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호박잎 아홉 장 따는 마음

by 재해석

[ 매거진과 동일한 제목이지만, 추가하고 퇴고하여 올립니다.]


서른두 살의 가난한 이혼녀에게

중학교 근처도 못 가 본 일은 평생의 한이었다.

빼어난 미모로 어딜 가나 눈길을 끌었지만,

엄마에게 국졸은 늘 걸림돌이었다.

7남매의 장녀는 그랬다.

책가방 대신 포대기를 업었고,

학교 대신 집안일을 배웠다.

어린 나이에 이미 엄마 노릇부터 익혔다.

그래서 그랬다고 했다.

엄마의 가난으로는,

딸 넷을 중학교도 못 보낼 것 같았다고.

보육원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고 했다.

외가에 희생만 하고 제 몫의 사랑은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라, 모정을 앞 세워 자식 앞날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언니는 나와 달리, 그 많은 아이들 속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성적 장학금도 받았다.


그런 언니는, 보육원에 자식을 보낸 엄마의 후회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의 일생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그 뒤로도 남자 복은 없었다.


더는 갈 곳 없어진 엄마는

난소암 말기에 나와 살게 됐다.

평생 죄인처럼,뭐 하나 제대로 요구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엄마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빠의 잔인한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걸 본 나로서,

엄마의 가난이 엄마 잘못이 아님을 아는 나로서,

우리를 보육원에 보냈지만 엄마의 관심이 끊어진 적 없음을 아는 나이기에,

원망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혼 뒤 딸 넷은 둘씩 나뉘었다.

큰애 둘은 아빠가 데려가고,

셋째와 넷째는 엄마 몫이었다.

우리는 타지로 이사했다.

아빠를 아는 엄마는 수소문 끝에 어렵게 우리를 찾아냈다.

마침 언니와 나만 두고 아빠가 사라졌을 때였다.

엄마는 수사반장 여형사처럼 우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세상은 부모에게 무책임하다는 딱지를 쉽게 붙였다.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져야 하는 건 맞지만, 책임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아빠는 우리를 방치했지만, 엄마는 분명 아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엄마는 기어이 우리를 찾아냈다.

사슴 두 마리 키우는 할머니 댁 쪽방에 세 들어 살며

며칠씩 굶고 있을 때였다.

엄마도 미싱공장에 다니느라 어린 동생 둘을 외가에 맡긴 상태였다.

둘을 더 맡기기엔 외가도 버거웠다.

그렇게 된 거였다.

사연 많은 아이들이 모이고, 적어도 학교는 보낼 수 있는 곳.

우리는 그렇게 보육원에 가게 됐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엄마가 어린 시절 그런 시설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사람 보는 눈도 달라졌을까.

엄마 인생에 드나든 남자들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진심으로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엄마는 그만큼 예뻤다.

한 여자의 일생으로 봐도 엄마는 가엾다.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가여웠다.

일흔도 되기 전에 몹쓸 병에 걸린 엄마는

내 마음을 더 깊이 찢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형편에서 최선이라 믿는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자식을 보육원에 보냈다는 낙인에서 엄마는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그 고통이

난소암의 뿌리였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다만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을

누구 탓으로라도 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든 아무 조건 없이 미안하다고만 해주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내가 너희들 책임 안 져서 몹쓸 병에 걸렸나 봐.”

엄마의 이 말 뒤에서

내 말줄임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에요도 못 하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도 못 하고,

그런 말이 어딨어요도 못 했다.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암으로 퉁 치려고?

그렇게 쏘아붙였더라면, 말줄임표 뒤에 마침표를 찍었을까.

나는 그런 말들을 뒤로 밀어 두고

끝내 엄마에게 대못 같은 말을 박았다.

“잘 버텨, 엄마. 우리 떼어 놓고 살 때만큼 아프겠어?”

문장을 빌려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의 항암통을 그 시절과 견주며, 그 고통에 비하면 지금의 통증쯤은 견딜 만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엄마의 고통이 항암보다 더 깊었다는 걸 뒤늦게라도 내가 알아봤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엄마와 헤어진 내 고통이

항암통을 넘어섰다는 걸 돌려 말한 걸까.

틈만 나면 내가 겪은 일들을 꺼내 엄마 앞에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다 또 삼켰다.

말하기엔 너무 늦었고,

삼키기엔 너무 오래 썩은 감정이었다.

엄마를 살리고 싶었다.

살리고 싶은 마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 몸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약봉지를 챙기고, 구토 그릇을 비우고,

장폐색이 와 응급실로 달리 던 밤에도 문득문득

보육원에 남겨진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울었다.

“잘 버텨, 엄마.”

그 말 앞에는 딸이 있었고,

그 말 뒤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3년을 살아줬다.


항암 후유증으로 장에 천공이 생겨

멀쩡한 정신 상태로 석 달 넘게 아무것도 못 드셨다.

인간이 감당 불가한 극한의 고통을 모르핀으로 버티다, 끝내 우리 밭 호박잎 한 번 못 따 보시고

생의 건너편으로 먼저 자리를 옮겼다.




작년 봄, 이웃집 승희 씨가 던져둔 호박씨 몇 알이

기어이 평온을 침범했다.


어디로 뻗을지 모르는 호박 줄기의 뻔뻔한 손이

고집스럽게 우리 집 울타리를 붙잡았다.

고추밭을 오갈 때마다 그 끈질긴 구애를 먼 쪽으로 밀어놓곤 했지만, 눈치 없는 생명력은 기어이 내 마당 끝자락에 뻔뻔한 도장을 찍었다.

칡잎이길 바랐던 외면의 시간도 잠시,

햇살 아래 거친 결은 누가 봐도 호박잎이었다.

잎을 마주할 때마다 시간은 낡은 필름처럼 감겨

엄마와 걷던 그해 산책길로 나를 불러냈다.


병색이 짙던 엄마가 남의 논두렁에 탐스럽게 올라 온 호박잎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엄마의 마른 손이 본능처럼 첫 잎을 꺾어 올리려던 순간,

나는 공범이 되기 싫은 사람처럼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핀잔부터 줬다.

“잎을 좀 솎아줘야 호박이 실하게 열려.”

엄마의 낮은 항변은 딸의 어설픈 도덕심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때 왜 그 하찮은 잎 한 장보다 옳다는 허울이 더 중요했을까.


엄마가 말렸어도 억지로라도 손에 쥐여 줬어야 했다. 호박잎만 보면 목이 죄어 온다.


내년 봄엔 우리 밭에 호박을 넘치게 심어주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죽음은 늘 약속보다 발이 빨랐다.


이웃집 호박잎 앞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뒤늦은 참회 아홉 장을 기어이 뜯었다.

찜통 속 뜨거운 김을 견딘 잎사귀들은

마침내 날카로운 솜털을 죽이고 순한 얼굴을 드러냈다.


접시 위에 겹겹이 포개진 저 연한 잎사귀들은

엄마의 수의(壽衣)를 닮은 그리움이었다.

아홉 번의 후회를 씹어 삼키며

끝내 받아먹지 못한 엄마의 마음을 뒤늦게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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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주 늦게 이해되고,

후회는 밥상 위에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