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당신의 오해, 나의 오해

by 재해석


당신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봐 온 보육원 아이들의 서사는 대체로 식상하다.

억지스럽고, 자주 틀린다.


세상은 보육원의 결핍만 골라 소비해 왔다.

그 결핍을 우리의 상징처럼 덧씌우고, 내가 살아온 삶의 결을 납작하게 눌러 버렸다.

고아의 서사만으로는 돈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 위에 더 자극적인 장식이 붙어야 한다.

보육원의 속살만 다루는 이야기엔 간접 광고를 끼워 넣을 틈도 없을 테니까.

직접 겪어 본 적 없으니 남의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도 비슷비슷하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면죄부 줄 생각은 없다.

그들이 쉽게 찍어 낸 신파 캐릭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내적 손실을 입었는지 알면, 피해 보상이라도 청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들이 멋대로 덮어씌운 칙칙한 그림자를 걷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세상은 보육원 출신의 경계심을 곧장 열등감으로 번역해 버렸다.

그래서 내가 겪은 이야기로 슬쩍 알려 주고 싶다.


보육원 아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읽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

당신의 호의가 순수인지 과시인지, 생각보다 빨리 가려낸다는 것.

그리고 보육원 생활이 당신들이 아는 것처럼 늘 초라하고 어둡기만 한 곳은 아니라는 것.

산다는 일 자체는,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



중학교 때였다.

우리 반에 연예인 뺨치게 예쁜 애가 하나 있었다.

조용했고, 공부도 잘했다.

늘 1등 근처를 맴돌았지만 그 아이와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었다.

어느 날 하교 후, 보육원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뒤따라왔다.

돌아보니 그 애였다.

학교 후문에서 보육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애는 이 길로 다니던 애가 아니었다.

더 먼 곳에 사는 애들은 정문으로 나가 버스를 탔다.

의식은 됐지만 아닌 척 걸었다.

길 왼쪽엔 포도밭이 있었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포도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손만 뻗으면 한 송이는 문제없어 보였다.

문제는 포도밭 한가운데 원두막이 있다는 점이었다.

포도의 수호자가 있는지, 나무에 가려 알 수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 향이 짙었다.

제발 따 가세요.

포도송이들이 유혹하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원두막을 살피며 포도 냄새에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심하던 그 아이가 이름 대신 내 등을 톡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노란 바나나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끝이 내민 노란 곡선이 포도 향을 밀어냈다.

그 아이 얼굴은 수줍음과 다정함으로 환했고 그 길은 빨간 태양과 노란 바나나, 파란 하늘과 보랏빛 포도, 초록 잎사귀로 물들었다.

“아빠가 세 개 사 오셨는데, 오빠 하나 줬어. 이건 너 먹어.”

나는 왜 그 순간, 고맙다고 받지 못했을까.

시원하게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물며

“와, 나 처음 먹어보는데 진짜 맛있다.”

그 말 한마디를 왜 못 했을까.

왜, 나에게?

내가 불쌍해 보였나. 내가 보육원 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왜 저걸 나만 먹으라고 하지. 다른 애들은 어떡하고.


어린애답지 않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거봐, 그게 열등감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왜 넙죽 받아먹지 못하느냐고.


열등감만은 아니다. 성격이다. 기질이다.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 중에는 냉큼 받아먹고, 활짝 웃으며 “맛있다! 또 먹고 싶다!” 했을 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넌 역시 염치도 눈치도 없구나.

우리는 안다.

비슷한 상황도 상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

나도 눈치는 있는 애였다.

분석하느라 덥석 받지 못했을 뿐이다.

고마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상한 건, 그날 바나나를 먹은 기억이 비어 있다는 점이다.

거절했는지, 받았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 장면은 또렷한데, 정작 바나나만 없다.

얼마 후, 그 수줍음 많은 아이가 전교회장에 출마했다.

그때 잠깐 발칙한 생각을 했다.

혹시 내게 내밀었던 그 바나나가 가방 안에 가득했던 건 아닐까.

바나나는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나.

“너만 주는 거야”는 전략적 문구였을까.

바나나는 질문이 많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바나나가 불쑥 끼어들 접점이 우리 사이엔 없었으니까.

시간이 더 지나 어린이날, 엄마와 갔던 중국집 계산대 위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봤다. 모형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다.

그 무렵의 나는, 행여 누가 내 존재를 납작하게 볼까 봐 나를 꾸밀 장치를 몇 개쯤 마련해 두고 살았다.

우리 엄마는 마침 영화배우 정윤희처럼 예뻤다.

엄마의 미모를 내 자랑처럼 꺼냈다.


보육원에 사는 애들이 나처럼 공부를 못한다고 오해할까 봐, 전교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은 학생이 우리 언니라는 사실도 기회만 생기면 흘렸다.


때로는 그 치장에 취해 언니를 지나치게 추앙했고,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필요하다고 믿었다.

내 텅 빈 자존감을 받쳐 줄 장식물로는 쓸 만했으니까.

언니 일기를 베껴 쓰고, 거기에 무슨 자랑이라고 ‘훔친 일기’라는 제목까지 붙였던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기조차 끝내주게 쓰는 언니도 보육원 아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대신 누군가의 반짝임을 들고 와 내 빈 항아리에 쏟아 붓는 식이었다.


너는 고아도 아니고, 반고아도 아니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바나나도 사다 주는 아빠가 있지만, 예쁜 엄마와 완벽한 언니는 없지? 그런 식으로라도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할수록 우습다.

예쁜 엄마와 공부 잘하는 언니가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내가 예쁘고, 내가 공부를 잘했어야지.


그 시절의 나는, 내 안의 빈 곳을 남의 장점으로 메우는 법부터 배웠다.

우스꽝스럽고 초라해 보여도, 그때의 나에겐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보육원 밖의 오해도 있었지만, 더 오래 나를 웅크리게 한 건 내 안의 오해였다.

나의 결핍을 들킬까 봐, 다른 것들로 포장했다.

그 시간들이 헛되지만은 않다.

부모의 그늘 아래 있지 못했기에 일찍 독립심을 익혔고, 일찍 단단해졌다.

물론 그 단단함은 때때로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세상은 사람을 둘로 나누려 한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갈리지 않는다.


그 바나나 하나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순수였는지, 나의 경계였는지.


다만 분명한 건 있다.

세상의 오해만큼이나, 우리 스스로의 오해도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날 나를 붙잡고 있던 건

당신의 오해보다 먼저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