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외계인 클라스 큐빗 (Klas Cubit)-1
아참, 여태 그걸 까먹고 있었네.
동산 끝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오동통한 묘가 보이자 수진의 두 눈이 번쩍 떠지었다.
그동안 자신에게도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겼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이안, 두고 보라고. 나에게도 멋진 학교 친구가 생겼거든. 너보다 훨씬 멋있고 잘생기고 똑똑한 남자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이름은 클라스 큐빗(Klas Cubit).
부모님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계시는데 사정이 생겨 잠시 롤리마을로 전학을 왔단다. 무슨 연유인지 토마스 목사관에서 함께 지내는 그는 그녀의 반에 처음 소개되자마자 바로 학교의 최고 인기남으로 등극해버렸으니, 그도 그럴 것이 검은 곱슬머리에 짙은 회색 눈동자, 세련되면서도 기품 있게 잘생긴 외모, 한 마리의 매끄러운 흑표범 같이 야성미가 좔좔 흐르는, 키도 크고 날씬한 체형까지 갖춘 완벽남이었던 것이다. 스웨덴에서 모델로 활동하였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졌지만 SNS나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어 그것의 진위를 가리진 못하였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직접 그를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것이다. 학교에서 연상이든 연하이든, 하물며 여선생님까지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더욱 놀라운 건 오자마자 치른 중간고사에서 그가 전교 1등을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선 그를 ‘외계인’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자신들과 같은 지구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리라. 한 공간에서 그냥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 이미 질투와 시샘을 폭발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남자들 사이에서 웬일인지 그는 전혀 미움을 받지 않았다. 아니, 차분한 성품과 도전적이고 카리스마스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말 그는 별명 그대로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완벽남이 전학 온 첫날부터 인기녀와는 아주 거리가 먼, 자세히 말하자면,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머나먼 황수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건 정말 엄청나게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둘은 친구가 되었다. 수진으로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지만 참으로 고맙고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여학생들에게 자주 시기와 질투의 눈초리를 받곤 했지만 뭐, 그 정도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브라잇 동맹’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강한 분노와 불만이 그나마 지금의 체념 정도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의 덕분이리라. 그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생각들이 마구 뒤섞이어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던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묘지 동산의 끝자락에 도착해있었다. 할아버지의 묘가 아담한 눈 담요를 덮은 채 언덕 아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 옆으로 비켜 앞으로 세 발자국을 더 다가섰다. 그녀의 운동화 아래로, 내리막길에서 시작된 평원이 파노라마처럼 넓게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너머로 하얀 눈꽃이 핀 신비로운 롤리숲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온몸을 흔들어대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숲의 부름을 못 본 척 무시하였다. 그리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려 씽씽 불어오는 찬바람을 마치 물처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폐부를 꼭꼭 찌르는 듯 차가웠지만 마음속에 생겨난 실망과 짜증, 서글픔의 불길이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았다. 기분도 조금씩 상쾌해졌다. 오늘은 숲으로 들어가지 말고 여기에만 있자고 결심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에잇, 모르겠다. 다 귀찮아.”라고 투덜거리며 그냥 뒤로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백설기 같은 새하얀 눈 바닥 위로 등을 댄 체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문득 그녀의 몸이 모래 알갱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백설(白雪)로 변하더니 마치 이 땅을 덮고 있는 한 부분이라도 된 것처럼 전신이 쭉 가라앉으며 아주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이곳의 고요함을 유일하게 깨뜨리는 건 지나가는 겨울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의 서로 비벼대는 마찰음뿐이었다. 자연의 소리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위안을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마치 친근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듣는 속삭임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데, 그 느낌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가던 그때였다.
“너 여기서 뭐하니?”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쓱 내밀어졌다. 방금 전까지 떠올리던 클라스 큐빗이었다. 그 완벽체인 ‘외계인’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나, 눈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온 거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아이보리 상아단추들을 매단 고풍스러운 캐시미어 검정 외투를 입고 있었다. 영화배우처럼 매끈한 그의 모습이 참으로 근사하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자 그녀는 냉큼 정신을 차리고 뾰로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니?”
“난 저기 나무 뒤에 기대어 있었어. 네가 인상을 푹 쓰며 들어올 때까지.”
그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이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굽혀 놀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영 안 좋은데?”
역시 그는 성적표 따위로 전혀 곤란이나 상처를 입지 않았나 보다. 저렇게 싱글벙글하는 걸 보아하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푹 숙여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한테 꾸중을 들었어. 성적표...”
“그게 뭐 대수라고? 그냥 숫자놀음일 뿐인데.”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우리 할머니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가 봐.”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꺼지더니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시무룩하고 체념에 가까운 그녀의 무거운 표정 위로 홍조가 살살 피어났다. 친구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거지만 왠지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상체와 함께 눈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보드라운 눈 속에 얼굴이 푹 파묻히자 홍조의 열기가 식혀졌다.
곧 그녀는 얼굴을 들어 소매로 눈을 닦아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춤을 추듯 휙 돌려세우더니 언덕 아래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곳을 향해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난 화가 날 때마다 이렇게 외쳐! 이런 요지경(瑤池鏡) 같은 세상아~요지경아~”
그의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마치 경주마라도 된 것처럼 온 평원을 메아리쳐 내달렸다. 그녀의 답답했던 가슴이 대신 뻥 뚫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도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대고 힘차게 따라했다.
“이런 요지경 같은 세상아~요지경아~”
그녀의 표정이 어느새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배를 움켜잡으며 속 시원히 껄껄 웃기까지 했다. 브라잇 동맹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활짝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해준 소중한 친구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따라 소리 내어 웃진 않았지만 평원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가끔 그는 저런 아련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 생각에 잠긴 채 한쪽 입술이 살짝 말아 올라간, 저 알듯 모를 듯 한 표정 말이다. 그의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 왠지 가슴 아프고 애잔하게 느껴졌다.
상념에서 깨어난 그가 헛기침을 한 후 그녀에게 돌아가자고 손짓했다. 그녀는 올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