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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Jun 28. 2019

손재주를 포기한다

그게 없으면 어때서

늘 손재주를 염원해왔다. 나에겐 없고 그들에겐 있는 것. 나는 그림을 못 그리고, 그런 데는 재주가 없어서 감성 가득 그려낸 그 곡선의 향연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얻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포기할지.



그것을 얻기로 결정한 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 노력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고, 관찰하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서 문구점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는데, 당시 엄마가 가장 싫어했던, 잘 지워지지도 않으면서 모양만 그럴듯하게 귀엽게 만들어 둔 지우개를 툭하면 사곤 했다. 햄버거 지우개, 감자튀김 지우개, 콜라 지우개, 우유 팩 지우개, 라면 지우개, 피자 지우개, 케이크 지우개...(전부 음식 모양인 이유는 마케팅 때문이겠지?) 실제로 이것들은 모양만 예뻤지 잘 지워지지가 않았다. 예쁜 모양을 망치기 싫어 큰맘 먹고 모서리 일부를 사용해봐도 잘 지워지지 않아서 새 지우개를 살라치면 엄마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사촌 자매의 집에 놀러 가 4절 스케치북에 직접 손으로 그린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것이 우리 셋 사이에서만 유행했던 것인지 아니면 초등학교, 그것도 아니면 동네에서 유행하고 있던 놀이인지는 알 수 없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말을 이동시키고, 말이 멈춘 칸에서 제시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게임 원칙이었는데,  게임 보드를 예쁘게 제작하고 꾸미기 위해 색칠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미대를 졸업한 사촌 동생의 그림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이었지만 무척 즐거웠다. 내가 만들고 그려낸 게임에 재밌게 참여해주는 모습에서 나름 보람을 느꼈달까. 그러나 점과 선으로 나의 우수함을 증명해야 하는 학교 미술 시간은 달랐다. 그저 재미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에 미세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생각에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다. 내신 성적도 좋고 미술도 적당히 잘하고 음악 시간에도 뒤처지지 않는 상위권 친구들에게 어차피 질 싸움을 하는 기분이랄까. 결국 수행평가를 혼자 해결하지 못해 아빠가 도와준 적도 있고, 이후 건축사가 된 사촌 오빠의 손을 빌려 그림을 완성하기도 했다. 손재주. 그놈의 손재주.



돈도 시간도 생긴 사회인이 되자 그것을 더욱더 열심히 얻어내기로 결정하고 물질을 투자했다. 직장인의 퇴근길 취미를 응원한다는 '5분 스케치', '힐링 테라피' 등의 상술에 맥없이 쓰러졌다. 책도 읽고, 그려도 보고, 따라 칠하고, 강의를 듣는 연속적 노력에 조금은 달라지는 것을 느껴 재미를 붙이기도 했지만 늘 오래가지 못했다. 호기심이 취미로 진화하는 산등성이를 넘기 전에 그만둬 버렸기 때문일까. 못 그리면 안 그리면 그만인데, 뭐가 아쉬워서 이 행위에 자꾸 집착하는 것인지.

어쩌면 진심으로 갖고 싶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재주를 손에 넣어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내 마음속 한쪽에 인정과 관심이 고팠던 어린아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뿌듯한 나, 기뻐하는 엄마, 어깨에 힘을 준 아빠가 웃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지만, 다른 이에 비해 잘하지 못하는 것들이 발견될수록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꼬마 아이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못해도 괜찮은데 말이다. 아마 그때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은 '승연이도 이 정도까지만 해줘도 참 좋을 텐데'가 아니라 '괜찮아, 잘하고 있어'가 아니었을까. 손재주란 내가 진심으로 염원했던 것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능력을 향한 질투일지도.



가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 집에 있는 스티커나 리본을 활용해 직접 포장을 한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 온 '관찰하는 행위' 덕분에 아기자기한 페이퍼 포장지나 리본, 엽서, 스티커, 카드 등이 많다. 가지고 있는 것들끼리의 가장 괜찮은 조합을 찾아 그럴듯하게 꾸며냈을 때의 쾌감이 꽤 괜찮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펜으로 적고, 키보드로 두들겨 하나의 페이지로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잘 읽었다고 공감하고 간다고 그러니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한마디를 들었을 때는 더더욱. 그래, 나도 마냥 손재주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손재주라고 했더니 떠오르는 일상 속 사진들 - 왼쪽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작가님이 그려 주신 제 얼굴, 오른쪽은 요새 푹 빠져 있는 마카롱 가게입니다.


Side note : 요새는 쓰는 것조차 지켜내는 게 조금 버겁네요.(뭔가 문법적 호응이 안 맞는데... 무슨 말인지 다... 아시겠죠? 음?)

기껏 에세이 쓸 때 주의할 점이랄지, 여러 가지 배웠는데 적용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슬퍼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마카롱 가게가 있어요.

남자분이 사장님이신데, 어쩜 그렇게 여심을 저격하시는지. 알록달록하고 예쁜 마카롱을 만드시는 걸 보면서 참 저런 손재주 부럽다고 생각한 것이 이번 글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언제 언급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몰라서 늘 고민입니다만 제 영국 여행기를 담은 전자책이 발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신나는 소식은 발간이 되는 대로 포스팅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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