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쾅쾅쾅, 쾅쾅쾅쾅.”
대문이 부서져라 때려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시퍼둥둥한 새벽이었다.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수진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자동적으로 문으로 향하였다. 그녀의 손이 습관적으로 빗장을 끄집어내자 바로 문이 안으로 확 밀려 들어왔다. 그것의 거센 힘에 밀리어 그녀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조선 사행단을 담당하는 청나라통역관들이었다. 그들의 안색은 마치 전쟁을 알리려는 파발꾼처럼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안채를 향해 그대로 돌진하며 쳐들어갔다. 놀란 수진이 대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안채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이미 아침잠은 거의 다 깬 상태였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안에서 정사의 비장이 문을 냅다 차며 후다닥 튀어나왔다. 그는 마치 벌집을 쑤셔대는 꿀벌처럼 온 숙소의 방들을 마구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올 때마다 방 안에서 울부짖거나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안에서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나와 이리저리 달려 나갔다. 곧 정사의 마두 시대가 다른 방에서 나와 그녀 앞을 지나쳐갔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않은 채 달리면서 크게 외쳤다.
“열하로 가야 된데! 열하로 떠나야 한데!”
그 말에 수진은 화들짝 놀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시대는 전당으로 달려가더니 문 앞에 서서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곧 열하로 떠나야 한답니다! 어르신 어서 일어나셔요, 큰일 났습니다!”
마침 지원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요란스레 문을 때릴 때부터 이미 잠은 깨어 있었다. 그가 알겠다고 답하자 옆의 래원과 변계함이 번쩍 눈을 뜨더니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누운 채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입으로 그를 향해 묻는 것이었다.
“관에 불이라도 났는가요?”
대뜸 장난기가 발동한 지원이 살짝 떠는 목소리로 호들갑을 피웠다.
“아니, 황제가 열하에 거동하시는 동안 연경이 비어있기에 몽고 기병 십만 명이 때맞춰 쳐들어 왔다는군.”
“아이고, 이를 어쩝니까요? 먼 이국땅에서 개죽음을 당하겠구먼요!”
일어나 앉아 서로 부둥켜안으며 난리법석을 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지원은 다급히 상방으로 향하였다. 중간에 자신에게 달려오는 수진을 만났지만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그냥 지나쳤다.
상방은 그야말로 펄펄 끓어오르는 가마솥 같았다. 아침에 수진을 밀치며 황소 떼처럼 쳐들어 왔던 통역관 오림포와 박보수, 서종현 등이 제 가슴을 때리고, 뺨을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제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울고불고 아주 난리법석이었다.
“카이카이. 카이카이.”
“다 죽게 생겼소. 이를 어쩐담.”
“아이고, 카이카이요.”
수역이 지원에게 다가와 만주어 ‘카이’가 ‘목이 달아난다’란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생각에 잠긴 정사 앞에서 저들이 보이는 행태란 참으로 흉측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지원은 일부러 못 본 척하였다. 대충 들은 사연은 이러하였다.
여태껏 가만히 있던 황제가 갑자기 어젯밤 태도가 돌변하여 무섭게 화를 내며 조선사행단을 당장 열하로 오게 하라 예 부를 닦달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자제군관으로 온 자들까지 다 데려와야 한다고 꼭 집어서 명령을 내렸단다.
지원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제 만난 '브라잇 동맹위원회'와 왠지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일이 이리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니 불안한 예감이 거의 확실한 것 같았다. 벌써 옆에선 부사와 서장관이 데리고 갈 비장과 수행원을 뽑고 있었다. 그들 역시 꼭두새벽부터 이런 일이 닥치어 정신이 없었지만 그나마 윗사람으로서의 체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정사가 살며시 눈을 뜨더니 걱정하는 표정으로 지원을 따로 불렀다.
“어서 가서 짐을 꾸리게. 데리고 갈 비장도 하나 정하고. 바로 떠나야만 하네.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어.”
“저기, 저는..”
“이보게, 연암. 자네가 연경에 더 머무르길 원한다는 건 내 잘 알고 있네. 피곤하기도 하고 유람도 더 하고 싶겠지. 하지만 황제가 불렀다니 어쩌겠냐? 더군다나 자네가 그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온 목적은 결국 천하를 구경해보려 하지 않음인가?
열하(熱河)는 조선인 누구도 가 보지 않는 길일세. 새로운 곳이란 말일세.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셈인가? 정말 그렇고 싶나?”
지원이 마당으로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진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진짜 아저씨를 보내는군요. 일이 너무 빨리 닥쳐왔어요.”
“그렇게 말이다. 근데 장복이는 어쩌고 있느냐? 창대가 없으니 비장 겸 견마잡이로 대신 데려가야 할 텐데.”
하지만 장복이는 그때 강시에게 물린 이후 아직 몸이 완전히 성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충격이 컸는지 이따금 거품을 내뱉으며 몸을 떨고 실성하기까지 했다. 지원은 어쩌나 싶었다. 때마침 아침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수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정사가 마치 결정한 것처럼 그녀도 열하에 가게 되었다고 갑작스레 알려주었다.
처음에 그녀는 길길이 뛰며 싫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굳은 표정으로 밥을 푹푹 떠서 입으로 쑤셔 넣자 그의 눈치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는 핸드백 외에 꾸릴 짐도 없었지만 당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석에 놔둔 이안이 보내온 상자를 열었다. 파란 스마트폰이 들어있었다.
바로 이장이 ‘오나시아’를 위해 특별히 개발한, 브라잇 동맹에서 엄청 잘 팔린다는 그 핸드폰이었다. 스마트폰을 켜서 그의 이름을 말하자 폰이 스스로 전화를 걸었다. 이안은 받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음성서비스로 문자를 남겼다.
[지원 아저씨와 열하로 바로 떠나게 되었음. 나중에 연락하겠음.]
이리하여 8월 5일 신해일 (辛亥日) 아침 9시, 정사와 부사, 서장관, 역관 셋, 비장 넷, 하인들 그리고 박지원과 수진까지 모두 74명에 말 55필이 연경을 나와 열하로 향하였다.
첨운패루에 이르자 떠나지 않고 남는 자들이 마중을 나와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창백한 장복이도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 있어 지원의 눈길을 적시게 했다. 마중받는 자들 역시 그들 못지않게 이별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아직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는데도 또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육체적 부담과 8월 13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전에는 꼭 도착해야 한다는 긴박한 임무를 띤 것이다. 또한 황제의 화를 풀고 그의 마음에 들어 조선과 정조 임금에게 조금의 폐도 끼치지 않기 위해 조선 사행단은 지금 목숨을 건 비장한 마음으로 떠나려 하는 것이다.
수진이 고삐를 잡은 말의 안장 위에 앉은 지원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사물을 바라보진 않았다. 그의 의식은 자신을 열하로 이끄는 이 사건의 의미를 곰곰이 뜯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알아왔던 세상이, 겉으로 보이던 세상이 다가 아니로구나 란 것을 서서히 깨달아갔다.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세계, ‘브라잇 동맹’에 대해 호기심이 일면서 자세히 알고도 싶어졌다.
‘이왕 닥쳐왔고 그럴 운명이라면 한번 풍덩 빠져서 힘차게 헤엄쳐보리라.’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주위로 시선을 돌리었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전 골목은 부러울 정도로 번화하였고 모든 게 넘치도록 풍요로웠다. 몸이 성치 않은 장복이 여전히 따라오는 걸 발견하자 지원은 어서 돌아가라며 여러 번 손짓으로 타일렀다.
그렇게 조선 사행단은 죽음을 불사한 비장한 각오로 다시 먼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