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와 유리창을 지나면서 어떤 이에게 물었다.
“유리창은 모두 몇 칸이나 됩니까?”
“모두 27만 칸입니다.”
정양문에서 가로로 뻗어 선무문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거리가 다 유리창이다. 국내외의, 진귀한 물건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는 한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댄 채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도다’ 하였다. 이렇듯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치 않아서 자신의 옷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곧 성인과 부처, 현자와 호걸 등이 세상을 하나의 노리개 정도로 간주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럴 때, 세상에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 자취는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사람의 지기가 없었던 적은 없다.
이제 나는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서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갓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가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潘南-연암의 관향)의 박씨는 중국 천하가 들어보지 못한 성씨이다.
여기서 나는 성인도 되고 부처도 되고 현자도 되고 호걸도 되려니, 이러한 미치광이 짓은 기자(箕子-중국 상(은)나라 충신)나 접여(接與-춘추시대 초나라 은자)와 같으니 장차 어느 지기와 이 지극한 즐거움을 논할 수 있으리오.
1780년 8월 4일 청나라 연경(북경)에서 박지원 씀
<출처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하권 –그린비 출판사,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엮고 옮김, P97-98>
북극에서부터 한걸음에 달려온 듯 얼음 바람이 롤리마을의 대로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코트 옷깃을 여미며 바삐 걸음을 재촉하였다.
눈이 쌓여 온통 하얀 세상이 된 이곳은 어느덧 12월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 년 중 롤리마을에서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을의 거의 모든 집들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로 이미 새단장을 마친 뒤였다.
그중 가장 아름답게 치장한 최강자를 뽑으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박지원의 집이 또다시 그 영광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몇 해 동안이나 그렇게 늘 뽑아왔는지 마을 사람들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러나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그의 집이 충분히 칭찬을 받을 만하였다. 바로 늘 선보이던 파란 별등과 초록 요정 인형 말고도 좀 더 색다른, 매우 새로운 장식이 지붕 위에 더 얹어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아이들은 어느 날 아침 지나가다가 떠억 하니 그의 지붕을 덮은 별등들 사이로 뭔가 알록달록한 것들이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견될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바로 아이스크림 컵들이었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 떠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파는 제품이었다.
아이들은 크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눈을 뭉쳐 그것들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하나만 떨어져 주어도 좋으련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운이 좋으면 눈덩이가 정확히 맞추어서 컵이 또르르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대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맛이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천하일품이라는 소문도 덩달아 퍼지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옆을 지나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덩이를 뭉쳐 지원의 지붕으로 던지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공짜를 좋아하는 어른들 역시 그 일에 동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기하게도 눈덩이가 잘못 그 집 유리창에 맞아도 절대 깨지거나 금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도 던져서 지붕이 눈폭탄이 되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말끔히 청소되어 요정 인형들과 별등, 아이스크림 컵들이 잘 보였다.
놀라운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의 맛과 위치가 매일매일 바뀌었던 것이다. 하루는 난로 굴뚝 옆으로 딸기맛, 초콜릿맛, 민트맛으로 걸려있던 것이 다음날 똑같은 자리에 레몬맛, 블루베리맛, 아몬드맛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일 확인해도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은 지원의 가게로 달려가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살며시 지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점차 그 집 지붕 위의 요정들에 마법이 걸려 밤마다 되살아난다는 상상을 다시금 믿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박지원이 밤마다 올라가나 보다며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문이 맞든 틀리든, 인형에 마법이 걸렸던 어쨌든,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은 그날이 운수 대통한 날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대단한 이벤트가 열리는 지원의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전혀 흥미가 없는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눈 바닥만 바라보며 걸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리스에서 몇 년 전에 이민을 온 노신사 노리아 호세는 아이스크림 지붕을 단 한 번도 올려다보지 않은 채 품위를 지키려는 듯 눈을 아래로 푹 내리깔고서 천천히 걸어갔다.
“어이쿠!”
갑자기 시골마을의 좁은 길에서 무섭게 그에게로 돌진해오던 한 소녀와 충돌하려다가 겨우 피하면서 그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디 안 다치셨어요?”
우리가 그새 못 본 사이에 키가 좀 크고 훨씬 예뻐진 수진이 그에게 꾸벅하며 사과를 했다. 체면을 지키려 노인이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안심하고는 바로 뒤돌아 내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듯 매우 잽싸게 후다닥 달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하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아~이이~고오!”
