녀는 녹이 잔뜩 슨 쇠창살 묘지문을 앞으로 밀었다. 동산들 사이에 난 하얀 조약돌길로 걸어갔다. 아니, 지금은 눈이 덮여 길이 양쪽 동산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을 따라 눈을 밟으며 그녀는 다시 이전의 생각을 이어갔다.


‘난 잘하는 게 뭘까? 앞으로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해야만 하지? 번듯한 직장이나 가질 수 있을까?’


 그저 남들 보기에 멋있고 폼 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딱 그런 건, 영화배우나 가수? 하지만 자신의 타고난 외모를 현실적으로 고려해보았을 때, 연기나 노래 등 재능적인 면을 분석해보았을 때, 아니 그렇게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과 절실한 의지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가를 진심으로 자신에게 물어보았을 때 대답은 셋 다 ‘아니오’였다. 그럼 뭐가 되어야 하지? 난 뭘 해야만 할까? 난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

 

 문득 그녀는 자신이 아무런 쓸모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무능력하고 억울하기만 했다. 가슴속에서 울분이 훅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이렇게 낳아준 엄마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스러웠고, 그리고 그런 엄마를 낳은 할머니도, 증조할머니도 원망스러웠고, 갑자기 몇천 년, 아니 몇백만 년의 시공간을 껑충 뛰어넘어 인류의 조상이 된 유인원이 이 지구 상에 모습을 보인 것도, 그리고 왜 유인원에서 네안데르탈인으로 진화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한없는 분노가 일었다. 별안간 루시가 그녀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때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잘 지내고 있겠지? 아마 루시는 나 같은 스트레스가 없어서 참으로 행복할 거야.


 그리고 [성적표]라는 것을 최초로 만든, 이런 불천지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처절하게 복수해주고 싶었다. 만약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시간을 거슬러 찾아가 [성적]이란 것이 이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테러라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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