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플라타너스 잎이 사스락대던 매연의 도시
전주시 팔복동, 회색 시멘트 건물이 요새처럼 둘러싸인 공업단지 중앙에 나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왕복 2차선 신작로를 따라 걷다 철로를 횡단해 우회전하면, 이층높이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다.
얼굴만 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사스락대는 소리는, 황량한 풍경 속 유일한 자연의 소리치곤 건조했다. 매연에 절은 탓인지, 나무의 본성인지, 이름만큼 예쁘다는 느낌이 전혀 없던 무채색 나무다.
그 시절 팔복국민학교는 한 학년이 12반이나 되었음에도 교실이 모자라 천막을 치고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했다.
삭막한 풍경보다 더 시린 것은 집안 공기였다. 무능한 아빠 대신 야쿠르트 배달과 화장품 외판원 일까지 도맡았던 엄마를, 술 취한 아빠가 이틀이 멀다 하고 엄마 몸에 멍을 남겼다.
그러한 환경에서 학교가 내민 ‘장래희망’ 조사서는 적어낼 금액이 없는 백지수표와 같았다.
선생님께서도 60명이 넘는 아이들 챙기느라, 존재감 없는 아이가 내미는 빈 종이까지 꾸짖을 여력이 없으셨을 거다.
어쩌면 꿈이 없는 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셨기에 야단치지 않으셨는 지도.
훗날 스물네 살 된 딸에게 결혼 생각이 있느냐 물었을 때, "엄마 아빠 보고도 그런 마음이 들겠어?"라고 되묻던 그 냉소와 어린 날의 백지수표는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을 거다.
그때 경험한 어른의 세계란 주류회사에 일조하는 아빠와 안쓰러운 엄마, 길가 담벼락에 노상 방뇨하는 아저씨와 버스 기사님이 전부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추가로 보이긴 했지만, 어린 나이지만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요. 구구단 외우기조차 버거운 나였으니까.
공부 잘해 사랑을 독차지하는 연년생 언니와 경쟁하는 대신, 일찌감치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언니보다 빗자루질이 꼼꼼히 하고, 고장 난 가전제품을 고치고, 칠판지우개를 하얗게 털어놓는 세심함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의 '재능'을 눈여겨봐 주지 않았다.
예쁘고 영특한 언니가 칭찬을 독식하며 자라는 동안, 나는 일찍이 사회의 불공평함에 눈을 뜬 어린 철학자가 되어 꿈꾸는 행위의 덧없음을 믿었다.
2부: 낯선 미니어처 세상, 왕궁남국민학교
그러나 삶은 감사하게도 숨 쉴 구멍 하나 남겨두었다. 꿈이 멸살당하던 팔복동을 떠나 보육원으로 향하던 길, 신은 내게 선물 같은 학교를 주셨다.
5학년 때 전학 간 왕궁남국민학교는, 한 학년이 두 개뿐인 깜찍한 곳이었다. 전 학년이 1반과 2반이 전부다.
학교 앞 연못에는 연꽃들이 금의환향을 환영하는 현수막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운동장은 한 손으로 쓰다듬을 만큼 아담하고, 사방은 산과 들과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매미 소리와 여치의 날갯짓, 파란 하늘 묻은 살가운 바람이 교실 안으로 드나든다.
매연에 버무려진 플라타너스 대신 거짓 없는 계절이 숨 쉬고 있던 왕궁남국민학교가, 불량식품 파는 어른조차 없던 그 순박한 미니어처 세상이 내게 다시 물었다.
"너는 아직도 꿈이 없니?"
네 자매가 머물게 된 '시온육아원'은 생각보다 안전한 피난처였다. 때리는 아빠도, 맞는 엄마도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를 '고아'라 불렀지만, 단언컨대 버려졌다고 생각지 않았다.
서른두 살의 젊은 엄마가 의지할 곳이 친정이 아닌 국가였을 뿐, 엄마는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사회복지 제도를 아주 현명하게 이용한 것이라 재해석했다.
그곳엔 동갑내기 여자만 열두 명이 있었다. 매일 아침 종소리에 맞춰 국민체조를 하고, 식당에 줄 서서 보리가 섞였지만 온기 있는 밥을 배불리 먹었다. 밥은 공짜였고 인심도 후했다.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도 있으니 자존감이 샘솟기도 했다.
걸레질만 열심히 해도 '착하다'는 칭찬이 쏟아지는 그곳은, 엄마가 보고 싶은 것만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래희망이라는 씨앗을 품게 한 분은, 180명 아이들의 '어머니'라 불리던 김정자 원장님이셨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아이들에게 사랑만 주면 되는 줄 알았던 때라 철부지 눈에 마냥 부러웠다.
중학생이 되어, 경상도 사투리가 멋들어진 김종신 미술 선생님을 동경하며 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양손으로 글과 그림을 써 내려가던 겉멋이 어찌나 근사하던 지.
결국 보육원장도 미술 선생님도 되지 못했지만, 양아치나 범죄자의 멋에 취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 자란 것이니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꿈은 부질없다 믿으며 백지수표 내던 아이는,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자기만의 문장을 써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