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멈춘 도둑질

그래 본 적 있나요?

by 재해석



일기를 훔쳤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날마다 선생님께 일기 검사를 받을 때에요.

언니의 일기는 보암직 먹음직한

탐스러운 나무였어요.


전학은 새로울 수 있는 기회이기에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던 거죠.

언니는 성실하게 흥미로운 일기를 생산해 냈기에

일기 훔치기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5학년인 내게 6학년 언니의 일기는

사유의 비결이 담긴 교과서였고

쓰기의 기술서였어요.

표절은커녕 쉼표 마침표까지 복사해 붙였답니다.


그것이 죄라는 인식은 있어서

베낀 일기장을 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

꽁꽁 숨기고 다녔죠.


어쩌면 언니를 불편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최초의 계기일 수 있겠습니다.


완전 범죄를 위해 노심초사하느라

동생으로써 누릴 수 있는 투정도 못하고

꿀려서 당당하지도 못했거든요.


선악과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일기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지 못할까요.


일기는 나의 역사고

나를 만드는 최고의 가치라는데

그럼에도 일기 쓰는 습관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힘든 삶에서 감사와 기쁨 찾는 법을 몰랐고

슬픔을 기록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도 있었죠.


있는 그대로 쓰면 되는데

언젠가 발각될 거라는 불안이 있어 편히 쓸 수 없었습니다.


미운 사람도 서운한 사람도 많았고

지금도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미워하는 건 되지만 그가 알게 되는 것은 싫으니까요.


이제는 매일 일기 같은 글쓰기를 합니다.

그 시절 하지 못한 성실한 쓰기를 하고 싶어서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며칠 늦는다고 손바닥 맞을 일도 없고

개똥 같아도 쓰기만 하면

누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좋아요를 눌러 주잖아요.


좋아요는, 빨간 색연필 돌돌 벗겨

모기향 같은 동글뱅이 다섯 개 탄력 있게 남기는 일입니다.


건조한 내 삶에 온기 한 방울 톡 떨어뜨려 주는

그 동그라미를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훔치지 않은 나의 진짜 이야기를 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디질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