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이 Jun 14. 2019

바쁠수록 친절하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6월 5일. 다시 가방을 싸 들고 일본으로 향했다. 작년 5월부터 지금까지 통산 여섯 번째의 일본행이니 두 달에 한 번씩 공항에 간 셈이다. 이번 6월 여행은 철저한 단체 여행으로, 일본어를 공부 중인 내가 공식 통역 도우미로 합류하게 됐다. 양국에 지인이 있는 한국 분의 소개를 통해 작년에 이어 도쿄 사사즈카에 두 번째 방문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방문 또한 한국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총 10명이 출발하는데, 나를 포함해 5명이 일본 방문 경험이 있다. 알고 있기에 더욱 철저하고 확실하게 준비하려 노력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참 재미있게도,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순간에 위기는 찾아온다.



하나. 전체 인원 중 딱 한 명의 비행기 티켓이 누락되었다. 정확하게는 예약을 빼먹었다. 다 같이 공항 카운터에서 수속을 하기 위해 여권을 내밀고 짐까지 다 부쳤는데 공항 직원이 말한다. '김OO 손님은 예약 번호가 없는데, 어디서 예약하셨나요?' 심장이 쿵. 전체 인원의 예약을 맡았던 분이 실수로 한 명의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이다. 출발 편 비행기에 남은 자리는 없고, 다음 비행기도 만석이다. 부랴부랴 흩어져 다른 항공사에서 2시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찾아 표를 예매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기기엔 무척 중대한 문제다. 돈은 냈고, 짐도 다 싸 왔고, 이른 새벽 공항까지 나왔는데 내 비행기 표가 없어서 나만 못 간다니. 출발 전 여권명과 탑승자 이름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수십 번은 넘게 생각하셨단다.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세 시가 되었단다. 어떻게든 당사자의 표를 구해주고 나서야 멍한 표정으로 김밥을 욱여넣던 그 남자의 얼굴이 생각난다.



둘. 한국에서 가져온 냅킨 100장과 김 10봉지가 사라졌다. 냅킨을 사용한 것은 네 번뿐인데 추가로 가져온 100장까지 전부 사용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짐을 부칠 때 어디에 넣었는지를 적어 둔 체크리스트가 있었는데, 그곳엔 이미 모든 것을 꺼냈다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사 왔던 것인데. 세밀하게 원인을 파악할 틈도 없이 음식을 대접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없으면 없는 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은 짐을 다시 챙겨가기 위해 공용으로 가져온 캐리어를 열었더니 포장도 뜯지 않은 냅킨 100장과 김 10봉지가 나왔다. 애초에 짐을 전부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꾸려온 짐을 다 풀어 놓았다고 말한 사람의 입장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다.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뭐 바쁘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가장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 마음을 쉽게 잃게 만든다.



셋. 거침없이 진행되는 일정에 조금씩 피로가 쌓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각자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낯선 곳에서 잠을 자며 주어진 역할을 해내느라, 그리고 잔뜩 흐리고 습하고 비가 오는 날씨에 축 처져서 예민함이 극에 다다르던 순간, 애매하게 남은 음식 몇 가지를 대접하는 자리에 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설전이 시작됐다. 조리를 할 시간이 부족해서 하지 말자고 의견을 냈더니 그래도 남기는 것보단 하는 게 좋지 않냐고 묻는다. 그건 또 맞는 말이니 그럼 하자고 했다. 그런데 한 쪽에서 여유가 나지 않으니 미리 해 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식어서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런 것도 같아서 그럼 속 편하게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도 음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낸 사람이, 자기가 할 테니 그냥 진행했으면 좋겠단다. '하자'와 '하지 말자'로 15분간의 설전이 오갔다. 과연 이것이 설전이라 부를 정도의 중대한 사항이던가. 친구와 저녁을 먹은 뒤 디저트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뜨겁게 대화해 본 적이 있는가?

결국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는데 분위기가 왜인지 어색하다. 커피를 연달아 세 잔씩 마신 정도의 흥분 상태다. 다들 가슴 속의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입을 닫는다. 각자가 편리하고 효율적이라 확신하는 방법이 일치하지 않아 예민해졌다. 네가 힘들까 봐, 그리고 내가 하면 되니까의 배려 줄다리기가 기분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나의 효율적인 방법과 그의 효율적인 방법이 자꾸만 평행선을 그려나간다.




바쁠 망(忙). 한자 풀이 그대로 바쁘다는 것은 마음(心)을 잃는(亡) 것을 뜻한다. 남을 생각할 여유를 잃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 이런 순간에 친절하라는 것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가장 예민하고 힘들었던 순간에 속상함을 토해내고 지쳤음을 온전히 드러냈다가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그 순간을 돌아봤을 때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싶어 부끄러웠으니까. 최고로 어려운 순간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라는 것 같아 당신이나 그렇게 해 보라고 따져대고 싶지만, 날카로운 순간을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할 말이 없다.



바쁜 것이 좋다지만 한편으로 정말 좋은 것인지 생각해본다. 바쁘게 지내다가 정말로 '망'하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 바쁨의 실체를 잘 들여다보면 다들 같은 목표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잘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내는 것.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나는 나대로 격심한 전쟁을 치르며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피폐해진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누가 더 어렵게 사는지 무게를 재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온유와 절제를 꺼내 바쁠수록 친절하란다. 알겠는데 왜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내가 바빠 남을 돌볼 여유가 없을 때도, 그가 바빠 나를 돌봐 줄 여유가 없을 때도 친절하기. 조금 더 부드럽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토닥여주기. 할 말이 많아도 지금은 하지 않기. 요즘을 살아내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전일지도 모르겠다.




친절하라. 당신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으니. - 플라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이번 일본 방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고 왔습니다. 비록 일정 내내의 표정은 사진 속 루소처럼 입만 웃고 있었지만요. 허허.


작가의 이전글 낮이 있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