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시리즈 5 - 작은 한마디가 지닌 힘
주변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 은근히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단골 매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또 어디에서 머리를 할지, 커피를 마실지, 밥을 먹을지, 옷을 살지 매번 탐색하지 않아도 들를 곳이 딱 정해져 있다는 게 은근히 부러웠달까. 특히 미용실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나는 특정한 곳에서 머리를 아주 마음에 들게 해본 적도 없는 데다 미용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가끔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고 느껴질 때만 할인을 해주는 곳을 찾아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편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머리 긴 여성의 경우 염색이나 파마를 하려면 한 번에 기본 십만 원 정도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정착할 곳을 쉽게 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비싸긴 하지만 거기서 매번 했었고 디자이너가 내 스타일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간다’는 말을 하는 게 새삼 있어 보이게 느껴졌다.
이런 남들을 부러워했던 나에게도 어느 샌가부터 단골 매장이 생겼다. 나는 사무실이나 작업실이 없어 집 아니면 가끔 카페에 나가 일을 하곤 한다. 또 카페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집 근처 큰 쇼핑몰에 서점과 카페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매장이 생겨서 자주 방문하게 됐다. 게다가 해당 브랜드의 어플에 내 이름을 등록한 후 음료를 주문하다 보니 직원들도 점차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고 알아본다는 느낌이 들 무렵, 친근한 기분이 들어서인지 많이 혼잡하지 않을 땐 주문을 하며 간단히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날씨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별거 아닌 한두 마디가 서로를 좀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들면서 어느 날부터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주말, 집에 며칠을 틀어박혀 있다 보니 기분마저 답답해져서 좋아하는 책과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갈 곳을 정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자주 가는 카페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경직된 표정으로 카페 문을 열었는데, 카운터에서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향해 두 손을 흔드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니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얼른 다가가 인사를 했다. 의외로 아직까지 한산한 모습이 놀랍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깨달았다. 아하, 나도 이제 ‘단골 매장’이 생겼구나.
굳이 단골 매장에 가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내가 그곳에 마음을 더 쓰는 이유는 뭘까. 옆집보다 가격이 싼 것도 아니고 엄청 가까운 것도 아닌데,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뭘까? 크리스마스 오후에 친구를 만나 내게도 단골 매장이 생겼다는 사실을 전하며 왠지 모르게 그곳에 가는 게 참 좋다고 이야기했더니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결국 말이지 뭐. 별거 아닌데 그냥 알아봐 주고 내가 널 알고 있다고 한마디 건네주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 그거였구나. 별거 아닌 한마디와 반가워해 주는 눈빛,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작은 표시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의미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거 아닐까. 그래서 나도 너를 기억하고 있다고, 나도 널 알고 있으며, 그 성의의 표시가 고마워 다시 찾아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또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에서 작은 정이 생겨나는 것은 아닐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말 한마디’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니, 새삼 입술이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직접 배운 기분이 들었다.
자, 그렇다면 나도 오늘 남은 하루를 ‘별거 아닌 말 해보기’에 집중해봐야겠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맛있다면 맛있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보자. 작은 말이 쌓여 더 끈끈하고 단단한 관계를 이어줄 수 있다면, 오늘 하루 말을 건네는 나도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마음만은 좀 더 훈훈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선 밀린 카톡에 정성스레 대답부터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