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마을 기차역의 벽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원형시계는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 다음으로 마을의 또 다른 자랑거리라고 충분히 부를 만하였다. 산타할아버지 모양으로 조각된 나무 시계는 그의 불룩한 배가 유독 크게 강조되었고 얼굴과 두 팔, 두 다리는 바깥쪽으로 조금씩 작게 튀어나왔는데, 흡사 산타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체적으로 빨간 바닷게처럼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계는 그의 빨갛게 칠해진 배 부분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시계가 오전 8시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것의 두 팔과 두 다리가 바닷게처럼 위아래로 살짝살짝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탄절 캐럴송이 그것의 작게 움직이는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른 역과 달리 매시 정각을 알리기 위해 롤리마을 기차역에서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캐럴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역시나 크리스마스를 가장 중시하는 마을다웠다.
노랫소리가 들리자 시계 아래에 서 있던 수진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도착할 때가 거의 다 되었는데.’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야외 승강장 중앙에 늘여놓은 의자 끝으로 그녀는 가서 앉았다. 성적표를 받은 다음 날인 오늘은 클라스와 함께 서울로 놀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학교는 땡땡이치고 말이다. 이미 성적표가 발송된 마당에 수업이라고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는가? 잔뜩 기대에 부푼 그녀는 입구를 응시하였다.
‘왜 아직도 안 오지? 설마 약속을 까먹은 거 아냐?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 기대하고 기대하던 그녀의 눈이 잔뜩 찌푸려지면서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쟨 뭐야?”
클라스가 한 무리의 아이들을 대동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자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의 옆으로, 자신이 처음 이곳으로 온 후 과자를 빼앗겼었던 그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범인 이상민이 어그적 어그적 껌딱지처럼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아직도 골목대장을 자칭하는 그와 한 무리의 불곰들은 예전보다 더 불어난 몸집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게슴츠레 주변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상민이 싫었다. 하지만 클라스가 전학 온 후 웬일인지 상민은 그와 친하게 지내려고 자기 딴에는 정말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협박하여 얻은 돈까지 상납한다는 소문도 들리었다. 그리고 클라스 역시 싫진 않은지 그의 무리와 종종 몰려다니는 장면이 목격되곤 했다. 수진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여러 번 풍겼었지만 그때마다 클라스는 늘 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자세히 알고 보면 걔도 괜찮은 아이야. 나랑 비슷한 면도 있고.”
“너랑 비슷한 면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전혀 없는데.”
“그런 게 있어. 남자끼리 통하는.”
수진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 남자끼리 통하는 거라는데 여자인 자기가 어떻게 더 나설 수 있겠는가?
그녀가 상민을 더욱 꺼리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를 향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 과자를 빼앗고 돈을 갈취하려던 그 유명한 사건을 한번 떠올려보자. 이안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 후 수진까지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노려보던 그였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지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고개를 꾸벅하여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서로 처음 만난 주일날,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그녀에게 주장한 논리에 따라 그의 나이가 한 살씩이나 더 많은데도 말이다. 어색해하는 그녀가 그냥 쓱 모른 척 지나가도 그는 절대 시비를 붙이거나 욕설 한마디 내뱉지 않고 알 듯 모를 듯 한 애매한 미소를 비쳤다.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지 놀라운 변화였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솔직히 말해 기쁘기보다는 왠지 더 불안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마음속으로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오늘 저렇게 대동하고 나오다니. 클라스한테 확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으며 그들을 맞이하였다. 속으론 이런 걱정이나 하면서.
‘설령 같이 서울로 가려는 걸 아닐 테지.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수진아, 안녕. 일찍 나와 있었네?”
클라스가 활기차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영 찌그러지고 목소리가 어색하게 흐려졌다.
“응... 근데 다른 이들은..”
“아, 날 배웅하러 온 거야. 차표 좀 줘. 그리고 이제 그만 가봐.”
상민이 외투 주머니에서 차표 두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바로 뒤돌아서더니 품 안에 종이봉투를 든 한 마리의 불곰에게 무섭게 짜증을 부렸다.
“인마, 어서 내놔!”
건들거리는 인상에 주근깨가 잔뜩 박혀있는 소년이 봉투를 급히 전해주자, 그는 그것을 클라스에게 바로 건네었다. 클라스와 수진은 무슨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배웅을 받는 두목 커플처럼 역사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주변 사람들과 역장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에 신기해하며 그들을 훑으며 지나쳤다. 그들은 1등칸 좌석에 앉았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지 창문 옆으로 몰려든 상민과 부하들이 손을 흔들어 마지막 배웅을 했다. 정말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클라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해 받은 봉투 안을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었다. 세상에나, 한눈에도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도시락이었다. 그리고 눈치로 보아하니 상민이 그들을 대신하여 차표도 준비한 것 같았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깊어졌다. 이렇게까지 그에게 퍼주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차표를 사기 위에 상민 무리는 몇 명의 아이들을 협박하고 갈취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독자 여러분을 위해 살짝 진실을 공개하고자 한다. 서울까지 오가는 KTX 1등칸 왕복표 두 장을 사기 위해 무려 20명의 아이들을 갈취해야만 했으며, 그래도 조금 모자란 액수는 상민과 그 무리가 아이스크림을 2번 먹으려다 1번만 사 먹고 아낀 돈을 모두 합친 것이다. 참으로 상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스크림까지 참아가며 눈물겨운 노력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스는 아무 거리낌 없이 혹은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로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오히려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건 수진이었지만 떠나는 당일 아침부터 따지기가 좀 그래서 혼자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혹시 내가 상민을 여태껏 잘못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동네 아이들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은 물론 매우 나쁜 행동이지만, 반면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를 살뜰히 살피고 도와주려는 그런 좋은 마음씨도 지닌 게 아닐까?
