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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Dec 07. 2018

여행의 기술


여행을 떠나 보면 결국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대로 여행을 하게 된다는 생각이 돌림노래처럼 뇌리를 떠도는 순간이 찾아온다. -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중에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 여행보다는 해외 여행 파다. 일부러 그런 취향으로 길들인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다. 직장 출퇴근 시절 남들에 비해 비교적 긴 휴가 기간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었던 사회 경험도 한몫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여행은 내 인생의 취미로 자리 잡았고, 블로그 소개 글에도 당당히 써 놓았듯 나는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은근히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을 많이 그리고 혼자 잘 다니는 아이'로 인식돼 있다. 가끔은 그 말 속에 숨겨진 뉘앙스가 미묘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로이, 지금을 즐기며, 내 삶에 새로운 재미를 선물하는 여행을 앞으로도 만끽할 예정이다. 올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항에 네 번이나 다녀왔다. 혼자 여행도 있었고, 같이 여행도 있었는데 그 순간의 추억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좋은 원동력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며칠 전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속 작가의 짤막한 도쿄 여행기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사실, 색다른 환경과 문화를 체득하며 지금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해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그곳에서도 결국 내가 살아온 대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충격이었다. 동의가 되는 듯하면서도 흔쾌히 동의를 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글을 읽고난 뒤 뭔가 답답한 기분이 드는데, 당최 스스로도 이게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졌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무엇인지를 설파하며 반박 아닌 반박을 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밥부터 먹으려 TV를 켜고 식탁에 앉았다. 이미 재방송으로 챙겨 본 적 있는 어느 예능 프로그램이 또다시 재방송을 하고 있었고, 눈에 익숙한 장면들이 익숙한 흐름대로 흘러갔다. 그렇게 밥을 먹다 어느 한 장면에서 무릎을 쳤다. 스치듯 지나간 화면 자막이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나에게 소박한 해답을 제시했다. '여행은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 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방문한다는 건 적당한 설렘과 긴장감을 준다. 정처 없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일상의 초점이 여행으로 모이면서, 잔잔한 물가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듯 새로운 활력을 선사한다. 일을 하다가 살짝 노곤해질 때면 가 보고 싶은 박물관의 전시 정보를 찾아보며 일하기 싫은 마음을 달래고, 또 생생한 음식 후기를 읽어 보며 힘겨운 오늘을 조금 더 버텨보는 것. 그리고 떠나는 날을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것. 즉, 여행은 일상에 소소한 행복을 선사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고 보면 목록에 빼곡히 적힌 해야 할 일들을 빨간 펜으로 하나씩 지워 나가듯, 그저 바쁘게 먹고, 걷고, 쓰고, 봤던 여행은 그다지 강한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상치 못하게 비가 많이 내려 쫄딱 젖은 채 숙소로 이동했던 기억이나 무언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치솟았지만 허탈한 웃음과 눈물로 친구와 서먹함을 풀어낸 기억, 길을 잃어 가 보고 싶은 맛집을 포기한 채 기대 없이 들어간 카페에서 최고의 커피를 맛본 기억,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누군가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생각보다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여행을 일상을 살아내는 수단이 아닌 탈피하는 수단으로 여겼다면, 나는 이런 기억을 여행의 행복한 순간으로, 어쩌면 이런 돌발상황이 반복되는 여행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여행은 나를 더욱 겸손하게 하는 교과서이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돕는 원동력이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게 하고 같은 실수도 서슴없이 반복하도록 만든다. 그렇다. 나는 살아온 대로 여행을 하고, 여행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새롭게 배운 방법으로 살아가고, 그 모습을 닮은 여행을 떠나고, 그리고 나는 또다시 배운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여행 감각을 키우고 싶다. 고생하는 여행이 즐겁다는 의미는 아니다. 삶을 위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여행을 위한 삶도 살고 싶다. 결론을 지었더니 무궁무진한 기획들이 떠오른다. 싱숭생숭한 연말 분위기에 마음이 처질까 봐 다양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다니, 아무래도 여행은 나랑 좀 잘 맞는 것 같다. 내년도 행복한 순간을 위해 떠나리라. 그리고 행복한 순간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함께하리라는 소소하지만 커다란 결심을 해 본다.


(운영 중인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브런치에도 업로드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kk646/221409706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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