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시리즈 2 - 내가 말할 때와 네가 듣는 때
인스타그램 친구 중에 책을 조금씩이라도, 그리고 자주 읽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그분의 피드에는 특징이 있는데, 책 뒤로 무언가를 휘갈겨 쓴 노트가 항상 등장한다. 호기심에 사진 속 그녀의 노트를 유심히 들여다봐도 무슨 내용인지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느낀 순간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적어 내려갔다는 것과, 무엇보다 독서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져서 나도 필사를 더 꾸준히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곤 한다. 그래서 밖에 책을 가지고 나갈 때면 북 슬리브 안에 펜, 포스트잇과 플래그, 작은 수첩을 넣어 다닌다. 그리고 요즘은 플래그를 붙여 놓았던 페이지를 다시 펴 나만의 필사 노트에 꾹꾹 눌러 적는다. 그때 느낀 감정도 함께 적을 수 있다면 적는다. 그렇게 조금씩 나만의 거대한 아카이브를 생성해나가는 중이다.
이 과정을 시작하기 전, 지금까지는 노트에 어떤 내용을 적어 두었는지 읽어 보니 모두 ‘말’에 관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배려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던진 말에 나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섣부르게 격려를 하려고 해서도 그렇다고 필요한 순간에 침묵으로만 일관해서도 안 되는 '말'에 관한 글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말. 안 하고 살 수는 없는데 참으로 어렵다. 이제는 조언을 하는 것조차 ‘꼰대짓’으로 불리기 쉬운 세상이니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의 양과 질에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번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꺼냈다가 도리어 크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저 내가 필요했던 것은 공감이었는데, ‘야, 나는 두 배로 힘들었어’라는 말로 덮어씀을 당했다. 혹은 나의 행동으로 제3자의 입장은 어땠을지부터 대변하는 친구의 말에 새로운 속상함과 서러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친구는 내가 아니기에 내 상처에 100프로 공감하며 약을 발라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친구를 통해 누구의 아픔의 크기가 더 큰지 비교하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몇 번 그런 대화가 반복되면서 나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느 타이밍에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평가를 받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일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이야기는 제쳐둔 채 적당한 안부를 묻는 문자 메시지만 가끔 오가게 됐다.
얼마 전에는 PC용 메신저로 친구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가 서로의 일상을 간단하게 나누게 됐다. 몇 년째 직장 상사로 힘들어 하고 있는 친구인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직장에서 왜 계속 버티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친구의 거칠어져 가는 입과 마음을 보며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어가면서까지 그곳에서 버텨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래도 나름의 의미를 찾고 즐겨 보라는 조언을 해 보기도 했고, 때론 가만히 들어 주고 같이 욕도 하면서 함께 분을 삭이기도 했다.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들었던 위로의 말은 잘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그때 이후로는 가만히 들어주되, 너무 안타까울 땐 조심스레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친구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는 해 주는 눈치였다.
퇴근까지 힘내라는 말을 건네려 하는 찰나, 친구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연배가 있는 같은 회사 사람이 앞으로도 자신을 힘들게 할 사람은 계속 나타날 수 있으니 예민함을 조금 내려놓고, 지금은 마음을 넓히는 방법과 무례함에 대한 대처 방법을 배운다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들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런 말을 여러 번 해 주었었는데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한 마디로 친구의 기분이 뻥 뚫리다니 기쁘면서도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너한테 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해 왔다고 무심코 쓸 뻔했지만, 좋은 말 해주셔서 다행이라며 그러니까 힘내보자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펼쳐 든 노트 속 글귀를 읽으며 깨달았다. 내가 말을 했던 때와 친구에게 말이 들리는 때가 달랐다는 것을.
전자의 경우, 친구는 제3자의 편을 들었던 게 아니라 힘들어하는 내 모습에 충분히 공감하며 어떠한 사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는 말로 나름의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 당시의 나는 그저 내 말에 무조건 공감해야 된다는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의 말이 들리지도, 들을 준비도 되지 않았던 때에 만나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던 것이다. 직장으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도 순간적으로 서운한 감정을 느낄 뻔했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면 친구에게 그런 위로가 들리는 때는 내가 생각하는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말이 들리는 때'란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아무래도 내 믿음의 분량대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용기 있게, 내 기준에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것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땐 지금은 들리지 않는 때이므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당장은 묵묵히 들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 나가야 한다. 내 마음 편하자고 건네는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강요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잘 구분하려면 대화의 자리에 자주 나가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대화는 너무나 소중하다. 상처를 남길 수도 있지만 상처를 덮을 수도 있다.
해가 일찍 저무는 요즘, 나 또한 어느 시점에 들리지 않았던 말들이 요즘 더욱 자세하게 들려오는 걸 경험한다. 왜 할머니가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엄마는 그때 내 말을 이해해주지 못했는지 새삼 깨닫곤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았던 친구나 제자의 마음이 가슴으로 들려온다.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리고 그때는 그 사람을 기다려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앞으로는 '말의 때'를 더 잘 구분하고 싶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