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속에 묻어 둔 문장들
중학교 시절, 미술 김종신 선생님은 내게 '예술'의 첫 문장이셨어요.
오른 손으로 글씨 쓰고 왼 손으로 그림을 그리셨답니다.
은발 휘날리며 호리호리한 몸매로 눈웃음 치던 그는 , 흙먼지 날리는 시골 아저씨들과 다른 차원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습니다.
운동장 라일락 나무 옆, 분필 가루 묻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그 끝에서 피어오르던 회색빛 연기는 지독히도 이국적이고 근사한 풍경화였습니다.
담배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라도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생이 되어 만난 젊은 미술 교생 선생님은, 김 선생님과는 정반대의 정물화였죠.
군데군데 비어 있는 수염을 무심하게 기른 그는, '나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으나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당시 나의 우상은 미술 과목 강경자 선생님이었죠. 동양화 전공이신데 커다란 책상 위에 떡 하니 가부좌를 틀고 작업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붓끝은 선율에 맞춰 춤추듯 노닐었는데 웃으시는 눈매는 완벽한 반달이셨어요.
선생님의 총애를 듬뿍 받던 나는, 그녀의 '어명'에 따라 무상으로 교생 선생님 지하 작업실로 한국화를 배우러 다녔어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닿는 아파트 지하 상가 화실은 제법 폼 났습니다.
하지만 화실보다 더 빛나는 나의 관심사가 있었는데, 홍콩 배우 '유덕화' 였죠.
무료 가르침 주시는 은혜도 잊은 채, 차비를 털어 덕화 오빠를 만나러 극장을 드나들었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들른 화실에선 동기들이 일취월장한 솜씨로 붓을 다루고 있었어요.
열등감에 군화 그리던 붓끝을 심술궂게 뭉개고 있는데
" 그동안 왜 안 온 거야?" 물으셨죠.
유덕화와 차비를 바꿔 먹어 차비가 없었다는 말은 못 했어요.
대답으로 라일락 담배에 불 붙이려던 선생님께
"저, 담배 한 번만 피워보면 안 돼요?" 했습니다.
선생님이 지저분한 수염 위로 총명한 눈빛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으셨어요.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내밀며 제대로 '빨고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연기에 공짜 수업의 부채감과 유덕화에 대한 죄책감을 실어 단숨에 들이켰어요.
'스읍—' 털썩.
쓰러진 나를 수강생들이 부축해서 심호흡하라며 아카시아 꽃이 팝콘처럼 핀 뒷동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장래희망인 미술 선생님 길로 가는 첫 번 째 기회를 날려 먹었어요.
두 번 째 기회인 인생의 후원자가 졸업 후에도 나타났습니다.
후원자님께 미술 선생님이 꿈이라 하니 학원을 보내주신 거예요.
전주 객사 사거리, 풍년제과와 민중서관 근처 입시 미술학원을 다녔습니다.
학원에서 나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부잣집 딸 H를 알게 됐어요.
짜리몽땅하고 귀여운 모습인 H가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불쑥 담배 한 개비를 건넸어요.
'세 보이고 싶다'는 유치한 욕망에 받아 든 그 담배가 화근이었습니다.
지나가던 후원자의 남편이 광경을 목격했고, '질 나쁜 아이'라는 낙인과 함께 후원은 끊겼습니다.
담배와의 악연은 끈질겼어요.
결혼 후에도 한숨을 위장하기 위해, 혹은 입맛을 잃어 살을 빼겠다는 핑계로, 서랍 깊숙이 담배를 숨겨 놓고 몰래 펴댔어요.
그러다 6년 전, 숨 막히게 도덕적인 친구를 만나며 생애 처음 듣는 지겨운 잔소리에 항복하고 말았죠. 담배를 끊어 살이 찐 건지, 먹성이 원래 좋아 찐 건지 알 길 없는 넉넉한 체구만 남긴 채 말이에요.
강경자 선생님처럼 김종신 선생님처럼 근사한 미술선생님 되고 싶던 소녀는 중년이 됐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그 매캐한 연기를 찾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 예전의 내 목구멍을 채우던 병목현상 같은 감정이 떠오릅니다.
담배 곽에 그려진 무서운 그림 중 덜 무서운 그림으로 골라달라는 손님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포스트잇이라도 붙여주고 싶었어요.
누구나 가슴 속에 연기 한 모금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 문장 하나쯤은 품고 사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