수진은 아직 어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몰랐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 속에 펼쳐진 초원에는 좋은 풀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죽이는 독풀도 함께 있다는 것을 성장하면서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밝음과 어둠이 모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닥까지 완전히 타락한 나쁜 악당은 없으며 또한 완전 착하디착한 성인이나 천사 역시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진리라면 내 옆에 앉은 클라스에겐 어떤 나쁜 면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녀는 그가 건네주는 사과 한쪽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혼자서 ‘선과 악’이라는 아주 심오하고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난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제국의 포룸(Forum)에서부터 수많은 대학과 맥주바, 스타벅스 카페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엄청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철학자들이 모여 선과 악에 대해 그토록 열렬히 토론하고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어떤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리 똑똑지 않은 그녀에겐 능력 밖의 너무 무리한 일이었으리라.
그녀는 열심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곧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클라스는 혼자 조용히 도시락을 까먹었다. 가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씹기를 멈추고 얼마 안 남은 음식을 잠시 응시하였다. 거의 다 먹자 그의 시선은 창문 밖에 스쳐 지나가는 울창한 숲으로 향하였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푸른 나무와 맑은 개울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그들의 말에서 연상된 옛 회상에 잠기어, 우수에 찬 눈빛으로 옆자리의 수진을 쓱 쳐다보고는 이내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너무나도 오래되어 거의 잊혀버린 추억의 꿈나라로 사르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음속 깊이 그리고 그리워하던 얼굴을 마침내 보았다. 그의 닫힌 입술 한쪽에 살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기차가 승강장에서 사라졌다. 차가운 공기를 압축한 거센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기차가 떠난 빈자리로 마구 불어왔다. 사람들이 외투 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상민과 불곰 무리는 무사히 일을 끝마쳤다는 긴장감 완화와 그동안의 고생으로 누적된 피로를 동시에 느끼며 출구로 향하였다. 이미 학교 수업에 지각인지라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무리 중 제일 앞장선 상민의 머릿속으로 문득 어젯밤에 꾼 이상한 꿈이 떠올랐다.
‘내가 하늘을 날고 있었어. 인디언 마을을 지나 바다에 떠있는 해적선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지. 인디언들이 내는 북소리를 들었고. 또 뭐였더라? 누구랑 싸웠는데? 구멍이 나있는 큰 나무 그루터기도 봤어. 그래 시계 소리를 내는 악어가 그자를 쫓아갔지.’
어릴 때부터 잊을 만하면 꾸었던 꿈을 그는 어젯밤에 또다시 꾼 것이다. 내용은 똑같았다. 가끔 심심할 때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떠올려보았지만 늘 그런 것처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처진 어깨와 무거운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는데 어깨를 두들기는 손가락 감촉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아까 엄마 도시락을 건네던 그 주근깨였다.
“뭐야?”
귀찮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그가 쏘아붙이자 부하는 음매 기죽어 죽는 시늉을 먼저 하더니 얼굴에 비굴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가까이 뭉쳐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다 들리었다.
“기차 마지막 칸에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던데. 서울 가나 봐.”
“그게 뭐?”
주근깨 옆에서 코딱지를 파던 아이가 막 파낸 완두콩만 한 코딱지를 손끝으로 퉁 튕기자 상민은 더럽다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나 아이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어서 개의치 않고 음흉하게 킬킬거리더니 주근깨 대신 대답했다.
“오래 쉬었던 교회 벽장식 좀 거들어 드려야지, 대장. 게다가 그놈, 목사 어른이 없으니 방해할 것도 전혀 없잖아.”
‘어른’이란 단어를 듣자 상민은 거칠게 숨을 헉헉거렸다. 뭔가 불끈하며 그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그는 일초에 다섯 번씩이나 숨을 몰아쉬며 복수심에 불타오른 목소리로 꺽꺽거렸다.
“어른은 하나같이 일을 망치는 족속이라 엄청 싫은데 특히 그놈은 최악 중의 최악이야.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크게 줘야겠지? 자, 어서 교회로 가자. 오늘 학교는 땡땡이다.”
소리친 상민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눈알들이 희생양을 쫓는 어둠 속의 하이에나처럼 번뜩이었다. 상민은 하이에나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안으로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그가 침을 흘리며 히죽거리는 데 한눈에 보기에도 참으로 불량스러웠다. 그는 몸속이 점차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여러분은 눈치채었는가? 예전에 수진이 처음 롤리교회를 방문한 주일날, 토마스 목사가 교회 벽을 보고 큰 충격에 빠져 숨쉬기를 멈추고 졸도할 정도로 펄펄 뛰게 만들었던 낙서를 기억하는지? 다음과 같은 벽낙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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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그려진 목사의 대머리 위로 커다란 뿔 두 개가 뾰족이 나있고,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찢어진 입안에서 시뻘건 불길이 활활 튀어나오는데 그 옆으로 그려진 대화창에 다음과 같은 저주가 적혀있었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설교를 제일 열심히 듣는 자부터 먼저 잡아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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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이것 역시 상민과 불곰 무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토마스 목사는 전혀 상관없는 수진을 범인으로 오해하여 무섭게 노려보았었고, 그녀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대역 죄인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었다.
그들은 그 후 더 이상 낙서를 하지 않았는데 기회가 없었다기보다 자신들의 본업인 아이들 협박과 갈취, 후려치기에 더욱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는 자다가도 수시로 일어나 누가 벽에 낙서를 하나 유령처럼 창문 앞을 기웃거렸고, 급기야는 벽 앞에 CCTV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인이 떠난 교회는 그들에게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다. CCTV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총이나 돌팔매질로 망가트리면 되니까. 원기가 충만해져 몸에 힘이 들어간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며 교회가 있는 대로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