전보다 더 크게, 그의 비명소리는 마치 나팔이라도 분 것처럼 골목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지었다. 뚱뚱한 불곰 한 마리가 달려와 그를 박치고는 사과 한마디 없이 휑하니 도망쳐 버린 것이다. 노인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다행히 손이 먼저 눈 바닥에 닿아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뼈가 부러지면 잘 붙지 않는 75세인 그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꼬리뼈를 다쳐 그대로 보행의 자유를 잃어버려 휠체어를 탄 채로 국민 사망 1위 요인인 ‘암’ 같은 못된 병에 걸려 어두운 골방에서 혼자 아름아름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심조심 일어나더니 두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멀쩡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째려보았다.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 이상민이 분명했다.
‘저런 고얀 놈, 사과 한마디 안 하고 내빼다니. 다음에 만나면 혼쭐을 내줄 테다.’
그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눈이 쌓인 빙판이라 더욱더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뒤로, 앞으로, 옆으로 온 동네 아이들이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냅다 주택가를 향해 죽도록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달리기 시합에 목숨이라도 건 듯 절박하기까지 했다. 아이스크림이 달린 박지원의 집도 다들 그냥 무시한 채 지나쳤다. 호세 노인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위를 응시하였다.
‘아하!’ 그의 머릿속으로 번개가 번쩍 일었다.
‘오라,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먼. 그것이 전해지는 날이구먼.’
주름살이 깊게 파인 얼굴 위로 개구쟁이 톰 소여가 늘 지었음직한 익살스러운 미소가 번지었다. 아니, 어쩌면 고얀 너희들도 어디 한번 당해봐라 식의 복수심에 찬 표정 같기도 하다. 굵은 주름이 그의 온 얼굴로 찍찍 그어지며 흡사 말라비틀어진 미라처럼도 보였다.
그는 아주아주 오래전, 고향인 그리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이젠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그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킥킥거리며 총총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후다닥 달려 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주먹을 위로 팍 쳐들며 힘차게 응원을 보냈다.
“달려라, 어서 달려가 숨겨라! 꼭꼭 숨겨라!”
그가 언급한 ‘바로 그날’은 도대체 무슨 날일까? 국경일일까? 마을 축제일일까? 아님 유명가수가 오늘 여기서 콘서트라도 열 예정인가? 혹은 멋진 경품이 걸린 달리기 대회를 앞두고 다들 미리 예행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땡~, 모두 틀렸습니다.
괜히 골머리들 썩지 마시라고 그냥 정답을 알려드리겠다.
바로 아이들에게 유령이나 마마호환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학교 성적표가 롤리마을의 각 가정으로 정확하게 배달되는 ‘역사적인 그날’이 되겠다.
지난 1년 동안의 성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그 끔찍하고도 온몸을 덜덜 떨게 만드는 자그마한 종이 말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날이자 앞으로 뼈아픈 고생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시초가 되는 날이라 명하겠다.
특히 이날은 일 년 중 유일하게 롤리마을 우체국에 비상근무가 선포되어 우체국장과 서장까지도 직접 배달부 가방을 들고 나서며 한집도 빠짐없이 정확하고 빠르게 배달하는, 그런 책임감 있는 공무원의 모범적인 모습을 선보이곤 했다. 바쁜 크리스마스 때도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성적표 발송일은 매년 귀신처럼 바뀌곤 하였다. 언제인지 모르는 학생들만 팔짝 뛰고 미칠 지경이었다.
방학을 얼마 안 남긴 오늘, 학교 선생님은 이미 우체국과 모든 상의를 끝낸 후였지만 하교 바로 직전에 아이들에게 성적표 발송 완료를 공표했다. 부모들은 어제 학교에서 알림을 받아 이미 알고들 있었다. 당사자인 학생들만 몰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들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쥐어짜고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것을 숨기기 위해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불쌍하고 안쓰러운 인생들이다. 그깟 성적표 숫자가 뭐라고 이리 생난리를 치는 것인지 정작 본인들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입에서 화염을 토할 부모님의 악마 같은 모습을 생각만 해도 악몽 그 자체였다.
그러니 어서 빨리 도착해야만 한다. 부모님보다 먼저 잽싸게 숨겨야 한다.
자, 어서 달리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