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브라잇 동맹에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와 수모를 받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긴 내가 돌아오고 싶어 왔었나, 그들이 억지로 떠밀어 보낸 거지.
이안, 어째서 넌 그 후로 편지 한 장도 보내지 않는 거니?
혹시 그의 소식을 들을까 싶어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끔 들르곤 했었다. 그러나 지원 아저씨는 한 번도 그에 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참다못해 슬쩍 물어보면, 자신도 롤리마을로 돌아온 후부터는 소식이 완전히 끊겨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나 수진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빅락 게이트키퍼’로서 분명 그는 브라잇 동맹의 뉴스를 계속해서 듣고 있을 터이고, 이안과 직접적으로 연락을 안 할지는 모르지만 히든벅과는 어떤 식으로든 소식을 주고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이 아니던가? 다시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얼마 전쯤이었다. 가슴 뭉클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 예전의 추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성큼 몰려왔다. ‘추억’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힘들고 무서웠던 것은 어느새 쏙 빠져버리고 즐겁고 재미난 것들만 남아 그녀의 입술에 오랫동안 흐뭇한 미소를 띠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신기한 점은 글씨 ‘게’ 위로 파란색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여사는 그냥 지나쳤지만 나중에 수진이 자세히 살펴보니 ‘브라잇 동맹 우체국'이라는 조그만 하얀색 마크가 보였다 사라졌다 깜빡이었다. 상자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냄비 하나와 칼 두 자루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노란 편지봉투가 놓여있었다. 수진이 직접 펼쳐보았다. 카할의 편지였다.
거인들의 댄스파티가 끝나고 이안이 와서 네가 급히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 왜 나에게 작별인사도 안 하고 그냥 떠났니? 우린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이안과 다음날 바로 헤어졌어. 그는 나에게 초록 샌드펜을 선물로 주고 떠났지. 그는 ‘뱀파니아 왕국’으로 가봐야 한다고 말했어.
난 ‘딥언더니아’로 돌아와 스톰펌 왕에게 우리가 찾은 성물을 바쳤단다. 그는 정말로 기뻐하면서 체면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덩실덩실 엉덩이춤을 추고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셨어. 좀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했어. 뭐, 좀 그러시다 왕의 체면을 다시 찾으셨지만. 너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진짜 배꼽 빠지게 웃기고 흐뭇한 장면이었어. 어찌했든 귀중한 성물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온 거야. 그래서 난 마음이 아주 편해.
난 아버지를 따라 대장간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단다. 예전에 너희들에게 캠프 비용 빚진 거 있지? 얼마 전에 겨우 돈이 마련되어 이안에게 샌드펜으로 상황을 알렸더니 그는 절대 사양하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너의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지. 그래서 빚 대신 이렇게 선물을 보내게 된 거야.
냄비는 한번 불을 지피면 그 열기가 3달은 가고 설거지는 따로 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칼은 파이나 케이크 등 디저트를 부스러짐 없이 예쁘게 잘라주는 전용 칼이야. 갖다 댄 채 살짝만 힘을 줘도 깨끗이 잘릴 거야. 한번 사용해봐. 에고, 아버지가 부르시네. 그만 가봐야겠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꼭 보자!
카할은 이렇게 편지까지 보내는 마당에 이안 너는 어째 그토록 무정하고 무관심한지.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차갑고 매정한 소년이었다.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발밑 땅바닥이 훅 꺼질 것처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 가득한 눈초리로 동산 주위를 둘러보며 얼음이 될 정도로 차가운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거세게 불타오르는 마음속 불길이 조금 진정되면서 그녀는 이내 결심했다.
다 잊어버리자.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곳이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곳이니까. 그래, 즐거웠던 브라잇 동맹의 추억은 훌훌 털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