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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Oct 24. 2023

'빠삐'가 떠난 날



그날은 12월 31일이었다


12월 31일.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예전처럼 그 친구를 찾아 베란다로 나갔다. 이름은 '빠삐'. 몸길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조그마한 햄스터다. 빠삐라는 이름은 '빠삐용'을 줄인 것이다. 틈만 나면 케이지를 빠져나와 도망치려고 해 이렇게 불렀다. 

걱정은 됐다. 전날 애가 다리가 케이지 틀에 걸려 축 늘어진 채 발견됐다. 서둘러 구해서 잠자리에 놓아두니 약간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였다. '다행이다. 죽지는 않았구나.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모습이 마지막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배춧잎 하나를 들고 평소처럼 케이지 안을 들여다보니 저쪽 끝에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빠삐야 밥 먹자.' 아무리 불러도 움직이지 않는다.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혹시' 하는 생각에 서둘러 문을 열고 아이를 만져 보았다. 차가웠다. 꺼내서 쓰다듬어 보고 마사지도 해 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 즐거움을 선사했던 친구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여보, 빠삐가 안 움직여. 죽은 것 같아." 아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아무 말 없이 전을 쳤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몇 시간이 지난 뒤 음식 장만을 마치고 아내가 입을 열였다. '묻어주러 가자.' 삽 한 자루를 들고 건너편 산으로 가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한겨울이니 당연히 땅이 얼었으리라. 힘들겠다. 빠삐도 춥지 않을까. 힘껏 삽을 내리꽂았다. 어, 삽이 푹 들어간다. 스펀지처럼 푹신푹신한 느낌도 들었다. 쌓인 낙엽이 흙과 섞이며 퇴적현상이 일어난 모양이다. 다행이다. 덕분에 5분도 안돼 땅을 다 파고 그 친구를 묻어줄 수 있었다. "잘 가. 빠삐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도 춥지 않게 지낼 것 같다는 안도감에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하늘도 도와주네. 다행이다."


새로운 동반자


빠삐는 전혀 예상치 않게 우리를 찾아왔다. 어느 날 퇴근해 집에 오니 아내가 말한다. "베란다에 한번 가봐." 왜 그러지, 뭘 옮겨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 보니 생전 처음 보는 것이 떡 하니 놓여 있는 것 아닌가. 네모난 케이지가 있었고 그 안에 뭔가 작은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햄스터였다. 

신기하기도 했고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했다. 아내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을 주기가 너무 두려운 탓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유도 있다. 한때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이 있었다. 애완견을 그렇게 돌볼 여력으로 어려운 이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걸어 다녀야 할 개나 고양이를 유모차에 태우거나 안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다고 동물을 키운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해피(요즘 말로 하면 믹스견이었다)'와 놀곤 했다. 사정이 어려워져 다른 집에 넘겨줬을 때는 눈물을 한 바가지나 흘렸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헤어짐의 아픔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법이다. 더구나 이 작은 햄스터는 생이 길지 않다. 이것저것 뒤져보니 일생이 1년 반 정도라고 한다. 한참 정들려고 할 때 작별인사를 고하는 셈이다. 아내가 말했다. "아들이 학교 끝나고 왔는데 손에 케이지가 들려 있는 거야. 오면서 주웠다나. 아마 학교 앞에서 파는 것을 보고 사 오고 나서 혹시 혼날까 봐 둘러댄 것 같아. 그래서 그냥 키우자고 했어." 이해가 됐다. 아들은 그전에도 병아리를 가지고 와 키우자고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우리가 잘 못 키우면 병아리가 죽는다며 설득해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때 몹시 실망한 아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내가 못 이기는 척 키우기로 한 것은 그때 그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이름부터 짓기로 했다. 아내는 우리 집의 의미 있는 것들에 모두 두 글자 이름을 붙였다. 애마는 '초코'와 '다홍이' 생일 선물로 산 도자기 인형은 '혜명'이다. 이 자그마한 친구는 뭐라 부르면 좋을까 고민하다 문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하루는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햄스터가 열린 케이지에서 뛰어나와 베란다 한쪽 구석에 숨었다. 잡으려 하면 도망가기를 몇 번. 결국 잡혀와 다시 철망 안에 갇혔지만 틈만 나면 도망치려 해 골머리를 앓았다. "얘는 지가 무슨 빠삐용쯤 되는 줄 아나 봐." 50대 이상이면 누구나 다 아는 영화, 자유를 향한 갈망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명화, 더스틴 호프먼과 스티브 맥퀸의 연기가 압권인 '빠삐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빠삐'는 그렇게 우리 집의 친구가 됐다. 

 


행복했을까


톳밥으로 만든 바닥(침대), 쉴 수 있는 안방(비록 몸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놀이기구인 쳇바퀴. 빠삐가 살던 집의 구조다. 하는 일도 단순하다. 밥(주로 배춧잎) 먹고 배설하고 쳇바퀴 돌리는 것이 전부다. '아빠'라고 우기는 사람이 다가오면  먹을 것을 주는 거겠지 하며 다가온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경계심이 풀어지는데 한 달가량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심하지 않을까. 쳇바퀴 도는 일이 뭐 그리 대단히 재미있을까. 그냥 하게 없으니 그것이라도 하는 것일 터이다. 운동은 해야 하는데 동네 산책을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만의 장소가 넓은 것도 아니다. 원래 살던 들판이었으면 신나게 뛰어놀았을 텐데. 안타까움이 생겼다. 인간에 의해 갇힌 삶이 좋을 리 없다.  뭐 재미있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 케이지 틀에 매달려 있는 빠삐에게 손가락을 슬쩍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문다. 약간 아프다. 그래도 참고 기다린다. 점차 힘을 빼더니 이빨로 간지럼을 태운다. 알고 있나 보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 밥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다음부터는 아프게 물지 않는다. 같이 놀자는 듯이 살살 문지른다. 예상이 맞다. 심심했던 것이 확실하다(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그때 숲에 놔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포식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짧은 생애나마 마음대로 다니게 하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쳇바퀴 돌듯 사는 내 인생은 빠삐와 다를까. 언제부터인가 꿈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살기에 지쳐가는 나 자신을 보며 '과연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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