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이 May 31. 2019

낮이 있는 삶

낮이 여유로워 조금 서글픈 프리랜서의 신세 한탄 이야기


'저의 경우 낮에는 점심시간 한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할 만큼 분주할 때가 많고, 카카오톡 메시지도 잠깐씩만 확인하고 가벼운 답장밖에 하지 못해요. 하지만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여유롭게 사용하는 편이죠. 그래서 저녁 즈음에는 연락이 잘 오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일의 특성이 서로 다른 거니까 이해하려고 노력할게요.'




오전 9시 30분. 나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최근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나른함을 이기지 못해서 늘어져 있을 때가 많지만 이때쯤 일어나는 게 익숙하다. 10시 반쯤 텔레비전을 보며 여유롭게 아침 겸 점심 한 끼를 떼우고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마감인 번역 작업이 2건, 저녁 식사 약속이 있고, 그전에 생일인 친구를 위해 어딘가에 들러 선물도 사야 한다. 아, 오늘도 저녁 약속이 있어서 미리 작업을 좀 해둔 다음 돌아와서도 작업을 이어서 해야 한다. 저녁 11시쯤에는 들어올 수 있겠지? 스케줄 조정을 해야겠다. 언제나처럼 인스턴트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들에 순서를 매기고 나니 분주한 마음이 정리가 된다. 씻고 나니 어느새 시계는 정오를 가리킨다. 지금부터 저녁 7시까지는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이스티를 마시며 책을 읽어도 좋고 자주 가는 집 앞 카페에서 노닥거릴 수도 있다. 곧 응시하는 일본어 시험공부도 할 수 있고 공원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직장으로 끌려가는 삶이 사라지니 마음에 여유가 가득하다.



사회생활을 하는 3년 반 동안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는 당연히 쉬는 날이었다. '나인 투 파이브'족이라면 보장받아야 마땅할 공식적인 주말이기에 자연스럽게 나들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식사 약속을 쉽게 잡곤 했다. 평일 저녁도 마찬가지. 저녁이 있는 삶에는 그 나름대로의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다. 분주했던 오전과 오후를 열심으로 보내고, 살짝 지친 몸과 마음을 맛있는 음식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래는 시간이니까. 그래도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고, 평일 낮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듯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길래 이 대낮에 백화점에 나와 쇼핑을 하는지, 카페에서 책을 읽는지, 반려견과 산책을 즐기는지 궁금했다. 어쩌다 병원이나 은행 업무를 봐야 하는 날이면 귀중한 점심시간을 쪼개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느라 신세 한탄을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냐면서.



프리랜서로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는 건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루의 끝자락에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찜찜하고 불편했다. 주변 사람들도 나 때문에 불편해보였다. 평일 저녁은 대체로 시간이 다 맞는데, 내가 안 되니까 주말로 약속을 미루곤 했고 어떤 때는 도저히 일정이 맞지 않아서 결국 내가 일을 포기하고 평일 저녁 약속을 잡은 적도 많다. 나 때문에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이면서도 속상했다. 일을 조정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조정한 게 아니라 일을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친구랑 저녁 한 끼 먹으려고 연차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연차를 쓴 김에 약속을 잡지 않나? 약속 시간이 안 맞아서 쿨하게 회사에 조퇴 신청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나? 내가 평일 저녁 약속에 나온다는 건 그날의 일급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라서 큰 포기가 필요한데... 구구절절 설명하면 뭐하나, 그저 나도 힘들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지만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갈 것 같으니 입 다물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의 내 상황을 오후에 출근해 밤에 퇴근하는 학원 강사에 비유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 날 소개로 연락처를 받은 남성분께서 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을 했다. 만나기도 전에 자신의 바람을 당당하게 말하셔서 책도 읽고 글도 써야겠는데 열심히 답장을 해드렸다. 내 일은 '이해받아야' 하는 일인가 싶어 무척 기분이 상했다. 아니, 기분 나빴다. 지기 싫어서 나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만나서 밥을 먹을 때도 평일 저녁은 보통 언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물었고 남들과 달리 밤늦게까지 깨어 있어야 해서 무척 힘들고 적응하느라 많이 지치셨겠다고 했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름 공감의 말을 전하려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괴롭지 않고 말씀하시는 만큼 힘들지 않으며 내 일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때의 내가―그리고 지금의 나도―속이 배배 꼬여서 그렇게 말했던 거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별종이 아니다.



직업을 바꾸고 남들과 다른 패턴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지 어느덧 3년. 아직도 편견 아닌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롭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인가. 내 발로 직접 다른 세계에 들어왔고 남들과 달라서 조금은 외롭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한마디에 꼭꼭 감춰두었던 무언가를 들켜 되려 성을 내는 듯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왠지 서글펐다.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고 뜨거운 한여름의 열기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새벽 시간에 생각하는 순간이 무척 좋다. 낮이 주는 분주함과 상쾌함과 평온함과 편안함에 젖어드니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한 적도 있는데.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다 보면 함께할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가 돌을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네 상황은 누가 봐도 특이한데 뭘 아니라고 하는 거냐면서. 비록 남들 눈에는 자정에 종이 울리면 사라지는 신데렐라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다시 저녁이 있는 삶으로 돌아갈지 몰라도, 온화한 낮이 있는 이 삶이 무척 좋은데. 이 참맛을 알아줄 사람, 대체 어디 있나.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이번 달에는 낮에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내일이면 6월이네요. 일 년의 절반에 접어든다는 사실이 마냥 반갑지는 않네요.


낮이 있는 삶이 얼마나 좋은가!를 설파하려다가 억울함만 쏟아냈습니다.

삶도, 글도 예측불허의 연속이군요.

(음?)




다음주는 한 주 쉬어 갑니다. :)

작가의 이전글 글을 쓸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